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전(1)
혁명정신재건위원회 위원장 하르샤는 고심했다.
주석을 칭할 수가 없어서.
2대 주석 아슬란을 처리했으니 이제 자신이 3대 주석의 자리에 오르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쉽지 않았다.
아슬란을 몰아내는 쿠데타는, 아슬란을 제외한 세련의 모든 파벌이 합심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 정도로 광범위한 협력을 이뤄내지 않았다면 아슬란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었겠지.
문제는 외국에 보여줄 얼굴도 필요했고 선봉에 설 사람도 필요해서 하르샤가 임시 우두머리가 되긴 했는데…… 평시의 우두머리로는 좀처럼 인정들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슬란을 몰아낸다는 목적으로 일단 모이긴 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몰아내고 싶은 이유’가 각자 달랐다. 그게 쿠데타 후 세련 정계의 미묘한 긴장을 자아냈다.
공산귀족이라는 말이 있다.
반동들이, 혹은 자본가들의 혁명 국가의 지도층을 경멸하듯 이르는 말이다.
실제로 귀족 출신인데 자기 가문의 악행에 질려서, 공부를 거듭하다 보니 사회주의에 투신한 혁명가들도 있긴 했다. 그러나 보통 그런 이들은 자기 신념을 관철하기 위함인지 오히려 자기 특권을 버리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공산국가에 살긴 하지만 ‘귀족’은 확실히 아니었다.
귀족의 특권이 철폐된 그 자리에 ‘혁명의 간부’들이 들어앉아 비슷한 부귀를 누리기 시작하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공산귀족’이 생겨났다.
동무니, 동지니 하는 호칭으로 불리지만, 그들이 누리는 쾌적한 의식주 모두 당과 국가에서 배정받은 것이지 그들의 재산이 아니건만, 그들은 그게 다른 인민들보다 자기네가 우월한 증거라도 되는 양 거들먹거렸다.
아슬란의 개혁이 일차적 개혁으로 삼은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당연히 이권을 잃고 싶진 않았겠지.
그들의 동기야말로 가장 추잡하면서도 솔직하다.
두 번째 부류는 진심으로 아슬란의 노선이 틀렸다고 믿는 자들이었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를 도입하겠다는 아슬란의 주장은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세련은 이미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견을 지닌 당’, 즉 다당제를 인정하고 인민이 뽑은 ‘의원’들에게만 정치를 맡긴다?
그것은 자본가들이 만들어낸 가짜 민주주의라고, 바라트의 혁명가들은 생각했다.
“민주주의란 인민이 직접 결성한 조직으로부터 중앙 조직을 향해 의견을 전달하여 작동하는 것. 인민의 직접 의사가 의회에 가로막히면 그것은 진정한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그런 체제는 인민의 의지를 왜곡하고 만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민주주의가 결국 중앙 조직의 독단으로 인민이 제기한 이의를 묵살할 수 있다는 약점은 외면한다.
아래로부터 올라온 의사가 ‘의회’라는 권력이 되어 중앙 행정기구를 ‘견제’하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중앙 조직을 장악한 자에 의해 민주주의가 파괴된다.
아슬란은 그 점을 꿰뚫어 보았고, 그래서 ‘반동적’이라는 비판까지 감수하면서 개혁에 착수하려 했다.
“‘다양한 의견을 내세우는 여러 정당’의 허용은 끝내 혁명을 부정하는 주장까지도 ‘다양한 의견’으로 인정, 혁명이 반혁명에 굴복하는 결과를 낳는다. 다양한 의견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무굴 황실 복고까지도 허용할 텐가? 반동은 민주주의에 편입되는 순간 그런 관용을 베푼 다른 모든 정파를 죽이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들 것이다.”
그들의 말은 어느 정도는 옳았다.
당장 다이온의 ‘연방의회’를 보자.
미리안이 자랑스럽게 전통과 진보가 조화를 이루고, 피지배 민족과 지배 민족이 벽을 허물 장이라고 내세웠지만…… 지금은 어떤가.
미리안 본인은 죽고, 그녀의 연인이자 최측근은 그 어설픈 민주주의를 가차 없이 파괴했다.
연방의회는 그저 박수로 주견하의 독재체제에 기만적 합법성을 얹어주는 도구가 되었다.
아슬란의 개혁이 미리안과의 회담을 통해 실마리를 얻은 것이라면 더더욱 막아야 했다.
결과가 보여주지 않는가. 아슬란이 개혁이라 이름 붙인 반동은 결국 혁명을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의 길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란 ‘혁명을 파괴할 자유’를 의미하며, 절대로 민주주의에 가까이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었다.
앞선 두 부류가 이처럼 무언가를 ‘지킨다’라는 동기로 쿠데타에 합류했다면, 세 번째 부류의 동기는 이질적이었다.
그들은 새로 ‘얻고자’ 했다.
이 세 번째 부류에는 하르샤도 속해 있었다.
그는 쿠데타에 협력한 공로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혁명의 혼란기에 출세의 사다리를 붙잡으려고 전향한 이들처럼 말이다.
그런 하르샤와 비슷한 야망을 지닌 이들이 이번 쿠데타의 선봉에서 활약했다.
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아슬란이 국제무대에 바라트를 복귀시키면서 약속한, ‘세력권 분할’에 대한 불만이었다.
혁명은 여기까지만 하겠다, 거기 그 나라에는 혁명을 전파하지 않겠다.
‘세계혁명연합’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혁명하지 않겠다는 것은 혁명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아슬란은 혁명의 배신자라 불러 마땅하다.
여기에는 혁명의 확산, 세계혁명의 추진을 또 다른 출세의 사다리로 삼아보려는 이들의 야심도 들어 있었다.
이토록 다른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히다 보니, 당연히 ‘혁명정신재건위원회의 하르샤가 새 주석이 되는 것’은 갑론을박을 반복하며 1년이 넘도록 한 걸음도 나아가질 못했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주견하가 끝내 태사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하르샤의 고심은 조급함으로 더욱 깊어졌다.
-다른 파벌들을 압도할 권력이 필요하다.
-권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업적에서 나온다.
하지만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사람답게 하르샤는 본인이 세련 전체를 전면 전쟁으로 이끌 주제가 못 됨은 잘 알고 있었다.
-벨리사리우스가 안전하게 아라비아를 정복한 것처럼, 새로운 정복지가…… 너무 초라하지 않으면서도 외교 마찰은 크지 않을 희생 제물은 없을까.
그런 그의 눈에 ‘티베트’가 들어왔다.
“주견하가 태사로 집권하고, 그 과정에서 독재체제를 위해 헌법을 뜯어고치고, 동쪽으로는 일본에서 멕시카에 이르기까지 태평양 전체를 무대로 삼아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티베트를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겠는가?”
이탈리아의 봉기, 그것을 이용한 벨리사리우스의 이탈리아 병합. 그 후로 4년이 지났지만, 신성 제국은 전면전을 선포하기는커녕 이만 갈고 있다.
다이온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력하게 항의하고, 국경에 위기가 확산되어도, 다이온 정부는 전면전을 시작하면서 이중전선을 만들지 못한다.
“아슬란이 중단한 혁명의 확산. 그것이 나 하르샤로부터 다시 시작된다.”
시대를 바꾸겠다. 그런 인상을 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더 많은 지지를 모아 주석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하르샤는 그렇게 계산했다.
혁명정신재건위원회 위원장 명령이 하달된다.
“티베트 수도 하싸에, 혁명 조직과 연락을 취하도록. 우리가 ‘동지’들의 혁명을 도울 것이라고 전하라.”
***
원동인의 눈은 움푹 들어갔다는 표현 그대로, 퀭했다.
-도대체 신황 폐하며 태사 각하며 이런 걸 어떻게 견딘 거지.
멕시카군 포로를 전원 처형하는 일은 애들 장난이었다. 반복되는 총성, 쓰러진 시쳇더미를 치우고 행정 처리를 하고 흙으로 덮고 핏자국을 지우고…… 딱 잘라 말해서, 남을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살인의 죄책감이 사람을 망가뜨린다고? 마음이 점차 황폐해진다고?
내가 살해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 그냥 계속 눌러앉아 있는 것만큼은 아닐걸?
주견하가 원동인에게 안겨준 임무는 편한 후방 지휘소에서 참모 역할을 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우흥섭이나 장해진, 두 대장이 부르면 민사작전 문제를 논의하긴 했지만, 다시 이렇게 전선으로 돌아와 직접 전장을 체험해야 한다.
간토의 평원을 버리고 산악 지대로 전선을 물렸기에, 원동인도 어느 능선에 판 참호 속에서 비뚜름하게 앉아 명령을 기다렸다.
적의 포격.
아군의 맞대응 포격.
적과 아군의 항공기가 공기를 울리는 소리.
그 모든 것이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죽음이 뒷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동인은 머리털이 곤두서는 걸 넘어 온몸의 신경이 조여드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게 다 지나가고 나면,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함성.
적이 돌격해오는 소리다.
나무 같은 건 이미 포격전으로 전부 부서지거나 불타 버렸다. 동인을 지켜주는 건 참호의 깊이, 그리고 돌가루나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주변과 구분이 거의 안 되는 군복 정도였다.
“아니 대체 얼마나 많은 거냐고…….”
옆에서 전투 경험이 좀 많은 것 같은 고참 병사가 불평하는 말이 들린다.
장교도 부사관도 아닌 애매한 위치의 원동인은 그들의 말을 그저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장군들의 작전회의에서 잡아내지 못하는 전장의 생생한 소리를 들려주었다.
-적은 무모한 돌격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돌격에서 소모되는 탄약과 인력은 어디서 보충해오는가.
-제해권을 장악하고 본토에서 끊임없이 실어 오는 것인가.
-대체 이 무의미해 보이는 적의 돌격에는 무슨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인가.
상관이나 선배 국장들이라면 좀 더 빠르게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겠지만, 원동인은 상대적으로 좀 느렸다.
그래도 정신없이 멕시카군을 쏘아 쓰러뜨리면서 원동인은 서서히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멕시카군은 일단 일본 열도에서 확보한 점령지를 넓히면서, 다이온의 괴뢰가 된 일본 정부를 흔들려 한다.
-이들의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작전은 결국 계산된 것으로, 어쨌든 멕시카 본토에서 실어 오는 사람과 물자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즉, 서태평양의 제해권이 멕시카에 있는 이상 일본 열도의 전투는 끝나지 않는다.
동해야 간신히 다이온을 중심으로 재편된 연합함대와 다이온 공군의 힘으로 제해권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일본 열도 너머 동쪽, 서태평양은 아니다.
이오지마, 하와이, 멕시카 서쪽의 타카마가하라까지 이어지는 물류의 거대한 흐름. 그걸 끊어놓을 방법은 없는가.
게다가…… 아무리 친절함을 유지하려 해도, 일본인들의 인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먼바다에서 싸우다 나중에 상륙한 멕시카군보다, 우리 다이온군을 더 ‘점령군’으로 여기는 듯했다.
-멕시카군이 다이온군의 발을 붙들어두는 동안, 다이온에 저항해볼 수도 있겠다…… 뭐 그런 판단을 하는 일본인이 없다곤 못하겠다.
-만약 이 전쟁에서 멕시카에 협력하면, 오히려 다이온의 괴뢰인 지금보다 멕시카의 세력권에서 더 많은 자치를 누릴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이대로 적의 막대한 출혈이나 방어선 유지에만 만족하고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한 날, 몇 번째인지 모를 멕시카군의 공세를 물리친 동인에게 카라코룸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친위국 국장의 임무로 복귀하라는 명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