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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28화 (528/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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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는 얕은 잠에서 깼다.

상상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녀는 미리안이 아니라 자신이 견하를 차지한다면…… 그런 가정을 몇 번이고 해 보았다.

이 관계를 뭐라고 해야 할까. 지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음은 나오지 않는다.

감정이 없어져 가는 상관, 곁에서 수면을 취하는 주견하처럼 자신의 감정도 점차 마모되어 가는 걸까.

아니면 이렇게 비틀린 형태로라도 주견하를 가졌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는 걸까.

견하가 무엇 때문에 갑자기 자신을 찾아왔는지, 오래도록 바라만 보고 있던 남자가 왜 드디어 자신에게 눈길을 주었는지, 지나는 혼란스러웠다.

슬픔 때문일까. 잊으려는 것일까.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외로워서? 미리안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려고?

분명한 건 그게 어떤 감정 때문이든, 희미하기만 할 뿐이라는 것.

그러나 그만큼 자신의 감정은 뚜렷하게 느껴져, 지나를 괴롭게 한다.

미리안의 이름이 견하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자신이 있다.

지금 이 상황, 이 관계에 일말의 행복을 느끼는 자신이 있다.

그런 자신을 보고 있자니 혐오가 밀려온다.

미리안의 죽음이 준 ‘기회’라고 생각하고 마는 자신이 싫다.

“……일어났나.”

갑자기 들려온 잠긴 목소리에 지나는 살짝 흠칫했다.

자신에게 닿는 견하의 피부 감촉, 체온이 좋다고 무심코 생각하고 만다. 그냥 별생각 없이 옆으로 돌아누워, 그의 가슴팍을 쓸다가 쇄골 쪽으로 손을 미끄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대답한다.

“자정은 지났을 거예요.”

커튼 너머로는 아직 새벽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침묵이 지나간다.

고등학교 1학년, 애송이 계집애였을 때부터 마음속 왕자님이었던 선배.

그가 단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지나가 듣고 싶은 말을 들려준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 유사 연인, 자기기만의 시간은 소중했다.

설령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일 관련 이야기나 황국의 운명 같은 메마른 것일지라도.

“지나.”

“네.”

이렇게 있을 때는 감찰국장, 혹은 얼마 전에 승진한 정치감독청장이라는 직위를 부르지 않는다. 이름을 불러준다. 그 사실이 좋았다. 그저 감찰국의 직원이던 시절, 그의 후배이기만 하던 시절, 마음껏 짝사랑의 눈길을 보낼 수 있던 시절을 연상시키니까.

하지만 지나는 그 작은 행복마저 찬물이 끼얹어지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곧 최후를 맞이할 거야.”

“……선배?”

당황한 나머지 합하가 아니라 그녀가 처음 견하를 마음에 품었던 시절의 호칭이 튀어나와 버렸다.

무슨 이야기인지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녀가 상상해온 것 이상으로 무거운 화제라는 건 직감했다.

복잡한 설명이 이어진다.

이단, 파멸인, 혁세주…… 무엇이 리안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

견하라는 사람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오염’되었는지.

“세계의 오염은 루우의 몸 상태만 악화시키는 게 아니야.”

루우. 그렇다. 이렇게 옆에 누워 있으면 황제나 신황 ‘폐하’가 아니라 그녀의 이름을 말하는 걸 들을 수 있다.

“내 존재 기반 역시 불안정하게 하지.”

“그럼…….”

원래 영리한 편이긴 했지만, 지나는 9년간 견하의 정치 감각 아래 단련되었다. 상황을 읽고 판단을 내리는 능력은 정치감독청 4명의 국장 중 가장 앞선다고 자부한다.

견하의 후임 정치감독청장으로 발탁된 것도 사적인 이유가 아니라, 4명 중 가장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지나 자신이 10여 년의 세월을 견하와 함께했다는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 자부심을 뒷받침하는 지성으로 지나는 견하의 의도를 읽어냈다.

“설마, 합하께서 최근 진행 중인 개혁은……?”

‘개혁’이라고 불렀지만, 그 말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은 견하에게 충성하는 파벌뿐일 것이다.

미리안 시대에는 이런 걸 개혁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급속도로 진행된 일당 독재체제.

연방의회의 무력화.

종교를 연상시킬 정도의 신황 숭배, 입헌군주제를 내세우는 헌법의 개정.

지하로 숨어든 자들은 이를 ‘퇴보’라고 부르고,

아직 살아서 정권의 주변부에 머무르는 자들은 ‘권력 개편’이라 부른다.

“선대께서 돌아가신 지 1년도 지나지 않았어.”

리안이라고, 누나라고도 하지 않고, 지금 이런 곳에서까지 ‘선대’라는 표현을 쓴다.

마치 미리안과 거리를 두려는 것처럼.

미리안에게는 이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나에겐…… 견하가 무엇을 애써 견디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그가 자기 입에 익숙한 표현을 담는다면,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것을 예감하는 것 같아서…….

“선대 태사의 시대 10여 년. 다행스럽게도 그 기간 덕분에 혼란은 이 정도에서 그친 거야. 내가 선대의 자리를 이어받아 태사가 될 수 있었던 거고.”

하지만 그의 말대로…… 주견하가 얼마 지나지 않아 국정을 장악할 수 없게 된다면?

최후를 맞이한다면?

“내 뒤를 누가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아?”

최효윤? 아니다. 그녀도 상당한 정치 감각을 기르긴 했지만 견하처럼 무자비해질 수가 없다. 그녀의 결단력, 잔혹성은 어디까지나 ‘필요한 수준’에 머무른다.

황국의 태사는 ‘필요 이상’을 보여주어야만 하는 자리다.

자신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당장 견하의 품을 벗어나서 홀로 서야 한다는 생각은 ‘간신히 붙잡은 이 자그마한 행복조차 금방 사라지고 만다’라는 우울한 결론으로 이어지고 마니까.

한재연은? 이 인간은 자기가 따로 꾸미는 것이 있다. 그 때문에 미리안의 유산, 견하가 남길 유산에서 무엇이 왜곡될지 알 수 없다. 굳이 분류하자면 위험한 인간이다. 절대로 ‘주견하 이후’의 시대를 이끌게 해서는 안 된다.

방첩국의 이익서…… 가장 무게감 있는 사내지만 역시 권력 장악과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도 그 점을 이익서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이 사람은 ‘주견하 이후’를 상상해서 움직이지 못한다.

원동인은? 지나는 견하를 바라보며 눈물이 고이는 걸 간신히 참고 있지만, 그러는 중에도 원동인의 이름을 들으면 코웃음 치게 된다. 그 출세에만 미친 건방진 애송이는 언젠가 기회만 오면 직접 미간에 총알을 박아넣어 줄 것이다.

자연스럽게, 누가 ‘주견하 이후의 시대’를 이끌 것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신황 폐하뿐이군요.”

“루우 중심의, 루우가 전면에 나서는 체제. 내가 최후를 맞기 전에 구축해둬야만 해.”

그래, 이런 사람이었다.

자신마저도 전체 시스템을 위한 부속품으로 여기는 냉철함.

주변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냉철해질 수 있는 따스함.

그것 때문에 이 남자를…… 몇 년이나 좋아한 것이다.

물론 주견하를 향한 애정 때문에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 주견하의 마음속에서 그런 따스함은 진즉에 다 사라져, 그저 시스템을 작동시킨다는 강박으로만 움직이는 기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등을 받쳐주던 따스하고 단단한 오른팔과 달리, 기계의 차가움만 남은 왼팔. 그러나 그 신체 왜곡은 겉으로만 드러난 것일 뿐, 속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었는지도 모르지.

그래도 유지나는 주견하를 믿기로 한다.

아직 사람다운 부분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미리안만 그를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녀도 주견하를 믿을 수 있다.

그걸 증명하리라.

“합하, 제가 할 일은?”

질문을 던지지만 바라는 것은 하나다.

부디, 내가 당신을 지탱하게 해주시길.

하지만 견하의 대답은 지나의 기대와는 달랐다.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내가 없을 때, 아니, 내가 영원히 없어질 때를 대비해줘. 나에게서 루우에게로 권력이 넘어갈 때, 그 혼란을 틈타 누가 함부로 기어 올라오지 못하도록.”

기대와는 다른 대답이라 해도, 지나는 견하의 기대를 배반할 수 없었다.

“……네.”

***

마자르 합스부르크 왕실의 신성 제국 망명.

한때는 ‘찬탈자’라고 비난하던 보나파르트 황실에 의존하게 되었으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신성 제국은 일단 망명을 받아주었다.

물론 ‘망명을 받아준다’라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신성 제국 황제부터 관료 집단에 이르기까지, 약간의 지식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지 않았다.

로마 제국이 마자르를 분해해 ‘판노니아의 총독들’을 세운 마당에, ‘고국을 되찾아야 한다’라고 외쳐대는 합스부르크 왕실을 수도 엑스라샤펠로 초대했다?

그냥 연금 몇 푼 쥐여주고 조용히 지내게 하는 게 아니라, 황제 나폴레옹 5세가 직접 마자르의 왕을 만나 껴안고 위로하며 근처 별궁에 머물게 해주었다.

마자르 왕실이 기자들 앞에서 회견하는 것도 막지 않았다. 회견장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당연히 로마 제국의 침략을 비난하고, 모든 마자르인이 결연히 맞설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로마 제국 쪽에서는 반발한다.

“임페리움의 안보를 위협하며 전쟁을 도발했고, 그 책임을 ‘멸망’으로 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리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을 지원한다면 우리가 내릴 결단은 단 하나다.”

도망친 합스부르크 왕실을 추격해 멸한다.

그 추격을 방해하는 무리도 역시 멸한다.

그 목적을 이룰 수단은 가리지 않는다.

전쟁이라 해도.

신성 제국 측에서도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진 않았다.

“마자르가 좀 더 버텼다면 약간의 ‘개입’을 통해 통쾌한 복수를 해 볼 생각이었습니다만…….”

신성 제국의 외교관은 안타깝다는 듯, 입맛을 다신다.

“프로이센은 얼마나 버텨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버틸 힘을 바라려면 일단 우리를 ‘신하’로 삼겠다던 약속부터 이행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신성 제국의 황제에게 고개를 숙인다, 그 대가로 게르마니아의 영토 상당 부분을 할양받는다. 그런 내용으로 협상이 진행 중이었는데, 마자르가 먼저 망해버렸다.

“희생을 하려면 희생할만한 가치 있는 뭔가가 주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엑스라샤펠에서 바라는 답을 듣지 못한다면 콘스탄티누폴리에 사죄 사절을 보낼 겁니다.”

마자르처럼 망해버릴 순 없다. 프로이센은 협상을 없던 일로 하고 다시 로마 제국의 영향권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그렇게 프로이센은 신성 제국을 재촉했다.

이미 로마 제국은 보헤미아, 바르샤바와 접촉하면서 ‘프로이센을 응징할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프로이센의 주권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도록 하죠.”

신성 제국 측의 제안에 ‘반(反)로마 동맹’ 논의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제는 브리튼마저 이 논의에 가담해, 외교관들이 런던과 엑스라샤펠, 베를린을 바삐 오갔다.

“브리튼의 함대는 대서양, 아프리카 연안을 봉쇄하고 육군은 아프리카 내 로마 제국의 동맹국들을 공략합니다.”

“신성 제국은 프로이센과 협력하여 로마군을 저지하는 한편으로, 에스파냐를 공략해 혹시 모를 이중전선을 예방합니다.”

“칼마르는 수오미나 루스계 공국들을 경계하면서 발트해 봉쇄에 협력합니다.”

“에스파냐가 협력적으로 나온다면 프로이센은 정식으로 보나파르트 황실에 예를 표하면서도 동시에 브리튼과의 동맹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에스파냐가 로마 제국을 믿고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대략 이런 논의가 마무리되고 나서, 에스파냐에 최후통첩이 보내졌다.

서유럽과 협력하여 로마 제국 봉쇄에 나설 것인가, 아니면 로마 제국과 서유럽 사이에서 줄타기를 계속할 것인가.

벨리사리우스는 에스파냐에 독립을 보장할 것이라 선언했고, 에스파냐는 이를 믿고 서유럽의 최후통첩을 거부했다.

곧바로 신성 제국, 브리튼, 프로이센, 칼마르, 에이레가 에스파냐를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약속을 철저히 지켜, 온 동맹을 이끌고 서유럽 동맹에 선전포고했다.

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이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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