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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17화 (517/541)

피(4)

친위국은 이름 그대로 황제와 그 측근들의 친위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황궁의 경호는 이미 모두 친위국 인원으로 교체되었다.

정치감독청, 줄여서 정감청이라 불리는 기관에서 가장 인원이 많은 감찰국은 이 친위국의 황궁 경비 상태를 감독한다.

한편으로 인원을 나눠 ‘감찰’을 핑계로 황궁 밖, 카라코룸 특별시를 봉쇄한 군인 및 경찰들과 연계해 ‘체포’에 나선다.

체포 대상 목록에 올라온 인물들은 다양하다.

일단, 고려국민당 의원 전원.

안세규라는 머리를 베어내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머지 몸통을 구속한다.

공산당 및 사회민주당 의원 중 일부도 목록에 올라와 있다.

비상시에 안세규나 류성일에게 협력할 것으로 예상되는 인간, 류성일이 제1대학교 총장이던 시절 그의 비호를 받은 혁명가들.

일말의 위험성이라도 있다면, 아니,

“1929년 4월 1일 이전 안세규와 류성일의 행적에 대해 알 법한 인간이라면 모조리 잡아들인다.”

정감청장 주견하의 담담한 명령이 떨어진다.

사상국장 한재연은 바로 곁에서 명령을 받아 감찰국에 전달한다.

주견하는 명령을 내리고, 보고를 받으면서 계속 황궁 쪽으로 이동했다.

참의원 관저에서 황궁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일상적인’ 광경이 펼쳐지도록, 적절한 거리를 두고 최대한 은밀하게.

시반과 류성일이 황궁 안으로 진입할 바로 그 순간까지, 건물숲 사이로 몸을 숨긴 맹수처럼.

자신들을 잡아먹을 괴물의 아가리인지도 모르고 두 사람이 황궁 안으로 기어들어 간 바로 그 순간에, 주견하는 황궁 정문 앞에 나타났다.

“봉쇄한다.”

적을 몰아넣는다.

원수를 몰아넣는다.

황궁 정문은 그 누구의 동의도 없이, 자기 혼자 정치감독청장으로 ‘복귀’한 주견하의 사령부가 되었다.

“차파르와 데렘칭을 비롯한 다이온혁신당 인사 역시 체포한다. 서둘러라.”

시반보다 그 둘이 다이온혁신당의 핵심에 가깝다. 그 두 인간이 다시 지하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골칫거리가 되기 전에 잡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정감청은 일당, 제국입헌당 내에서도 주견하를 지지하는 ‘신진’들만의 일당독재를 향한 멈추지 않는 행진을 시작했다.

***

바로 얼마 전에 배영훈은 준장 진급을 명 받았다.

김천열 원수가 지휘하는 최고사령부에서 내려온 것이지만 그 배경에는 황제 폐하께서 계신다고, 그런 귀띔을 받았다.

폐하의 그런 조치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미리안 태사 합하와 함께한 이들에게 전하는 위로.

일개 대위, 중대장이었던 자신은 우연히 태사의 은혜를 입어 권력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다.

권력 핵심부에서 이런저런 잔심부름…… 아니, 잔심부름이라기엔 목숨까지 건 일들을 해나가며 여기까지 이르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돌이켜보면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말이다.

위대한 인간의 위대한 시대를, 자신 같이 보잘것없는 인간이 받쳐왔다는 자부심.

배영훈의 자부심은 미리안 밑에서 류성일이나 안세규에 대해 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들과 뒤섞여 나름대로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절대로 그자들이 미리안의 뒤를 이어서는 안 된다.

류성일이 차기 태사가 되려고 껍죽거린다는 소식, 안세규도 기회를 엿본다는 소문에 그는 분노했다.

전시가 아니었다면 당장 군인 때려치우고 낙향했을 것이다.

그때 주견하와 연락이 닿았다.

미리안을 잃은 충격으로 폐인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는 명료한 어조로 배영훈에게 명령했다.

“즉각 제국정보사령부로 가서 방첩국의 인수 과정을 돕도록.”

죽은 미리안이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주견하의 그 명료한 어조에서 배영훈은 부활을 느꼈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 미리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미리안의 과업과 정신을 잇는다.

그런 생각에 서둘러 제국정보사령부로 달려가 보니, 방첩국 직원들이 이미 와서 정리 중이다.

새삼 주견하의 치밀함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꽃으로 위장한 뱀의 머리처럼, 이미 음모를 진행해 제국정보사령부를 장악했음에도, 적을 끌어들일 미끼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주견하뿐만 아니라 그 부하들의 유능함도 큰 몫을 했겠지.

이제 제국정보사령부는 미끼로서의 쓸모도 없어졌으니 해체하고 삼켜서 방첩국의 뱃속에서 소화될 것이다. 실제 군의 편제나 법 제도와 관계없이, 주견하의 의사만으로 말이다.

물론 그 뒤에는 ‘황제 폐하의 성스러운 뜻’이 있으리라고, 배영훈은 짐작해본다.

그는 방첩국장 이익서에게 다가갔다.

“내가 뭘 도우면 되겠나.”

내전을 겪고 전역한 병사였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조심스럽게 ‘하게’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배영훈도 이제 권력의 흐름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세상은 정치감독청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준장 각하께서 통솔하실 수 있는 병력으로, 정보사령부 밖에 나가 있는 장병들 통제를 부탁드립니다.”

‘통제’라고 굉장히 온건한 투로 말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그렇지 않다는 걸 배영훈은 이해했다.

제국정보사령부에서 내린 명령 때문이든, 아니면 화를 피해 도망친 것이든 지금 이곳에 없는 인원의 소재지를 파악하라.

병력을 보내서 그자들을 일단 체포하라.

저항할 경우 죽여라.

배영훈은 이익서에게 끄덕여 보인 후 돌아서려다, 무언가에 시선이 멈췄다.

바닥에 떨어진 안경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리에는 금이 가고 금속 부분들은 비틀렸다.

배영훈은 이 안경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안세규 총재가 여기 있었나?”

“체포됐습니다.”

“측근들도?”

“뭐, 여기까지 온 수행원들은 그렇죠.”

“체포 과정에서 사상자는 없었나?”

이익서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약간의 충돌은 있었지만 일단 사망자는 없습니다.”

배영훈은 안세규를 따라다니던 ‘그림자 사내’를 떠올렸다.

피 냄새가 진동하던 남자.

살기로 몸을 감싸고 돌아다니는 통에, 배영훈도 마주할 때 죽음을 각오했던 자.

그런 자가 안세규 체포 현장에 없었다?

아니, 없었을 수도 있지.

중요한 건 그 남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이다.

안세규의 정치 생명이 끝장났다고 여기고 여기서 일단 도망쳤든, 아니면 다른 곳에 있다가 안세규의 체포 소식을 접하게 되었든…… 어떻게 행동할지는 명확하지 않은가.

파멸을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많은 적을 함께 죽음으로 끌어들이리라…… 그따위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주견하는 지금 황궁 밖을 포위하고 정국을 장악할 최종 작전을 몸소 지휘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대장 각하께서 위험하시네.”

이익서는 배영훈이 말하는 ‘대장 각하’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즉각 최소 인원만 남고 방첩국 전원이 황궁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모든 국(局), 특히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상국에서도 황궁으로 직원들을 급파했다.

***

그리고 그들 모두의 걱정은 쓸데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끄…… 어……”

무표정한 얼굴로 촉수만 뻗은 채, 주견하는 ‘그림자 사내’의 몸을 뜯어내고 있었다.

마치 벌레의 팔다리를 해체하듯.

허리를 자르듯.

간신히 힘줄이나 살점, 혈관 몇 개가 달라붙어 있는 상태로 떨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견하가 손가락만 까딱하면 그림자 사내의 몸은 두 동강이 날 것이다.

이익서와 배영훈은 견하 주변 직원들의 얼굴을 봤다.

저런 표정은 눈에 보이는 처참한 광경만으로 나오는 게 아니다. 아마 도저히 듣고 싶지 않았을 끔찍한 비명도 들었을 것이다.

이제 죽어가는 그림자 사내에겐 그런 비명을 지를 여력도 남지 않았을 뿐.

눈을 굴리면서 간헐적인 신음을 흘리는 것으로 보아 일단 살아는 있다.

암살을 시도한 것 같은데, 무참히 실패한 듯하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에 배영훈은 다시 한번 몸을 떨었다.

독재자를 제거하는 방법 중, 최후의 수단은 바로 암살이다. 물론 어렵고 가능성도 낮지만 독재자의 폭주를 저지할 마지막 희망이다.

그런데 그 희망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면?

주견하를 견제할 모든 수단이 사라져버린다면?

암살이 통하지 않는, 죽지도 않는 독재자의 등장은 고려를…… 다이온을 어떻게 바꾸게 될까?

견하는 그림자 사내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버렸다. 그 충격으로 죽었든 아니면 죽는 데 시간이 더 걸리든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이익서와 배영훈을 향해, 주견하는 말했다.

“많이들 놀랐나 보군. 이렇게들 뛰어온 걸 보니. 잘 됐어. 시작하자.”

***

루우와 최효윤은, 견하가 수면 아래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지하지 않았다.

견하를 저지할 최후의 양심은 죽었으니까.

균형을 유지하던 자비로움도 죽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원칙을 지킬 필요도 없다. 법은 지키고 싶은 것만 지키면 된다.

모든 국가 기관은 미리안의 복수를 위해 작동한다.

그것은 황제이자 카간이라는 기관 역시 마찬가지다.

“폐하께선 군과 민을 아우르는 어버이이십니다. 군에만 묶여 계실 수는 없습니다. 대원수를 겸하신 것은 폐하께서 나라와 백성을 아끼는 마음으로 몸소 내려오신 것으로, 참으로 성은이 망극한 일이오나 폐하의 은혜를 받기만 하는 신들의 황공함도 헤아려 주시옵소서.”

“폐하, 폐하의 슬픔을 생각하면 신들의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사오나, 폐하께서 드높은 권위로 군림하시고 태사가 정치를 도맡음은 다름 아닌 폐하께서 세운 법과 원칙이옵니다. 밝게 살피시어 나라의 중심을 잡아주옵소서.”

루우는 어좌에 앉아 그저 허공만 바라본다.

그런 루우의 얼굴을 바라보던 시반과 류성일이 다시 입을 열려던 그 순간,

“역적들이 말이 많구나.”

시반과 류성일의 두뇌는, 처음에는 루우가 뱉은 차가운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폐하……?”

“너희가 기대는 법과 원칙은 그걸 유지하고자 안간힘을 쓰던 충신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을 모르느냐. 너희자 저지른 죄악도 균형과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충신의 헌신 덕분에 가능했던 것을 모르느냐.”

이제껏 없던, 황제의 질책. 추궁. 힐난.

“그저 이 대원수 계급장이 갖고 싶은 것 아니더냐, 류성일.”

조롱하듯, 루우는 계급장을 톡톡 두드렸다.

“너희가 그토록 없애고 싶어 하던 자가 너희의 마지막 방패였음을 깨달아라.”

시반과 류성일이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정치감독청 직원들이 어전에 들이닥쳤다.

“어전에서 이 무슨 불경한……!”

시반은 소리치려다 뭔가를 깨닫고 어좌를 올려다봤다.

이건…… 황제의 승인을 받은 행동이구나.

애초에 이곳은 자신들을 잡아먹으려고 벌리고 있던 맹수의 아가리.

피할 수 없는 종말이 닥쳐오고야 말았다.

시반은 팔이 뒤로 꺾이고 무릎이 바닥에 부딪히는 통증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

어두운 곳이었다.

류성일은 자기 몸의 윤곽만 희미하게 알아볼 수 있는 곳에 있었다.

방금 전에 누군가 두건을 벗겨냈는데…… 도대체 여긴 어디지?

정확한 답은 아니지만, 대충 짐작은 하게 해줄 사람이 류성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견하.

“하…… 애송이, 네놈이……!”

“유언은 신중하게 하십시오, 류 의장님. 아직 당신이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자비입니다.”

주견하의 말속에서 류성일은 최후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목숨을 구걸해봤자 소용없다.

아마 여기까지 온 사람 중에 살아나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눈을 보니 각오가 대단하시군요.”

주견하의 뒤쪽으로, 조금 더 밝은 빛이 무언가를 비췄다.

피. 의자. 마치 파멸인처럼 보이는 무언가.

당연히 파멸인은 아니다. 인간을 기능별로 해체한 저것은 파멸했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그 의미에 들어맞는…… 시체다.

어째서인지 누구의 시체인지 알 것 같았다. 시반은 아니었다. 시반이라기엔 덩치가 컸다.

마지막 오기와 분노를 끌어모아 외친다.

“그래, 내가 네 부모를 죽였다!”

주견하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류성일은 다리를 휘감아 오는 끈적한 무언가를 느낀다.

복수가 아니구나.

이 자는 나를 죽이며 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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