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황(1)
류성일과 안세규, 시반, 데렘칭과 차파르, 구종환 등 체포된 주요 인사 대부분이 쓰레기장에 버려지고 나서야, 견하는 황궁으로 돌아왔다.
남은 가족이 기다리는 곳으로.
효윤과 루우는 어전에 들어선 견하를 보고서야, 직접 처형 ‘작업’을 하느라 피범벅이 된 그 모습을 보고서야 울음을 터트렸다.
견하를 부둥켜안는다.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적들의 피가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들은 견하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견하도 천천히 손을 들어, 두 사람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세 사람은 끌어안은 팔들을 풀지 않았다.
***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
다이온 연방 전역을 계엄령이 뒤덮었다.
죽은 사람들은 신수덕 및 알타이 자유 공화국과 손잡고 연방 및 황제 체제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발표되었다.
반쯤은 진실이고, 반쯤은 누명인 혐의.
신수덕과 손잡은 쪽은 오히려 주견하였음에도, 안세규가 알타이 자유 공화국과 내통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누명은 효과적으로 덮어씌워졌다.
그 안세규에 이리저리 엮어서 모조리 반역자로 몰아 잡아넣었다.
전쟁성 장관 강태훈과 외무성 장관 조유관은 급히 견하를 찾아와 무릎 꿇었다.
“주 청장, 살려주게, 아니 각하, 살려주십시오……!”
실제로 그들이 무엇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황제의 승인 아래 모든 것이 끝난 지금의 정국에서, 살고 죽고는 주견하에게 복종 의사를 드러냈는가 아닌가다.
향후 주견하와 경쟁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도 중요했다.
어쨌든 덕분에 조유관은 안세규의 명령을 받고 몰래 범 알타이 인민동맹을 지원했던, 서부군 사령관 시절의 죄를 불문에 부치는 자비를 얻었다. 대신 그는 외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나 가택연금 신세가 되었다.
강태훈의 경우에는 자유를 구속당하진 않았지만, 그 역시 전쟁장관 자리에서는 물러나야 했다.
그렇게 빈 전쟁성 장관 자리에 주견하가 취임했다. 물론 정치감독청장 자리는 내려놓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시대를 읽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주견하의 전쟁성 장관 취임은 그저 태사로의 한 걸음을 위한 준비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
나제홍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은퇴 후 연금 생활이 경력의 끝인 줄 알았는데…….”
고태용이 몽골에서 그렇게 죽고, 구종환은 시체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정보사에서 함께하던 지인들의 비참한 최후에도 한숨 몇 번으로 속을 달랠 수 있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증오나 원망, 슬픔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약간의 이기심. 어쨌든 여생을 무사안일하게 보내는 것이 목표인 나제홍의 소인배 근성.
그리고 부르면 부르는 대로 튀어오는 순종적인 성품.
이 모든 것이 카라코룸을 뒤흔든 정국 변동에도 불구하고 그를 살아있게 했다.
“내무성 장관 취임이라니.”
정치감독청의 전신, 정치경찰실의 실장이었던 시절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은 ‘징검다리’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주견하의 어떤 계획을 ‘부드럽게 진행하기 위한’ 도구 역할이 맡겨지리라고, 나제홍은 짐작했다.
그의 추측은 정확했다.
“내무성에서 지휘하는 경찰 병력을 모두 정치감독청 산하 조직으로 옮길 겁니다.”
내무성의 일반 경찰.
태사부의 정치감독청이 지휘하는 정치경찰.
고려 제3제국의 경찰 체제는 이렇게 이원적이었다.
이 이원 구조를 모조리 주견하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바꾸겠다는 말이었다.
주견하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동료 장관에게 정중하게 부탁했지만, 실상 이것은 명령이다.
토 달지 말고 수행해야 할 명령.
“……알겠소.”
이미 방첩국은 제국정보사령부를 흡수해서 다이온 연방의 정보를 완전히 독점해 버렸다.
일반 경찰도 분해해서 감찰국, 사상국, 친위국에 이은 경찰국으로 넣어버리면, 주견하는 국내외 정보 및 국내 치안, 지금 발동 중인 계엄령까지 모조리 통제하는 인간이 된다.
가장 혹독할 때의 미승휴도 이 정도 권력을 행사하진 않았다.
“하지만 ‘합법’의 형태를 취하려면 내가 순서를 기다려야 하지 않겠소.”
반발처럼 들리지 않도록, 나제홍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어디까지나 당신의 명령을 신중하게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라는 표정을 지으며.
주견하는 끄덕인다.
“바로 조치를 취하죠.”
***
“……사상 초유의 반역 음모 사태로 인하여, 현 의회의 기능을 일시 정지한다.”
황제의 칙령, ‘내각’의 결정.
그것이 얼마나 헌법에 부합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약간의 반발이 있긴 했지만, 전쟁 중이라는 명분은 어찌나 편리하던지.
점차 현실로 다가오는 주견하의 독재체제에 반대할 학생들은, 바로 직전 동원령의 확대로 군에 징집되었다.
징병 대상이 아닌 학생들이 남아있긴 했지만, 구심점이 되어 줄 정치인들이 모조리 잡혀들어간 상황이니 오합지졸이다.
‘신진’만 남은 제국입헌당 의원들의 기립 박수로 이와 같은 결정이 통과되었다.
그러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냥 ‘절차를 밟아나간다는 듯’ 다음 결정이 내려진다.
“총선거를 무기한 연기한다.”
역시 전쟁 중이라는 변명이 덧붙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리라는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음울한 결정들은 계속 내려왔다.
마치 이제 막을 자가 없음을 과시하듯.
“연방 의회를 양원제에서 단원제로 바꾸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연방 의회는 황실과 행정부의 ‘자문 역할’을 맡는다. 연방 의회 의원은 선거로 뽑히지 아니하고 황제 폐하와 내각의 지명을 받는다.”
의장도 아니고 태사도 아닌, 정치감독청장에 전쟁성 장관을 겸했을 뿐인 주견하가 마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의회에 나타나 선언한다.
“반대 의견 있습니까?”
형식뿐인 예의.
하지만 의원 전원이 일어나 박수 친다.
황제 폐하의 뜻이야 사실상 주견하가 빌려오는 것이고, ‘내각’ 역시 전쟁성 장관 주견하가 주도하는 것이니까.
그의 눈에 들어야 계속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고, 눈 밖에 나면 목숨마저 위험하다.
통과.
기립 박수, 만장일치.
통과.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된다.
각국 대사관은 태사 미리안의 전사와 뒤이은 정국 혼란으로 다이온의 민주주의가 빠르게 붕괴하고 있다는 소식을 자국에 전했지만, 다른 나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들 역시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의 불가피성을 언급한다.
지금 고려, 다이온을 비판하는 것은 멕시카의 편을 드는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자유세계’는 다시 한번 씁쓸함을 삼키며, 오래전 미승휴 시대로 돌아가는 고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나제홍을 불러서 내무장관에 앉히고 경찰 조직을 개편하는 일을 맡겼다.
의회를 완전히 자기 개인 자문 기구로 만드는 일도 거의 완성되어 간다.
여기까지 마무리하고 나서, 견하는 거의 쉴 틈도 없이 다시 어전으로 나아갔다.
“폐하께 군 통수권을 돌려드려야 한다는 데 대해 신은 이견은 없으나, 대원수 계급은 신하인 태사의 것. 신하의 자리를 군주가 물려받는 것은 격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짐은 역시 연방을 지키는 군인의 역할을 다하고 싶다. 방법이 있겠는가?”
“대원수 위의 계급, 황국원수를 신설하여 폐하께서 직접 칭하심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루우는 곧바로 견하의 상주를 승인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물린 후, 어좌 아래, 견하와 대등하게 서는 자리로 내려왔다.
“무슨 생각이야?”
“생각이라니……?”
“대원수 계급, 태사가 남겨준 자리니까, 네가 유품으로 갖고 싶은 거라면 나는 얼마든지 내주고 그냥 물러날 수 있어. 굳이 ‘황국원수’니 뭐니, 거창한 걸 만드는 이유가…… 뭐야?”
처음에는 미리안을 잃은 슬픔,
미리안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분노가 그를 폭주케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행보는 너무하지 않은가.
물론 루우 역시 입헌군주제의 황제로 군림한 건 자신을 황제가 되게끔 한 세력 간 균형을 조율하기에 최적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균형이 깨진다면, 그 세력들이 균형을 유지할 의사가 없다면 루우도 한발 물러난 군주권에 동의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주견하의 행동은 권력의 강화를 넘어섰다.
이것은 권력 강화가 아니다. 주견하가 하는 행동이 결과적으로 ‘권력 강화’라는 현상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행동의 끝에는 다른 게 있다.
“견하 너, 체제를 개조할 거야?”
루우의 눈은 대답을 재촉하면서 계속 견하의 눈을 살폈다.
뭔가를 찾아 헤매듯이.
견하는 정말 오랜만에 가볍게 웃었다.
“할 수밖에 없어.”
루우는 견하의 미소에 안도하면서도, 그의 말에 든 내용을 놓치지 않았다.
“왜?”
“복수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루우의 생각이 잠시 견하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따라잡지 못해 느려졌다.
복수…… 는, 그래. 견하의 개인적인 원한만이 아니었지.
태사를 죽게 하고 장병들, 국민들을 죽게 한 적, 멕시카가 있다.
“복수의 칼날을 들이밀려면 전쟁에서 이겨야 하고, 이기려면 단순히 동원령 확대만으로는 부족해.”
“그러면?”
“황국의 모든 것을 동원해야지. 총력전이야.”
***
감정을, 흉내 내고 있는 것 같다.
***
“고려 태조 신성황제의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신(神)’은 우리나라 군주의 특징으로 강조되어 왔습니다. 몽골 태조 성무황제 칭기스 카간의 시호를 보면 고려 태조와 ‘성(聖)’을 공유하며, 성은 곧 신과 통합니다.”
긴 서두다.
역사를 잘 모른다면 지루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
그러나 견하는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말 한마디 한마디를 힘주어 말했고, 듣는 이들도 감히 지루한 기색을 보이는 이가 없었다.
중요한 이야기긴 했다.
“폐하께선 몽골 지역에선 카간으로 불리시고, 고려 지역에선 황제로 불리십니다. 이것은 의미가 같은 단어가 말이 다른 두 지역에서 보이는 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쿠빌라이 카간께서 ‘다이온’을 ‘예케 몽골’의 국호에 더하신 뒤에 한족에게 익숙한 칭호로 ‘황제’를 함께 쓰신 일도 있죠.”
하지만, 이라며 견하는 각료들을 훑어보았다.
내무성 장관 나제홍은 형식적으로만 내각의 필두일 뿐, 주견하의 말에 단 한마디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철도성 장관 임병욱은 견하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상태다.
외무성 장관으로 새로 임명된 송인섭은, 응천 행정장관 시절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자부심에 취해 있다.
“연방이라는 느슨한 체제로는 안 됩니다. 이 나라는 단일한 황국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폐하를 어버이로 여기는 하나의 집안이 되고 모든 구성원이 형제가 되어 형제를 위해 피 흘릴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적과 단호히,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 맞서야만 합니다.”
총력전. 바로 얼마 전부터 주견하의 입에서 계속 강조되는 개념이었다.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명확한데, 여기에 익숙한 방식, 저기에 익숙한 방식…… 일관성이라고는 없는 제도는 죄악입니다. 몽골과 고려는, 그리고 역외사국과 한족은 황국에 완전히 결합해야 합니다. 절대로 분리될 수 없도록, 그 어떤 좁은 틈도 남지 않도록.”
견하는 ‘제안’했다.
누구도 그 제안을 거부할 수는 없겠지만.
“이에 저는 폐하의 신성성과 절대유일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칭호로 신황(神皇)을 제안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