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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23화 (523/541)

영혼기관(2)

벨리사리우스는 장성들과 함께 황궁 안에 마련된 작은 극장에 앉았다.

상영되는 작품은 영화가 아니었다.

멕시카군의 기록 영상이었다.

붉은 공간 속 교전 상황을 촬영한 것인데, 아마도 국민들에게 멕시카군의 활약상을 자랑할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국민들의 사기를 고조시켜 동원 효율을 높인다…… 는 계산을 했겠지.

“유감스럽게도 그러진 못하게 됐지만.”

벨리사리우스 황제의 냉소대로, 붉은 공간 속의 전투는 멕시카의 참패로 끝났다.

도저히 대중에 공개할 수 없게 된 이 영상 자료는 멕시카군 수뇌부 사이에서만 돌다가, 로마 제국의 첩보망이 복사본을 입수해 콘스탄티누폴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다들 보시오.”

영상 중간, 벨리사리우스가 특히 강조하는 부분이 있었다.

장성들의 탄식이 터져 나온다.

갑각류와 파충류를 뒤섞어 놓은 것 같은 거대한 괴물이, 하얀 표면을 번뜩이며 멕시카군 쪽으로 돌진한다.

촬영자가 있는 방향과는 다른 곳으로 돌진해 들어가지만, 그 공포감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괴물의 뒤쪽, 갈기처럼 뻗은 촉수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멕시카 병사들을 도륙한다. 꿰뚫기도 하지만 짓이기거나 난도질하는, 매우 고통스럽고 잔인한 공격도 하고 있다.

괴물과 결국 백병전으로 부딪치게 된 멕시카 병사들의 공포가, 이 도저히 선명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영상 너머로 전해진다.

“저것이 지금 다이온의 전쟁성 장관, 주견하요.”

황제의 말에 장성들이 숨을 삼킨다.

“……고려의 기갑사 기술이 저 정도로……?”

“아니, 기갑사라기엔 파멸인의 모습에 더 가깝지 않은가?”

“하지만 저 크기는 기갑사 아니오?”

“그 ‘불가살 단계’라는 부작용인가?”

“그랬다면 지금 멀쩡하게 다이온 정국을 주무르고 있진 못하지요.”

불안한 추측들만 오가는 장군들의 대화 사이로, 황제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소.”

장군들의 논쟁이 그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단 기술에서 뒤처져 있다는 사실이오.”

단 한 개체라고는 하지만 전장에서 포화를 맞으면서도 날뛰는 짐승을, 고려는 만들어냈다.

그리고 로마에는 단 한 개체도 없다.

황제 폐하라면 어쩌면…… 이라고 생각한 자들도 있긴 했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내놓지는 못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위험한 곳으로 나간 적은 종종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주견하처럼 폐하가 좀 나가주실 수는 없겠습니까’라고 할 수는 없잖은가.

“신수덕이 남기고 간 기술의 파편, 고려나 멕시카에서 빼낸 실전 자료 등을 토대로 우리도 시험적인 기갑사를 운용하고는 있소. 하지만 아직은 초보적인 단계요.”

이탈리아 사태 때는 투입하지 못했고, 아라비아 전역 때 간신히 시제품이 나와서 전장에 무리하게 투입되었다.

그 결과는,

“과연 이 병기가 전차나 장갑차에 비해 무엇이 나은가, 하는 의문만 불러일으켰습니다.”

장성 중 하나가 호된 질책을 각오하고 발언했다. 그의 말에 황제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장성들도 용기를 낸다.

“다이온에서 쓰는 기갑사는 다양한 무기를 탈부착할 수 있도록 개량한 모델입니다만, 현재 우리 제국의 기갑사는 백병전에서만 겨우 보병보다 우위에 설 뿐입니다.”

“그래도 일단 돌격에 성공해 백병전에 돌입하기만 하면 전차는 상대도 안 되지 않습니까. 시제품인 데도 그 정도 성과가 있다는 건…….”

“일부 성과는 인정합니다만 한정적인 상황에서만 거둔 성과라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으로 치면 관절, 그러니까 구동부가 많아서 전차가 따라잡지 못하는 기민한 움직임이 가능한 건 분명 장점이지만, 구동부에 모래가 끼어서……”

사막이라는 환경에서의 전투는 어떤 병과에나 가혹한 법이지만, 실험적으로 도입한 기갑사 부대엔 특히 더 그랬다.

“그나마 작전에 ‘제한’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장군 하나가 입에 담은 ‘제한이 없었다’라는 말.

그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아라비아 칼리프국에 제대로 된 군사력이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국제 여론의 눈치를 볼 것 없이 반도 전체에 대한 무자비한 파괴가 가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쟁은 어떤 식으로든 잔인한 법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전쟁 이후’를 생각하며 임시 통치기구를 꾸리기 마련이다. 그것은 로마 제국군의 군정일 수도 있고, 협력적 민간인에 의한 자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아라비아 정복에 있어서 그런 요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고대부터 이어져 온 인도양을 무대로 한 무역이 완전히 봉쇄되었기에 아라비아 군대는 20년도 더 된 무기 체계로 로마군의 공격을 받아내야 했다.

로마 제국 정부는 아라비아 칼리프국을 속국으로 둘 생각도, 칼리프를 로마의 통제를 받는 종교 공동체의 수장 정도로 둘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칼리프와 아라비아의 수뇌부도 일반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의 화력에 쓸려나갔다.

이런저런 ‘제한’이 있었다면, 전쟁에서 패하진 않더라도 꽤나 큰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기갑사가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굉장히 유리한 환경 덕분이기도 하다고, 이 장성은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벨리사리우스는 장군들의 논의를 듣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이온과 멕시카의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다 되어 가고, 그만큼 세계정세는 어두워져만 가오.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이 틈을 타 우리가 겨우 되찾은 고향인 이탈리아를 다시 빼앗으려고 음모를 획책하고 있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서유럽을 상대할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지 못하면 이탈리아는커녕 제국의 주권조차 지키지 못할 것이오.”

벨리사리우스의 말은 다소 과장된 듯했지만, 위기가 로마 제국을 향해 다가오는 건 확실했다. 콘스탄티누폴리에서도 사람이 좀 모였다 싶으면 심심찮게 동유럽과 서유럽의 전면 전쟁을 가정하는 이야기가 오간다.

특정 국가가 아니라 ‘서유럽’이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최근 4년간, 신성 제국과 브리튼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 각국의 동맹은 강고해졌소.”

“에이레 문제나 식민지를 두고 경쟁하던 두 나라가 힘을 합칠 정도면, 그것은 우리 임페리움이 그만큼 위협적으로 성장했다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장군 하나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그렇게 말한다. 황제는 장군의 그 말을 뻔한 아첨 취급하진 않은 것 같았다.

“장군의 말도 옳소. 허나 적이 ‘연합해서 대처해야 할 정도의 위협’이 된 나라는 갈림길에 서오.”

그대로 적의 견제를 당하다 분쇄될 것인가.

아니면 연합한 적마저 물리치고 압도적 강국으로 설 것인가.

“마자르의 합스부르크를 자제시키고는 있으나 그들의 억누를 수 없는 야심, 그로 인한 작은 사고 하나가 적을 도발해 전쟁의 막을 열지도 모르오.”

마자르뿐이랴.

그 북쪽으로는 프로이센이 게르마니아의 패권을 노리며 침을 흘리고 있다.

반대편에서는 신성 제국이 한 번쯤 그 왕국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으려 하고.

브리튼은 아프리카에 남은 독립 국가들로 식민지를 확대하려 한다.

“우리가 이슬람의 본산을 불태웠다고 해서 안심해선 안 되오. 2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임페리움에는 멸망의 위기가 수도 없이 닥쳤소. 매번 그것을 극복해냈지만, 다음에도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소. 그러니 장군들은 새로운 시대의 위기에 맞는 새로운 발상으로 국가 방위 전략을 수립해야 하오.”

벨리사리우스의 말은 제국의 안위를 염려해 전쟁에 대비하자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반대다.

그는 전쟁이 필요하다.

더 많은 죽음이 필요하다.

그 결과 얻게 될…… 인류 진화의 촉진에 이르기에 충분한 죽음이.

정확히 말하자면 영혼기관을 제외한 나머지 육신의 죽음이라고 해야겠지만, 어차피 대량의 죽음이 만들어낼 자료라면 그 양은 충분할 테니 질은 상관없다.

흔히 공산주의자들이 국가와 사회를 두고 장대한 실험을 벌인다고들 하지만, 그건 벨리사리우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인류를 두고 장대한 실험을 벌이고자 했다.

***

루우는 걷었던 옷을 내렸다.

두어 번 손바닥으로 두드려 단정히 했다.

“이게 온몸에 퍼져나가면 어떻게 될지, 지금은 짐작만 할 뿐이야.”

환상 속에서 보았던, 피투성이가 된 자신.

머리에는 아예 뿔까지 돋아나 인간의 형태를 잃어가고 있었다.

파멸인처럼 아예 형상 자체가 뭉개진 건 아니지만, 확실히 그것은 짐승, 신종에 가까운 용모였지.

“그러고 나면 아주 오래 장수할까, 아니면 곧 죽어버릴까. 그것도 아니라면 평균적인 인간만큼 살다 가게 될까.”

그러나 수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나는 그때 의식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의식을 유지한다 해도 그게 ‘사람’의 의식이기는 할까?”

사람처럼 사고할 수 있을까. 아니면 도저히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괴물이 될까.

루우는 견하의 눈을 본다.

견하의 동공이 흔들린다.

그것은 아마도 감정의 동요…… 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기계의 오작동, 계산의 오류에 더 가깝겠지.

이 ‘유사 가족’을 향한 애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내 몸에서 얻어낸 자료를 바탕으로, 견하의 인간성을 조금이라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견하는 한참 침묵했다. 루우는 그 침묵 앞에 인내했다.

그러다 마침내, 견하가 입을 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뭐지?”

안도하기에도 이르고, 실망하기에도 이른 그의 말.

“기다려줘. 그리고, 타이시의 마지막 말을 잊지 말아줘.”

타이시, 태사, 미리안, 누나가…… 뭐라고 했더라.

사람으로 살아달라고 했었지.

사람으로 살라…… 그게 무슨 의미일까.

자신은 지금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은 걸까. 루우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걸까.

견하는 정확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끄덕였다.

***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자.

리안은 구하지 못했지만, 견하는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견하가 확립한 독재체제는 많은 것들을 무너뜨리고, 또 다이온의 여러 부분을 왜곡하겠지만, 동시에 다이온의 행정이 드넓은 대지 곳곳에 세밀하게 신경망을 뻗을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총동원령은 충분한 인력과 자원을 황실의 품에 안겨주겠지.

탐색하고 탐색하자.

탐색한 것들을 끼워 맞추자.

선조들이 감춰둔 비밀을 파헤치고, 선조들이 도달하지 못한 비밀에 도달하자.

그리하여…… 세상을, 구하자.

그가 살아갈, 세상을.

***

주견하는 태사의 자리에 올랐다.

이제는 완전히 견하를 위한 만장일치 기관이 된 연방의회와 각료회의가 추천하고, 신황이 승인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태사가 된 견하가 보인 첫 행보는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개헌.

헌법을 바꾸는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새 헌법은 이렇게 시작해야 한다. ‘신황 폐하의 전제 황권은 무한하시다’. 이를 바탕으로 개헌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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