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21화 (521/541)

신황(4)

리안의 육체는 붉은 공간 속에서 소멸해버렸기에, 장례식은 그녀의 시신 없이 치러진다.

1937년 가을의 중턱에 비가 내린다.

검은 우산들이 순국선열묘역, 항전열사릉 앞에 모였다.

수도를 카라코룸으로 옮겼기에 다이온의 ‘항전열사릉’은 카라코룸 인근에 새로 조성되었다.

조성 계획 자체는 다이온 연방이 성립할 무렵부터 있었지만, 이것이 두 번째 세계대전의 희생자를 위한 무덤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이 무덤에 제일 먼저 안치되는 사람이 미리안이 될 거라는 것 역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고.

신황은 우산을 거부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군모의 챙과 코트를 적시는 빗방울은 차디차다. 그러나 신황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나아가 해야 할 장례 절차를 완수한다.

바로 그 곁을 똑같이, 전쟁성 장관이 걷는다. 약간 뒤에서 따르는 것도 아니다. 전쟁성 장관은 신황 폐하와 거의 대등하게 이 장례에 참여 중이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수군거리기를 참지 못한다.

“……이제는 폐하의 연인이라도 되어 보려는 건가?”

“지독하군, 지독해. 연인의 장례식에서 새 연인 자리 과시라니…….”

비교적 관대했던 미리안 시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미승휴 시대의 삼엄함을 잊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이미 숙청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갔으니, 자기네가 이 정도 떠드는 건 별 탈 없으리라고 안심하는 걸까.

조금이라도 더 조심스러운 자, 주견하가 어떤 인간인지 아는 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예상대로 입을 함부로 놀린 자들은 일가족을 포함해 쥐도 새도 모르게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 없는 말을 수군거리는 바람에 사라진 인간들도, 나름대로 유용한 구석은 있었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단서를 남겨준 것이다.

“그놈들은 생각 없이 시기심을 드러낸 게야.”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분석한다.

“가문도 뭣도 없는 고아 소년이, 고작 몇 년 만에 권력의 최상층부에 도달하니 아니꼬웠던 게지.”

“하지만 주 장관이 기존 상류층에 녹아들려는 사람이 아니라 여차하면 모조리 때려 부술 사람이었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지. 뭐 어쩌겠나. 어리석음의 대가는 자신과 가족의 목숨으로 치르게 되는 것을…….”

본래 신황을 그렇게 친구처럼, 바로 곁에서 수행한 자는 미리안 태사였다.

미리안 태사가 하던 역할을, 이제 전쟁성 장관 주견하가 한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자는 없다.

주견하는 곧 태사가 된다.

약간의 시간과 적절한 계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

게다가,

“질투가 섞인 시선이긴 하지만 진실을 담고 있을지도 모르네.”

“신황 폐하와 전쟁성 장관은 호사가들이 떠드는 것처럼 연인 사이는 아니겠지. 하지만 폐하께서 전쟁성 장관을 부군(夫君)으로 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사랑하는 연인의 장례식이 이제 막 끝났는데……”

주견하에게 계집 하나 잘 꼬셔서 출세한 놈, 미리안에게 정분난 사내에게 요직을 내준 여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대편에서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미리안과 주견하, 두 연인 사이를 연애 영화나 소설처럼 지켜보았다. 흥미도 있었고 그 사랑을 자기 일처럼 두근거리거나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나라도, 황실도 위기에 처한 이때, 권력의 집중과 강화가 필요하다는 건 그들도 머리로는 안다. 그러나 그토록 사랑했는데, 그 사랑 앞에서……?

순진한 질문은 차가운 답변만을 받는다.

“권력 앞에서 그런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

삼두(三頭).

어전에 모인 신황 루우와 전쟁성 장관 주견하, 극북방면군 사령관 최효윤을 최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모임이 어떤 것인지 들여다보지 못하는 바깥사람들의 이야기였고, 실제로 세 사람의 관계는 권력으로 얽혀 있다기보다는 가족에 더 가까웠다.

그렇다면 이 모임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태사 미리안의 유족이라고.

유족은 각자의 상처를 추스르기도 했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된 두 사람은 견하의 기색을 살폈다.

-미리안의 존재는 그 자체로 주견하의 버팀목이었다.

그 사실은 루우도 효윤도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상증세. 지나치게 비대해진 지능과 잔인성.

어딘가 인간에서 벗어난 듯한 면모.

폭풍처럼 카라코룸 정계를 몰아쳐 류성일과 안세규를 죽인 이후로는, 그간 미리안이 간신히 억제해왔던 것들이 터져 나오는 느낌이다.

무제한적 잔인성.

무제한적 교활함.

무제한적 추진력.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그 어떤 도덕 윤리에 따른 망설임도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루우나 효윤과 이야기하며 때론 슬퍼하고, 또 때로는 기운은 없을지라도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분위기를 풀고는 있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감정 표현에는 ‘감정’이 들어 있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에 입력되어 있던 여러 감정 표현을 해당하는 상황에 맞춰 꺼내 쓰는 느낌.

걱정이 되긴 하지만, 어떻게 손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루우도 효윤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가족을 더 잃을 순 없다.

아니, 견하도 가족을 지키려는…… 잃은 가족의 유산을 지키려고 몸부림치고 있을 뿐인 것 아닐까.

우리는 어떻게 그가 어깨에 짊어진 짐을 덜어줄 수 있을까.

“주르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루우였다.

“이름은 ‘주르반’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멕시카의 ‘시공간’ 기술에 대항하느라 붙은 이름이지 실상은 좀 달라.”

“……루우에 대한 개인숭배, 라면서?”

이번에는 효윤이 질문을 던졌다. 그녀가 이끄는 부대에도 공문이 내려와, 관련 시설을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신황 루우를 경배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고 있다.

대원수에서 이등병에 이르기까지, 황국의 모든 군인이 신황에 대한 충성을 다짐한다.

신황을 위해 죽을 것을 다짐한다.

“효과가 있겠어?”

이제는 황국의 북방을 지키는 군인으로서, 효윤은 물었다.

“적의 시공간 도약을 막는 효과는 있을 거라고 예상되지만, 설령 효과가 미미하더라도 다른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으니 손해는 아니야.”

“총력전…… 이라고 했지.”

루우는 그 단어를 입에서 한 번 굴려본다.

신황을 위해, 신황의 국가, 황국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함이 당연하다는 식의 정신 무장.

기꺼이 노동력이든 목숨이든 재산이든 모든 걸 내놓아 황국의 ‘전쟁 수행’이 극한까지 가동되도록 하는 힘.

이건, 미리안이 구상한 것과 다르지 않나.

연방을 황국화하고, 전통과 개혁이 조화를 이루는 제국의 이상을 저버린다면, 그건 미리안의 유산을 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거기까지 생각하기엔 그들의 증오가 너무 깊었다. 너무 지치기도 했다.

돌아보고 후회라도 할 수 있으려면, 일단 복수가 완수되어야 한다.

“복수는 허망한 것이라는 말은 책상 밖으로 걸어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떠드는 말에 불과해.”

낮게 뇌까리는 견하의 목소리.

오랜만에 듣는, 지금 견하의 진심을 담은 목소리일 것이다.

“복수를 완수하기 전까진 다른 건 생각할 수 없어.”

효윤은 생각한다. 복수의 허망함이라는 건 아마도 복수가 완수된 뒤에 찾아오는 마음의 평화가 아닐까, 하고.

그녀는 견하의 말에 동의했다. 그녀 역시 멕시카를 멸망시키는 것 말고 다른 건 생각할 수 없었다.

“명령만 기다릴게, 대원수 각하.”

눈앞에서 두 사람이 합의를 보자 신황이라고 해도 별수 없었다.

끄덕이는 수밖에.

견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루우를 향해 말했다.

“폐하께선 ‘적을 주멸하라’라는 내용의 조칙을 준비해줘.”

나라를 지키라는 에두른 표현도 아니다. 적을 죽여라.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라. 그런 직접적인 명령을 내린다.

자기 말이 또 어떤 살육의 광풍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을까…… 그런 씁쓸함을 느끼면서 루우는 대답했다.

“……알겠어.”

***

어느 한족의 마을 한가운데에는 이상한 시설물이 세워졌다.

원래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축제 같은 걸 하던 공터라 따로 뭘 철거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 높다란 건물…… 아니, 기괴한 시설은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꺼림칙한 기분을 밀어 넣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탑 같기도 하고 기둥 같기도 한 그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게 완성된 날 다이온의 관리가 와서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외쳤다.

“신황 폐하께서는 스스로 황국의 원수(元帥)가 되시어 국가 방어의 의무를 다하고 계신다. 어찌 신민들이 따르지 않으랴!”

그들은 늘 강조한다.

고려인들과 몽골인들의 자비에 감사하라고.

먼저 전쟁을 일으킨 그들을 이렇게 살아가도록 허락해주고, 반란을 일으켰는데도 살려주었다고. 얼마나 큰 자비냐고.

또 얼마 전부터 학교에선 그들이 한인(漢人)이 아니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키타이…… 민족이라던가?

저 남쪽에서는 ‘낭키아스 민족’이라고 한다고 들었다.

어느 날은 마을 청년들이 두 패거리로 나뉘어 크게 싸웠다. 논쟁이 주먹다짐이 될 정도로.

“키타이니 낭키아스니, 다 야만족의 개수작이야! 한, 당, 송, 명…… 우리는 한이 빚어낸 하나의 민족이라는 자긍심이 있어! 그걸 버리겠다고? 이딴 게 어떻게 교과서야!”

“현실을 받아들여야지! 그래, 첫 번째 실패라면 나도 굴하지 않겠어. 그런데 두 번째 실패라면? 세 번째 실패가 따라올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게다가 우리의 독립에 무슨 명분이 있어!”

“명문이 없다니? 명분이 없다니! 민족이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국가를 갖겠다는 것만큼 절대적인 명분이 어디 있나!”

“사방팔방에 전쟁이나 일으켜대다가 꼴사납게 멸망한 민족에게 국가는 무슨! 주제를 알아야지!”

“너는 한족 아니야? 넌 한족 아니냐고!”

“나는 이런 버러지 같은 태생은 부끄러워서 내던질 거야. 나는 다이온 연방 구성 민족, 키타이인이다!”

논쟁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서로 핏대만 세워대다가 주먹이 오갔다. 죽은 사람이 나오지 않은 게 다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격렬한 갈등은 다이온의 관리가 찾아오면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기세를 잃어버렸다.

민족 자긍심이니 독립이니 떠들던 청년들은 풀이 죽은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녔고, 반대로 친원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거들먹거리는 태도가 엿보였다.

다이온에 대한 반발심이 다시 독립 열망으로 치솟기엔, 지난 한족 대봉기의 실패가 너무도 뼈아팠으니까.

어쨌든 다이온 관리의 명령에 사람들이 모였다.

뜻도 모를 고려어를 읊으라며 종이 쪼가리를 나눠준다.

“지금은 해석이 달려 있지만, 나중에는 모른다는 소리가 나와선 안 된다! 모두가 학교에서 고려어를 정확히 익혀 황국의 충실한 일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고려어 선생, 또는 몽골어 선생이 제대로 말을 못 하는 학생 하나를 ‘반역의 씨앗’이라며 두들겨 팼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부모가 학교에 항의했다든가 선생이 잘렸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누군가는 반감을 담아 겨우, 또 누군가는 자신의 충성심을 이번 기회에 관리에게 잘 보이겠다며, 다이온 연방의 국기를 뜨겁게 바라보며 읊는다.

한참 읊어대다가 사람들은 보았다.

마을 가운데 그 기괴한 건축물이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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