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전(3)
“티무르 황실의 후예를 찾아서 무굴 제국을 재건하겠다고 내세웠다?”
나폴레옹 5세와 각료들은 씁쓸한 얼굴로 동양에서 날아온 정보들을 살폈다.
중세 몽골 최후의 명장이라 불리는 이성계와, 오스만 투르크를 멸망시킨 티무르의 격돌.
두 사람은 승부를 가르지 못했고, 또 명나라라는 공통의 적에 대응해야 했기에, 이후 몽골계 황통의 역사에 대전환을 일으키는 협약을 맺는다.
바로 ‘모계에 따른 황금 가문 계승 인정’.
루우가 두 숙부를 물리치고 마침내 몽골 카간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협약 덕분이기도 하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보르지긴 황실의 피를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 ‘어머니가 될 사람’이 카간이 되는 것도 역시 인정될 테니까.
물론 루우는 협약이 없었더라도 결국 카간까지 올라갔을 사람이긴 하다.
티무르와 이성계의 협약은 몽골의 보르지긴 황실과 티무르의 후예들, 즉 무굴 제국의 황실 사이에 어쨌든 ‘일가’라는 형식을 심어놓았다.
혁명으로 무굴 제국이 몰락하자 살아남은 황족들은 국경 너머 티베트, 알티샤흐르, 더 멀리 몽골 등으로 망명했다.
“그 황족을 다시 무굴 제국의 파디샤(皇帝)로 내세우지 않겠다는 것이 다이온과 세련 사이의 약속이지 않았던가?”
“대신 티베트 등 다이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것도 약속이었습니다. 먼저 약속을 깬 것은 세련이다, 이것이 다이온의 논리입니다.”
시대는 어두워져만 가고, 엑스라샤펠 황궁의 신성 제국 수뇌부 또한 각자 미간의 주름이 깊어진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강대국 간 전쟁. 여기에 인구 면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강국이 끼어들었다.
경제에는 당연히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공황 이래 각국은 경제적 충격을 줄일 방법을 마련해왔다. 이념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고 경제에 대한 ‘비상조치’를 시행하고, 신성 제국과 브리튼이 다소 부담을 지면서 동맹국들의 금융을 지탱하고 있다.
따라서 경제는 다른 문제에 비하면 심각하게 우려할 일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다이온이 내세운 ‘논리’였다.
“따지고 보면 전쟁을 먼저 도발한 쪽은 세련입니다만, 다이온이 내세운 대응책은 콘스탄티누폴리가 프로이센과 마자르를 이용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신성 제국의 동북부와 동남부.
각각 게르마니아, 알레마니아라 불리는 땅.
“프로이센 왕은 게르마니아를 갖고자 하고, 마자르는 알레마니아와 신성 제국의 황위를 되찾고자 한다…….”
특히 마자르의 왕가, 합스부르크는 부담스럽다. 보나파르트 황실이라면 누구나 위 한구석이 저려옴을 느끼게 된다.
찬탈자.
위대한 조상, 나폴레옹 1세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신성 제국의 황위를 강탈한 지도 100년이 넘었다.
‘프랑스 제국’만의 황제가 된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나폴레옹 1세는 구체제와의 타협을 택했다.
샤를마뉴를 내세워 프랑스와 게르마니아, 알레마니아, 이탈리아를 통합한 대제국 건설의 명분으로 삼았다.
역대 황제들은 그것이 ‘자유’를 바라는 사람들의 목소리라 선전했지만, 그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나 무력으로 합스부르크의 것을 강탈했음은 사실이다.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 제국’인지 뭔지를 만들어 저항하려고 했던 것 같지만 나폴레옹 1세는 이를 분쇄하고 마자르 땅을 떼어주었다.
“즉, 우리가 처한 입장은 오히려 다이온보다는 세련에 더 가까울 겁니다.”
“세력권을 분할할 때 다이온은 버마에서의 혁명은 묵인해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만, 다시 버마의 왕실을 내세워 동쪽에서도 반격에 나설 모양입니다.”
어디나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은 있다.
다이온은 무턱대고 진군하면 지역민들이 자기들을 ‘정복자’로 받아들이리라는 걸 잘 안다.
따라서 구 왕실을 내세워 ‘해방자’를 자처한다.
왕정복고만큼은 죽어도 용납할 수 없는 공산주의자들의 반격은 거세지겠지만, 한편으로는 공산당에 반감을 품은 지역민들의 협조도 바랄 수 있게 된다.
이 비슷한 일을 신성 제국은 이탈리아에서 이미 겪어보지 않았던가.
“프로이센과 마자르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어야 하나?”
격노를 담은 으르렁거림. 하지만 그게 불가능함은 이 자리의 모두가 안다.
‘두 왕의 요구를 예방’하려고 군사행동에 나서면, 바로 그걸 명분 삼아 로마 제국이 전쟁을 걸어올 것이다.
아마 이번엔 ‘로마 제국의 옛 속주 갈리아를 수복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우지 않을까.
사실 그런 명분이라면 에스파냐부터 브리튼까지 로마 제국의 침공 대상에서 벗어나는 나라가 없겠지만.
“이미 루스계 공국들과의 동맹을 재확인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기회만 된다면 콘스탄티누폴리는 남쪽과 동쪽, 모든 전선에서 전면전을 걸어올 겁니다.”
시름이 깊어져만 가는 그때, 누군가 발상의 전환을 내놓았다.
“왕들의 요구를 예방할 방법은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 각료를 향한다.
“그들의 욕망을 거꾸로 이용하는 겁니다.”
“그대의 말은…… 요구를 들어주자는 건가?”
“다이온은 주변국의 자치와 이권을 보장하는 대신 그 군주들을 ‘제후’로 삼아 연방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성 제국 역시 그들이 원하는 영토 일부와 느슨한 ‘연방’을 제안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각료의 말대로만 된다면, 이것은 획기적인 외교의 전환이다.
신성 제국과 대립하느라 로마 제국의 편에 설 수밖에 없던 두 나라가, 하루아침에 신성 제국의 편이 된다.
로마 제국 세력권의 북방 경계선은 크게 후퇴한다. 당장 신성 제국 및 그 동맹의 최전선이 된 바르샤바, 몰다비아, 왈라키아 세 공국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여차하면 그들도 중립을 선택하게 된다는 말.
“외교전에서의 승리를 노린다?”
“하지만…… 가능하겠소?”
“우리에게 ‘현실적 문제’는 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현실적 문제’입니다.”
신성 제국이 프로이센과 마자르를 치면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말려들 수도 있다’라는 부담을 지는 것처럼,
프로이센과 마자르도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려면 ‘신성 제국과 싸워야 한다’라는 부담을 진다.
두 나라는 이미 100년이 넘어가는 보나파르트 체제와 단독으로 맞설 수 없었다.
그렇기에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지만, 문제는 과연 로마 제국이 두 나라의 야망에 힘을 빌려줄까 하는 것이다.
신성 제국 내 민족 운동을 지원하여, 언젠가는 프로이센과 마자르가 서쪽으로 영토를 넓힐 희망을 주긴 하지만…… 이탈리아와 같은 대봉기의 순간이 와도 어쨌든 전투는 치러야 한다.
이탈리아 때야 신성 제국의 외교적 고립, 아즈텍 대륙 내전 개입 실패로 신성 제국 쪽이 물러나면서 끝났지만, 이번에도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까딱 잘못하면 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이 열리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신성 제국과 프로이센, 마자르는 ‘현실적으로’ 충돌을 방지하면서 서로가 원하는 바를 이룬다는 합의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신성 제국의 밀사가 두 나라의 수도, 베를린과 부다페스트를 방문했다.
‘신성 제국 황제에게 형식상의 제후로서 충성 맹세를 한다’라는 부분이 걸리긴 했지만, 영토 확장의 야욕은 그보다 더 컸다.
마자르의 합스부르크도 ‘현실적으로 황위를 되찾기는 어렵다’라는 결론은 이미 내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가질 순 없다. 그렇다면 옛 수도 빈과 ‘오스트리아’라 불리는 땅을 되찾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오래전에, 다른 가문들이 신성 제국의 황제였을 때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족할 때도 있지 않았던가.
그런 계산 속에서 세 나라의 물밑 협상이 오갈 때, 그들이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다른 움직임이 또 꿈틀대고 있었다.
북으로는 프로이센, 남동쪽으로는 마자르 사이에 끼어서 항상 두 나라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는 나라.
보헤미아였다.
***
“프로이센과 마자르가 신성 제국과 협상에 들어갔다?”
“옛 라인동맹 정도의 선까지 신성 제국이 대폭 영토를 양보하면서, 두 나라가 신성 제국의 제후 형식을 취한다는 게 밀약의 내용이다…… 그런 첩보입니다.”
벨리사리우스의 표정은 미묘했다.
당장이라도 격노를 쏟아낼 듯하면서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
“마자르, 프로이센이 우리와의 동맹을 배신하고 신성 제국 쪽으로 넘어가면, 프로이센이야 그렇다 치더라고 마자르가 우리와 맞대는 경계선이 너무 깁니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동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국경선은 늘 신성 제국과 긴장 상태다. 여기서 더 동쪽으로 경계선이 연장된다?
로마 제국에게만 부담이 아니다.
로마 제국에게 의존하고 있는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바르샤바도 위기에 처하고, 저 멀리 보헤미아는 고립될 수도 있다.
영향권에 든 나라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로마 제국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만약 보호하지 못한다면, 다른 나라들은 로마 제국이 능력도 의지도 모두 잃었다고 판단할 것이다.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각국부터, 북쪽으로는 루스계 공국까지……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 자체가 와해될지도 모른다.
“보헤미아 측의 반응은 공포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삼국의 동맹이 성사되면 다시 합스부르크 왕실에게 병합당하든지, 아니면 프로이센과 합스부르크에 분할당하는 처지에 놓일 거라며 우리의 도움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보헤미아의 둥근 국경지대에는 게르만계 주민들이 많이 산다. 그것은 나폴레옹 1세 이전, 중세 신성 제국의 흔적이다.
이들이 각기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 지역에 병합되길 바란다면, 그 과정에서 보헤미아는 멸망의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다.
로마 제국의 도움이 절실하다.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도, 이렇게 절실한 자들을 외면하면 제국으로서의 위상이 손상되고 말 터.
벨리사리우스 황제의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렇게 발표하도록 하지. …… 신성 제국, 프로이센, 마자르의 제휴는 유럽의 질서를 흔드는 불필요한 도발이며, 특히 신성 제국의 행동은 평화협정 위반이다.”
여기서 평화협정은 로마 제국과 신성 제국이 이탈리아 사태 이후 맺은 협정을 말한다.
“우리는 임페리움을 향한 이와 같은 안보 위협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동맹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피를 흘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벨리사리우스는 이렇게도 덧붙였다.
“대전쟁이 세련까지 확장되는 이때, 각국이 외교적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지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길 바란다.”
마지막 말은, 신성 제국 측에서 일부러 어떤 사실을 상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로마 제국이 동쪽, 세련과의 국경에 부대를 증강 배치했다는 사실을.
벨리사리우스의 기분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기회는 보헤미아에서 왔다’이다.
신성 제국은 넘어올 것인가?
로마 제국이 결국 군사적 개입은 하지 못하리라고 판단 내릴 것인가?
계속해서 로마 제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도발을 던져댈 것인가?
***
답은 ‘그렇다’였다.
로마 제국이 신성 제국, 프로이센, 마자르 3국 간 협상 중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이들은 감출 것도 없다는 듯이 대놓고 각자의 수도를 향해 외교관들을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은 연일 비난의 수위를 높였다.
그러나 ‘행동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듯이.
‘로마 제국은 끝내 결정적 대응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세 나라를 안심시키면서.
바로 그 순간, 1938년에 마침내 봄이 찾아오자 벨리사리우스는 행동에 들어갔다.
황제수권법 이후 그의 행동에 제약은 없었다.
로마군이 합스부르크 왕가를 끝장내러 부다페스트를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