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전(2)
“전쟁터 체험은 어땠지?”
상관, 주견하는 약간 웃음기를 띤 얼굴로 그렇게 동인에게 물었다.
그 웃음기가 정말 부하에게 농을 걸 의도를 담고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지.
“각…… 합하께서 저에게 무엇을 깨우쳐주려 하셨는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주견하. 하지만 아직 정치감독청 업무는 겸하고 있다. 원동인의 소박한 야망이 있다면 그 자리를 자신이 물려받는 것이다.
당장은 아마, 그 유지나라는 여자가 물려받겠지만.
“내가 원 국장에게 무엇을 깨닫게 했다는 건지 듣고 싶군.”
“전쟁은 전장에서 한걸음 물러서서 전체적인 전략을 조망하기도 해야 하지만, 전장에 직접 나가야 오히려 큰 그림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걸 깨닫고도 살아서 돌아오기까지 한 점은 칭찬하지.”
“감사합니다.”
“그럼 원 국장이 본 전쟁의 큰 그림은 뭐지?”
“……서태평양의 제해권 확보가 시급합니다.”
주견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 침묵은 아마 태사 주견하가 자신의 식견을 시험해보는 것이라 여겨, 동인은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저는 합하께서 일본을 결국 연방에, 나아가 황국에 완전히 병합할 계획이시라 생각했습니다.”
“그건 긍정도 부정도 해 줄 수 없겠군. 원 국장의 추정이 옳다는 전제하에, 계속해보게.”
지금 이 순간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대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두 청년 사이를 오간다.
“그러려면 현 일본의 정권이 안정되어야 합니다. 일본의 친원정권이 안정되어야 황국은 이를 발판으로 멕시카를 향한 반격의 깃발을 드높일 수 있습니다.”
“일본의 친원정권 안정은 간토를 점령 중인 멕시카군의 섬멸에 달렸고.”
“예. 그런데 바다를 통한 보급선이 버젓이 유지되는 현 상황에서 일본 친원정권의 안정을 바라긴 어렵습니다.”
“멕시카군이 남아 있는 이상 현 정권의 반대 세력은 희망을 품을 테니 말이지.”
“만에 하나 멕시카가 마닐라, 마자파히트, 봉래로 전장을 넓힐 경우…… 당연히 이들은 우리의 동맹이 되겠습니다만, 서태평양 제해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우리가 동맹을 도울 방법은 없습니다.”
“동맹을 맺어두고서는 ‘방어는 각자 알아서’라고 하기도 민망한 노릇이지.”
알겠네, 기억해두지, 라면서 견하는 화제를 전환했다.
다른 화제로 원동인의 역량을 측정해보려는 것처럼.
“하싸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
원동인은 재빨리 하싸라는 지명을 머릿속 백과사전을 뒤져 찾아낸다.
티베트의 수도.
그리고 불온한 움직임이라고 한다면…….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입니까?”
“세력권 협의는 아슬란 정권과 맺은 것이었지. 아슬란이 실각하고 생사불명이 된 지금 하르샤라는 인간이 약속을 지킬 거라는 보장은 없다. 아니 오히려……”
제 알량한 정권 유지를 위해 외부로 시선을 돌리려 들 터.
“내가 태사가 되는 과정에서 다이온 정국이 어지러울 것이라는 판단도 들었겠지. 이중전선을 감당하기도 어려울 거라는 계산도 했겠고. 원 국장 자네가 말한 대로 일본에 상당한 병력이 묶여 있지 않은가.”
동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합하의 기분도 헤아리지 못하고 일본 전역의 사정에 대해서만 잘난 듯이 떠들어댄 것 같았다.
“관계 냉각 정도라면 감당할 수 있다. 그따위 생각들을 하지 않았을까?”
동인은 감히 ‘그럴 것 같습니다’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원 국장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나?”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대답한다.
“친위국장의 선에서 내놓을 수 있는 해결책이라면…… 즉각 저와 친위국이 하싸에 들어가 불순분자들을 색출해내겠습니다.”
“세련의 군대가 국경을 넘는다면? 전장을 겪어본 원 국장은 이제 이게 어떤 사태인지 감이 좀 오나?”
잘 오고말고. 전장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원동인 본인도 꽤 강도 높은 군사 훈련을 받았고, 친위국 직원 중에는 군의 최정예 부대 부럽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정예도 포격의 바다에 던져놓으면 그냥 시체일 뿐이다.
세계혁명연합 정규군의 화력을 친위국 ‘따위’가 당해낼 수 있을 리 없다. 이단이나 그들이 탑승할 기갑사를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세련에 이단이 없겠는가? 전차가 없겠는가?
“……결코 바라지 않는 사태입니다만, 티베트를 포기한다는 선택이 들이밀어질 것입니다.”
“그럼 바라지 않는 사태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동인은 고민한다.
답은 아마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시험이다.
“……적의 계산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어떻게?”
“적이 우리가 이중전선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티베트 개입에 침묵하리라고 판단했다면 그와는 반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전면전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아마 적이 가장 바라지 않는 사태일 테니, 적이 물러나게 하려면 그 수밖에는 없습니다. 전쟁은 결국 적이 싫어하는 짓을 찾아내서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견하는 끄덕였다.
“좋은 의견 감사하네, 원 국장. 이만 물러가 보게.”
***
견하는 최고사령부에서, 황국원수인 신황 루우 테무르 곁에 앉았다.
“우리 군을 티베트 국경 너머로 진입시켰습니다.”
티베트의 수도 하싸는 다이온보다 바라트 국경에 더 가깝다. 세련과 맞서려면 먼저 행동해야 한다.
신황은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김천열을 비롯한 장성들 역시 감히 말을 보태지 못했다.
잠시 뒤에 세련의 대사가 최고사령부로 불려왔다.
이 불쌍한 대사는 본국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불러놓고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는 다이온 최고사령부 사람들 앞에서 바삐 눈알을 굴렸다.
견하는 몇 번이고 시계를 확인했다.
이윽고 방첩국장 이익서가 들어와 견하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제야 견하는 세련 대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귀국의 군대가 티베트 혁명을 돕겠다면서 군대를 국경 너머로 투입했다는군.”
“……그, 유감, 입니다…….”
“유감일 것까지야. 대사는 즉각 출국 준비를 하시오. 대사관은 폐쇄될 겁니다.”
“펴, 평화적 해결을……”
“아, 그걸 잊었군.”
견하는 루우에게 시선을 보냈다. 루우는 끄덕이고는 말했다.
“짐은 약속을 무겁게 여긴다. 티베트의 독립, 정치 안정을 보장한 선대 태사의 선언은 지켜질 것이다.”
“본국에서도 티베트의 주권 자체를 위협하려는 것은……”
신황은 입을 굳게 다물고, 다시 태사 주견하가 말했다.
“현 시간부로 대원황국은 신황 폐하의 뜻을 받들어 세계혁명연합에 전쟁을 선포하는 바입니다. 이 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귀국에 있으며, 귀국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 전까지 전쟁은 지속됩니다.”
***
세계 각국은 크고 작은 체스의 말과도 같다.
벨리사리우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이 체스는 조금 특이해서, 자신이 쥔 말 하나만을 움직일 수 있고 나머지 말은 저절로 움직인다.
그 말들은 자기 뜻에 완벽하게 따라주진 않지만, 그래도, 어떻게 움직이도록 유도할 방법은 있었다.
“로마 제국, 세계혁명연합의 동태를 경계하며 군을 동방 국경에 증강 배치…… 이런 정보를 흘리도록 하지.”
그런 명령을 내리면서, 어렸을 때 한 번 청혼했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린다.
미리안에게 딱히 애정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후계자, 꽤나 총명하다고 생각했던 소년이 이제 동방의 대제국을 경영하는 방식은 무척 흥미로웠다.
“이중전선을 감당하면서까지 맞서려고 한 건가.”
사실 조금 유쾌했다.
“공산당을 이끌 자격도 없는 어설픈 놈들의 허를 찔렸군.”
하르샤라는 머저리는 당장 다이온군을 상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아마 쿠데타 ‘동지’들의 손으로 어디 높은 성벽에 목 매달리고 말 것이다.
“주견하 태사가 뭘 보여줄지는 차차 기다리도록 하고.”
벨리사리우스는 지도로 눈을 돌렸다.
‘서쪽의 전력이 비었다’라는 느낌만 주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어딘가에 아주 살짝, 불똥이 튀게 해야 한다.
***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뛰어넘어, 우리는 신황 폐하의 충성된 신민이라는 공통의 가치를 바탕으로 황국의 수호라는 가장 기본이 되는 과제를……”
여당, 제국입헌당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대표가 갑작스럽게 연 기자회견에서 읊어댄 내용이었다.
공산국가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당연히 다이온 내부의 범좌익 세력들에 대한 시선이 좋을 리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작년 미리안 태사의 전사 이후 주견하가 주도한 숙청을 실컷 봐 왔다. 두 정당은 살아남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그래도 혁명 정신이 있는데 무자비한 독재자, 그 뒤의 군주에게 목숨을 구걸할 수는 없다…… 그런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정말 오랜만에 지하로 숨어들거나, 망명을 택했다.
남은 사람들은 이렇게 ‘황국신민충성결의’인지 뭔지 하는 낯 뜨거운 아첨을 해댄다.
이미 제국입헌당의 위성정당으로 납작 엎드렸으니, 이렇게까지 행동하면 주견하도 봐주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주견하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불법화’라는 답을 돌려주었다.
“정치를 하고 싶거든 기존 당적을 포기하고 제국입헌당에 입당하도록.”
그게 견하가 베푼 자비였다.
어쨌든 일당독재에 협력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그들은 무릎 꿇고 그 자비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껍데기만 남아 있던 다이온 연방의 다당제는 완전히 무너졌다.
***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초모룽마도 히말라야 전선을 불태우는 포격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하싸에 진입한 친위국과 다이온군은 티베트 혁명 세력을 철저히 진압.
곧장 몇 안 되는 세련군의 진로를 막고 항전에 들어갔다.
티베트 정부는 다이온 연방 가입을 선언. 그 군주는 중세에 그랬던 것처럼 카라코룸의 군주에게 충성 맹세를 했다.
“히말라야에 병력을 밀어 넣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이런 판단이 서자마자, 세련은, 하르샤는 또 하나의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다.
동쪽, 버마 너머로 혁명을 확산시킨다.
정확히 말하자면 라타나코신을 침공한다는 결정이었다.
당연히 라타나코신 역시 연방 가입을 선언.
라타나코신이 세련에게 점령당하면 동쪽의 베트남, 남쪽의 마자파히트 역시 위험해진다.
베트남은 일본공화국에서 일어난 쿠데타 이후 다이온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지만 보다 많은 부대와 시설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먼저 해 왔다.
사태를 지켜보던 마자파히트 역시 다이온에 보다 긴밀하게 접촉해왔다.
이 나라들이 다이온군에 각종 시설과 도로, 물자를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라타나코신으로의 진격 역시 별다른 성과 없이 가로막혔다.
“문제는 황국이라는 공통의 적과 싸우게 된 세련, 멕시카 간 동맹이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방첩국장 이익서의 보고로든, 외무장관 송인섭의 보고로든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 문제겠죠. 그들이 본격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하면 ‘이중전선’의 함정은 작동하고야 말 겁니다.”
그 이중전선으로 몰아넣은 건 태사 합하지 않소, 하고 항의할 자는 이 최고사령부엔 없었다.
그리고 주견하는 공포 외에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할 다른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주르반 프로젝트의 진면목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보여주도록 하죠.”
바로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