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19화 (519/541)

신황(2)

“황제라는 칭호도 생각해보면 원래 한족의 것 아닙니까? 물론 태조 황제 이래 폐하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사용해 온 황제 칭호입니다만, 우리가 삼황과 오제를 섬긴 전통이 있는 것도 아니니, 다이온 신체제에 걸맞은 새로운 칭호를 고안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내무장관 나제홍이 그렇게 한마디 거든다.

이번에 주견하가 직접 배치한 장관들은 나제홍의 그 재빠름에 다소 질투를 느끼고, 주견하가 따로 교체하지 않은 나머지 장관들도 약간의 경멸을 느낀다.

견하는 나제홍 쪽으로 약간 고개를 돌리며 끄덕였다.

“‘태왕 고려’ 시기의 칭호인 ‘태왕’ 역시 제안에 올라왔지만, 이건 ‘왕’의 어감 자체가 ‘황’보다는 아래에 있다는 인식이 있어 기각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몽골 및 여러 민족과 공유할 칭호로서도 적절치 않다는 점이 ‘태왕’을 고를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견하는 재연이 고안한 ‘태왕 고려’라는 말로 광개토왕 이후 고구려 왕조를 부르고 있었다. 고려의 역사적 연속성을 강조한다며 교육 정책에 도입한 지 얼마 안 된 용어였지만, 견하는 유용하게 써먹었다.

‘태왕 고려’라는 용어에 대한 안내는 따로 없었다. 이제 그런 것들은 견하가 각료들에게 배려해야 할 것들이 아니라, 각료들이 알아서 먼저 배워 와야 할 것들이었다.

주견하의 말만 들어보면 그럴싸한 의견 교환과, 그럴싸한 근거 제시가 이루어진 것만 같다.

제안, 기각 등의 용어가 주견하의 입에서 나오고는 있지만, 누구도 주견하에게 제안하지 않았고 여기 각료들이 모르는 의사 결정 과정이 있어 ‘기각’의 절차를 밟지도 않았다. 주견하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모를까.

이 각료 회의는 그저 기록에 남기고, 국민들에게 “마구잡이로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변명하기 위한 과정이다.

훗날 누군가가 이 각료 회의의 의사록을 본다면, 주견하 정권이 나름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돌아갔다고 착각하겠지.

전문가의 안목으로, 비판적으로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이 안에 ‘합리성’ 따위는 전혀 없다는 걸 눈치채지 못 하리라.

이해할 수 없는 ‘주견하의 필요’로 결정된 사항들. 물론 이 뒤에는 따로 주견하의 측근들…… 이를테면 사상국장 한재연 등이 관여했을 거라고 짐작은 되지만, 그걸 문제 삼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설령 그들이 한때 천손민족협회에 몸담았던 자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신하가 멋대로 군주의 칭호를 결정한다고 해서 논쟁거리로 삼을 사람 역시 이젠 없었다.

누구의 반대도 없이, 각료 회의는 황제이자 카간인 루우의 칭호를 ‘신황’으로 통일하고, 새로운 군 계급 ‘황국원수’를 스스로 부여하게끔 한다는 안을 통과시켰다.

***

“‘황국’이라는 말, 요즘 자주 들리지 않소.”

오랜만에 최고사령부로 불려 온 우흥섭과 장해진 두 대장은, 회의장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잠깐 응접실에서 대화를 나눴다.

한족 관리 특구의 사령관에서 물러났던 그들은 최근 일본공화국 전선, 멕시카군의 가마쿠라 교두보 확대를 저지하는 전투를 치렀다.

우흥섭이 멕시카군의 서쪽 진격을, 장해진이 동북쪽 진격을 지연전을 펼치며 저지했다.

멕시카군이 괴상한 기술에만 의존하는 그런 군대가 아니라, 내전을 통해 얼마나 정예로 거듭났는지 느낄 수 있던 전투였다.

악몽 같은 공세였다.

다이온 측에는 증원군까지 왔다고는 해도 주축은 일본의 수도를 단숨에 뒤엎는 데 쓴 부대들이었다. 그런 부대 중에서 치안유지, 각 지역 방어 및 감시에 필요한 부대를 떼어놓고 나머지 병력만으로 막아내야 했다.

전선의 병사들도 잠을 못 잤겠지만, 계속해서 보고를 받고 수정된 작전도를 들여다보며 어떻게 하면 막아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까 고민한 두 장군도 잠을 못 잤다.

그 결과로 다이온과 일본공화국의 연합군은 간토 지방 대부분을 포기하는 선에서 저지선을 마련했다.

상당히 밀려나긴 했지만 장해진도 우흥섭도, 일단은 전선을 소강상태로 만드는 데에는 성공한 것이다.

이번 카라코룸 최고사령부 출두는 그런 두 사람에게 주어진 일종의 ‘휴가’라고도 할 수 있었다.

우흥섭이 먼저 꺼낸 이야기에 장해진은 한동안 답이 없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연방이니 황국이니, 그저 꾸미는 말 아니오.”

장해진은 우흥섭이 꺼낸 화제를 길게 이어 나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대장쯤 되면 정치 이야기와 아예 멀어지긴 힘들다. 군사 작전은 결국 정치가가 주문한 결과를 생산해내는 과정이다. 정치가는 국민의 열망을 읽고 그런 주문을 하는 거고.

쿠에츠팔린이 미친 게 아니다. 멕시카인들이 전쟁을 원하기에 지금 같은 결과가 나온 거다.

벨리사리우스가 미친 게 아니다. 로마인들이 아라비아 정복에 얼마나 열광하던가.

장성들도 바로 여기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아야, 전역하고 정계에 입문하든지 아니면 원수까지 진급을 노려보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김천열이가 우릴 제치고 먼저 원수가 된 건 아첨꾼이어서도 아니고 탁월한 전략가여서도 아니오. 쓸데없이 입을 열지 않아서지.”

피곤한 눈두덩을 쓸며 장해진은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도 괜히 진급에서 밀렸네 어쨌네 하지 않았으니 살아남은 거고.”

우흥섭은 경고와도 같은 장해진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내전을 전후해 벌어진 숙군처럼 군에 대한 숙청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강태훈과 조유관이 옷을 벗었듯이 우흥섭과 장해진도 강제 전역을 당할 가능성은 아직 남아있었다.

물론 강태훈과 조유관은 그들 자리에 주견하와 그 측근이 앉아야 한다는 이유가 더 컸지만.

우흥섭은 장해진의 말대로 입을 조심하기로 한다.

지금은 지휘관 자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그저 입을 다물고, 누가 높이높이 올라가는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도록 하자.

***

‘황국’이라는 이름이 화제가 된 건 두 장군 사이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황제 폐하, 혹은 카간 폐하라 불리던 분을 오늘부터는 ‘신황 폐하’로 불러야 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이며 라디오며 다이온을 칭할 때 ‘황국’이라는 표현이 갑자기 늘었다.

정식 국호는 어디까지나 ‘다이온 연방’이건만.

특히 고려 지역에서는 다이온을 고려식으로 대원(大元)이라 부르면서 ‘대원황국’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아예 없었던 말은 아니지.”

한재연이 먼저 그렇게 입을 열었다.

정치감독청의 네 국장이 모인 자리. 신설된 경찰국의 국장은 경력으로는 꽤 오래된 중년 사내였지만, ‘감히’ 네 사람의 이 모임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친위국장 원동인 조차 이런 자리에 불려 오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다이온 연방’을 출범시킬 당시부터 ‘대원황국’이라는 표현은 있었거든.”

“네가 「계획」에 끼워 넣은 건 아니고?”

유지나의 물음에 한재연은 알듯 모를듯한 웃음만 지었다.

“황(皇)이라는 글자는 왕(王)위에 하얗다(白)는 의미를 더한 글자지. 온 세상 왕들보다 더욱 고귀한 순백의 왕. ‘왕중왕’이라는 표현 대신 이렇게 한 글자로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다니, 한족의 이런 발상은 칭찬해줘야 한다니까.”

전부터 들어왔던 이야기다. 황제, 두 글자 중 굳이 ‘황’을 고른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겠지.

“하지만 지금 왜, 신황이니 황국이니 하는 용어 교체를 하겠다는 거지?”

“황제…… 아니, 신황 숭배와 황국관은 ‘총력전’을 위해서 필요한 거야.”

한재연은 톡톡, 자기 관자놀이를 검지로 두드렸다.

“정신을 아무리 단련한다 해도 총칼을 막진 못해. 하지만 맞아서 죽어가는 중에도 한 번 더 ‘발악’할 수 있게 하지.”

“군인들 정신 무장을 시키겠다는 말이야?”

“군인뿐만이 아니야. 사회 전체, 기업가부터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대원황국을 구성하는 모든 인간의 정신을 신황 폐하께로 모은다.”

기업가는 이윤이니 시장이니 따위의 발상이 아니라 전쟁의 최종적 승리를 위한 경영 사고를 한다.

노동자는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의 범위를 ‘신황을 가장으로 한 국가 전체’로 확장한다.

유지나와 한재연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방첩국장 이익서도 질문을 던졌다.

“……사상국장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리라고 보나?”

“어디까지나 사상국을 총괄하는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야. 다이온과 멕시카 사이에는 태평양이라는 대양이 있어. 공간을 도약해보겠답시고 퍼붓던 적의 공격은 좌절당했지. 결국은 일본열도에서 기존 방식대로의 전쟁이 이어지고 있잖아? 이 전쟁, 금방 끝나진 않을 거야.”

“오래 걸린다면,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의 싸움이겠군.”

“멕시카에 돌아가신 태사 합하와 우리 각하께서 가한 반격…… 분명 아즈텍 대륙엔 심한 타격을 입혔을 거야. 하지만 전선의 적들에게선 동요가 보이지 않아.”

익서는 끄덕였다. 방첩국에 수집된 정보로는 확실히 그랬다.

“원래 전쟁이라는 게 뻔뻔한 개수작이 오간다고는 하지만, 아마 저 멕시카 군인들은 자기네가 먼저 공격한 건 생각도 안 하고 우리의 ‘테러’로 고향이 공격당했다고 여기겠지. 그놈들 우두머리인 쿠에츠팔린이 강요한 전쟁이다, 이런 사실을 떠올린 인간도 몇 안 될 거야.”

그게 멕시카 군인을 전쟁에 집중시키는 힘이라고, 한재연은 생각했다.

“우리도 그에 버금가는 힘이 필요해.”

다른 세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친위국장 원동인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의 눈이 빛났다. 그 빛을 나머지 세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다.

***

“황국원수……?”

폐하께서 직접 당신께 부여하셨다는 생소한 계급.

우흥섭과 장해진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마주 봤다가, 다시 김천열을 본다. 김천열은 난감한 얼굴로 두 선배의 시선을 피했다.

상석에 앉은 전쟁성 장관 주견하의 제복에는 대원수 계급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기가 대원수가 되려고 폐하를 높였구나……!

최고사령부에 모인 장성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어느 정도는 맞았다. 황국원수 계급은 지금 이 시각 한재연이 동료 국장들에게 말하는 ‘총력전을 위한 정신 무장’에도 필요했지만, 견하가 대원수로 진급하는 데에도 필요했다.

-어떻게 보면 약간 변칙적이군. 당장 태사가 되진 않겠다는 건가.

대원수 계급과 태사는 미승휴가 태사가 된 이래 당연히 겸해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요컨대 주견하가 대원수로 진급했다는 말은 그 역시 태사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말이다.

-전쟁성 장관은…… 거쳐 가는 자리겠지.

그렇다면 다음 장관은 누가 될까?

군인이라면 누구나 침을 삼키게 된다.

“일본열도에서 멕시카군을 바다로 밀어내는 것만큼 시급한 과제는 없다.”

주견하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다들 집중한다. 집중이 안 되도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추크치에서 알래스카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것과는 별개로, 일본 전선에 추가 전력을 투입하도록 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