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3)
견하는 김천열 원수에게는 알리지 않고 움직였다.
1929년 4월, 아직 소장 계급을 달고 있던 김천열은 류성일의 소개로 리안 편에 섰다.
이후 그는 류성일 계열 사람이라기보다는 리안의 충직한 장군으로 복무하며 지금의 원수 계급에 이르렀다.
미리안의 재임 기간 내내 그는 정말 고려군의 주축으로 맹활약했고, 지금 겪는 두 번째 세계대전도 그의 지휘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견하는 김천열을 무작정 신뢰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류성일과의 연결고리가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해도 방심할 수는 없다. 일말의 의심조차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하여 견하는 일부러 최고사령부에 나서지 않고 칩거를 택했다.
지금 이렇게 행동에 나서면서도 김천열의 움직임을 곁눈질한다.
사태가 끝나는 동안 김천열이 얌전히 있어 준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그도 견하의 칼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당장 처리할 만큼 위협적이진 않더라도, 약간 ‘섭섭한’ 태도를 보이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는 정국이다. 그것만으로도 ‘언젠가 배신할 인간’으로 낙인찍고 죽이기엔 충분한 이유다.
그러니 납작 엎드려 있으라, 김천열 원수.
그러면 그간의 의리를 참작해주마.
서남방면군 뿐만 아니라 각 군에 퍼져 있던 ‘신진’ 군인들이 비밀스럽게 움직여 카라코룸을 봉쇄한다.
여기에는 철도성 장관 임병욱도 협력하고 있었다.
허동주를 속일 때처럼 교묘한 건 아니지만, 카라코룸으로 향하는 특별 열차를 편성해 주견하에게 동조하는 부대들을 실어 나른다.
‘신진’ 및 그들과 행동을 함께하기로 한 장교들은 모두 직속상관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행동에 들어갔다.
물론 상관들은 이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주견하의 편에 서기도 한다.
내전을 거치면서 그런 눈치는 한껏 단련된 사람들이 바로 제국의 군인들이니까.
주견하가 권력을 잡는 동안 공을 세운 후배들이 먼저 출세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갑자기 군인들이 왜 이렇게 많이…… 무슨 일 있습니까?”
카라코룸을 나오는 시민 하나가 검문소 앞 군인에게 물었다.
군인은 절도 있으면서도 정중한 어조로 대답한다.
“수도 방위를 강화하라는 명령입니다.”
대답을 들은 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악마들을 도시에 밀어 넣는 적의 악독한 공세를 물리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군인들은 괜한 말로 민심을 동요시키지 않으려고 저렇게만 말하지만, 시민은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도시는 시민들이 봉쇄당한 줄도 모르는 채로 봉쇄되어 간다.
다만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군인들 속에 섞인 하얀 제복을 알아차렸다.
한동안 눈에 잘 띄지 않았던 정치감독청의 제복.
뭔가 일어나리라는 걸 안 사람들은 두 가지 행동 중 하나를 취했다.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서 숨든지,
아니면 관련 기관에 닿아 있는 연줄로 열심히 전화를 돌리든지.
그러나 정치감독청이 무엇을 사냥감으로 골랐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 사냥개들이 빨리 누군가의 목을 물어뜯길, 그래서 포식자는 배를 채우고 나머지 모두가 안심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
류성일은 자신이 의장으로 있는 민의원뿐만 아니라, 참의원의 협력도 얻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참의원이 민의원에 비해 실권은 작지만, 그들도 어쨌든 황제 앞으로 나아가 의견을 전할 수 있다.
참의원 의장 시반과 함께 다시 한번 황제에게 태사 자리를 요구할 수 있다면…… 혹시라도 세 번째 의결까지 가지 않아도 황제의 승인을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패한다고 해도 손해는 아니다.
일단 시반 및 다이온혁신당의 지지를 확인한 데다, 거부권을 두 번이나 행사한 황제에게도 적잖은 압박감으로 작용하겠지. 이는 의회 해산 후 황제에게 올릴 세 번째 의결에서 다시 한번 힘이 되어 주리라.
문제는 무엇으로 시반을 설득할 것인가, 이다.
“미리안 태사의 생전에는 당신들의 배은망덕을 단죄한다는 의미로 몽골 지역에서도 제국입헌당 후보를 내고, 참의원과 민의원 모두 장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수가 된 지금은 다릅니다. 저는 몽골 지역에서 여러분의 우위를 지켜드리고, 민의원에서도 의석을 양보할 의사가 있습니다.”
시반의 눈이 빛난다. 류성일이 지금 제시하는 조건을 얼마나 신뢰하든지 간에, 조건 자체는 틀림없이 매력적이었다.
“연립 정권을 제안하시는 겁니까?”
두 번째 거부권이 행사되면 의회는 해산한다. 조기 총선거를 치른 후에 새로 구성된 민의원이 다시 류성일을 의장으로 선출하거나 태사로 추대하려면, 과반의 찬성이 필요하다. 선거에서 다이온혁신당에 의석을 양보하느라 제국입헌당이 과반 의석을 얻지 못하는 경우엔, 다이온혁신당에서 협력해줘야 한다.
“다음 민의원 의장 자리는 어떻습니까.”
이미 미리안이 제국최고회의 시절 의장 자리를 포기하여, 태사와 의장을 겸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류성일이 태사 승계에 있어 반발을 최소화하려면 미리안이 세운 전례를 따라야 한다. 즉 류성일이 태사가 되면서 공석이 되는 민의원 의장 자리에 시반이 앉으면 어떻겠냐는 말이다.
민의원이 참의원에 비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 시반 개인에게도 입맛 다시게 하는 제안이다.
“다이온혁신당과 함께 연립 정권을 수립하신다는 약속…… 제가 민의원 의장이 되는 것만큼 든든한 보장은 없겠군요.”
“제가 태사가 되는 데 다이온혁신당의 협력이 필요한 만큼, 시반 총재께서 민의원 의장이 되시는 데에도 우리 제국입헌당의 협력이 필요하죠.”
서로가 서로의 협력이 필요한 상황. 이만큼 믿을만한 보증이 있을까.
시반은 계산한다.
자신이 민의원 의장이 되면 참의원 의장은 공석이 된다. 이 참의원 의장 자리는 역시 다이온혁신당의 데렘칭이나 차파르에게 맡겨도 될 거다.
다이온혁신당이 양원 모두를 장악한 구도.
이러면 당은 한층 더 성장하여, 태사 류성일의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게 된다.
일단 제국입헌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한 이상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같은 약점을 제국입헌당도 쥐고 있다. 여차하면 연립 정부를 깨고 안세규의 고려국민당과 힘을 합치는 것도 한 방법이니까.
류성일은 류성일대로 계산이 있었다.
-안세규는 나 다음 태사가 될 거란 계산을 하겠지. 아니면 그놈 단독으로 세 번째 의결을 거부하고 단독으로 태사가 되려 든다든가.
즉 ‘다음 태사는 안세규’라는 착각을 계속하게 해서, 그의 시야를 좁힌다.
-마찬가지로 시반 이 자는 ‘참의원 의장, 민의원 의장, 마침내 태사!’라는 식의 착각을 하게 만든다!
당이 다르기 때문에 류성일을 어느 정도는 견제하겠지만, 잘만 이용하면 ‘류성일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둘이 충성경쟁을 하도록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방해물이 있다면…….
“폐하께서 대원수로 취임하신 것 말인데, 이거, 신하 된 도리로 한 말씀 올려야 하는 것 아닐지.”
군사 계급을, 관직을 초월해 연방의, 제국의 모든 것 위에 군림해야 할 황제.
그 황제가 신하가 쓰던 계급을 달고 직접 군사 문제에 개입하고 있다.
이것이 황제의 격에도 맞지 않고, 연방 헌법에서 정한 황제의 권한에도 어긋난다는 논란이, 아주 미약하지만, 사회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다.
물론 이런 논란은 류성일 쪽에서 부추기는 것도 있다.
“입헌군주제라는 원칙의 훼손으로 비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시반은 눈앞의 류성일을 보며 참 교활한 노인네라고, 반쯤은 감탄하고 반쯤은 경멸했다.
류성일이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구실일 뿐, 실상은 황제가 자기 권력을 방해할 요소를 없애고 싶다는 뜻이다.
황제가 ‘군’을 장악하는 바람에 태사가 그녀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은 바라지 않겠지.
“뭐, 돌아가신 태사 합하든, 그 선대 태사 합하든 대원수 계급을 겸하셨으니 마땅히 의장께서도……”
그렇게 대꾸하면서 시반은 류성일의 눈을 봤다.
그 안에는 류성일 본인도 대원수가 되어 군을 장악하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하다.
듣자 하니 이 사람은 미승휴와 마찰을 빚고 강제로 전역한 과거가 있었지.
그 보상을 바라는 심리일까.
두 사람의 협의가 그렇게 끝날 무렵에, 류성일의 보좌관이 들어와 보고한다.
“폐하께서 최효윤 대장을 데리고 황궁으로…… 작전을 의논하시는 듯합니다.”
류성일과 시반은 마주 봤다.
황제가 최효윤과 독대하는 지금, 다른 신하들은 없는 지금 곧바로 양원의 의장이 찾아가 압박을 넣어보면 어떨까.
최효윤과 작전 회의 중이라고 하니 그 이야기에 끼어들어 넌지시 ‘대원수 계급을 넘겨줄 것’을 요청할 수도 있을 듯하다.
두 의장을 나란히 태운 차가 황궁을 향해 움직였다.
***
존경하는 선배의 뒤를 이어 감찰국장이 되었다.
-선배는 대체 이 업무량을 어떻게 감당한 거지?
일개 과장일 때도 평범한 여고생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업무량과 학업을 동시에 수행해 낸 유지나지만, 국장으로 승진하고 나니 그건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업무가 밀려 들어왔다.
피로한 것도 그렇지만 새삼 견하에 대한 존경심이 강해졌다.
그런 선배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았다.
강철 같은 인간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정도로,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여자에 대한 질투도 아프다.
그러나 그 질투에 앞서 견하의 슬픔이 먼저 지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선배가 품은 증오는 곧 그녀의 증오심이 되었다.
“류성일과 시반의 차가 황궁으로 온다는군.”
친위국장 원동인이 다가와 소식을 전한다.
지나는 시계를 확인한다. 시반의 관저 쪽에 있다가 출발하는 거니까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준비는 완벽하겠지?”
그런 질문을 던지는 원동인에게, 지나는 짜증 섞인 시선을 보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나의 눈도 못 마주치던 주제에, 친위국장이 되고 나서는 너무 날뛴다.
주견하와 대학 동기라고 해도 대등한 입장이 아닐 텐데, 이 새끼는 대체 뭘 착각하고 있는 걸까.
“……친위국 애들이나 잘 단속하지 그래.”
원동인의 얼굴이 구겨진다.
“어이, 내가 그래도 너보다 선배……”
“학교인지 뭔지 소꿉장난 선배를 들이댈 셈이야? 나는 당신이 입시 공부하고 있을 때 각하 따라서 사람 쳐 죽이고 다녔어. 어느 쪽이 선배인지 똑똑히 파악해.”
“야, 유지나.”
지나의 손이 원동인의 목을 움켜잡았다.
완력 자체는 원동인의 힘으로 떼어낼 수 있다. 그러나 지나의 눈을 본 원동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지나의 손가락을 힘으로 떼어내는 ‘건방진’ 짓거리를 하면, 유지나는 원동인부터 ‘숙청’할 것이다. 그런 예감이 원동인을 덮쳤다.
견하와 함께 한 8년여의 세월. 그녀도 주견하처럼 성장한 사람이다.
유복한 소년기를 보내다 ‘충성심’ 덕분에 친위국장으로 벼락출세한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먼저’ 세워지고, 청장 각하께서 손수 길러내 감찰국의 힘이라면 친위국 따위는 개미처럼 밟아 죽일 수 있다.
“이번 일이 실패하면 친위국부터 해체야. 감찰국의 ‘지도’에나 똑바로 따라. 국장이라고 해서 다 같은 국장 아니니까 착각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