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2)
“동원령을 확대한다면?”
황제의 가정에 김천열 원수는 일단 긍정하긴 했다.
“징집을 늘린다면 전력 확보가 가능하겠습니다만, 여기에는 역시 ‘정치적 배려’의 문제가 있습니다.”
누구를 더 징병할 것인가?
민족 문제는 여기에도 영향을 끼친다.
다이온 연방은 다민족 국가고, 따라서 민족 정책은 연방 수립 이래 최대의 과제다.
지난 세계대전 이후의 식민지 정책은 연방 결성과 함께, 정확하게는 신수덕 토벌전을 전후로 크게 바뀔 수밖에 없었다.
군은 민간 정책에는 깊이 관여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민족 정책에는 신경을 써야 했다.
장병의 민족 구성이 바뀌면, 군의 전략 전술적인 판단 역시 바뀌어야 하니까.
“현재 다이온 연방군 주력은 고려와 몽골의 병사들입니다. 여기에 역외사국 및 한족이 일부 참여한 형태입니다.”
지휘의 편리를 위해, 기본적으로 몽골어 또는 고려어로 소통이 가능한 자들이 연방군에 합류했다.
“이 체제를 유지해서, 징병 조건에 고려어와 몽골어 구사가 가능할 것을 넣는다면 ‘일부러 해당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척’하는 방식으로 병역을 기피하는 자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고려어나 몽골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자를 징집하게 되면, 최소한 부사관 이상은 한어나 역외사국의 언어를 할 수 있는 자를 뽑아야 한다는 말이군.”
“민족 단위로 부대를 신설해야 한다는 점에서 편제에서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지금까지는 고려어, 몽골어 구사가 가능한 병사를 기존 부대에 그냥 편입시켰다. 그것이 민족 융화, 여러 민족의 ‘연방화’에 도움이 될 거라고 보았으니까.
하지만 언어, 민족에 따라 부대 자체를 나눠버리면, 과연 그들이 ‘연방군 소속’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을까?
언어와 민족이 다른 부대들의 지휘관은 누굴 뽑으며, 다양한 언어 구사가 가능한 장교를 양성하는 데 들어갈 시간과 비용은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런 부대들을 사령부에서 총지휘할 때는 과연 문제가 없을까? 명령이 하달되는 절차가 번거로워지면, 당연히 부대가 명령을 수행하는 데 차질이 생긴다.
반응 속도는 물론이거니와 명령을 오해하는 경우까지 생길 수 있다.
여기 최고사령부에서는 그럴 일 없겠지만, 예하 다른 사령부에서는 한족이나 역외사국 부대를 희생이 큰 자리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무리 장성이라도 철모를 걷어차야겠지만, 그런다고 해서 국내 여론이 악화하는 걸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장이나 원수쯤 이르면 ‘기자회견’도 하나의 업무가 된단 말이다.
-게다가 누구도 감히 지적하진 못하겠지만…….
고려어와 몽골어 이중 체계도 문제다.
다이온 연방은 고려와 몽골의 동군연합이 주축을 이루기에, 아무리 고려인들이 몽골인들보다 정치적 우위를 누린다 해도 어쨌든 대등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
특히 연방군으로 흡수된 몽골군 장병들의 기분을 항상 배려야 한다. 그것은 연방 결성 때부터 미리안이 무척이나 강조해 왔던 일이다.
때문에 이곳 최고사령부에서도 회의든 지휘든 항상 2개 국어를 구사할 것이 요구되었다.
-심정적으로는 고려어로 통일하길 바라지만, 폐하의 입장이나 다른 요소들을 생각해야겠지.
그래도 이런저런 문제점이 다이온 연방군의 역량을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아쉬웠다.
의견 상신도 여기까지.
최종 결단은 황제에게 달렸다.
“동원령을 확대한다. 부대 편성은 지금과 같이. 다만 고려나 몽골 민족의 구성 비율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지는 않게 할 것. 지휘관의 명령을 알아듣는 데 고급 어휘가 필요하진 않으니까.”
다시 황제의 시선이 최효윤 대장을 향한다.
“알래스카 상륙 작전의 준비에는 충분한 시간을 들이도록. 극북 지역에서의 전투를 상정한 신병 훈련, 물자 공급에 추가 예산을 할당하도록 하지.”
***
안세규는 좌절한 류성일을 본다.
절망까지 간 건 아니다. 류성일은 아직 태사가 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주변에는 ‘미래의 태사 합하’에 대한 의리를 과시하는 무리가 여전히 달라붙어 있다. 하지만 저들의 의리가 얼마나 오래 갈 진 아무도 모른다.
바로 지금 그들의 머릿속에는 류성일은 침몰하는 배니까 탈출하자…… 뭐 이런 생각만 가득 차 있을 수도 있다.
바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을 뿐.
-그렇다면 나와 고려국민당은 어떻게 해야 할까.
류성일은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정당의 의원들도 설득하고 있다. 민의원의 결의를 다시 한번 끌어모아, 황제가 행사한 거부권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다.
-거부권 행사는 두 번까지.
고려 제3제국의 헌법에 기초한 연방 헌법은 황제의 거부권을 그렇게 제한하고 있었다.
황제가 또 한 번 거부하면, 그때는 의회를 해산한다.
의회가 해산하면 총선거를 앞당겨서 치른다.
류성일은 그 총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걸까?
황제는 같은 문제에 대해서 거부권을 세 번이나 행사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류성일은 되든 안 되든 일단 태사 자리를 향해 돌진해보고, 총선거를 승리로 이끌어 확실히 태사 자리를 얻어내려는 것이다.
슬슬, 류성일과는 완전히 결별해야 할 때가 오는 건가.
이합집산을 반복하긴 했지만 끝내 화합할 수는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류성일은 안세규의 앞으로도 찾아와 횡설수설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안 총재는 늘 우수한 학생이었지……”
대학생과 총장 사이의 의리, 그것도 반정부 활동을 하던 시절 총장이 그들을 보호해준 의리를 다시 내세울 셈인가.
안세규는 일단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 고려국민당도 태사 자리를 공석으로 둬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당을 초월해 정계의 원로이신 의장님께서 태사가 되셔야지요.”
그러나 마주 웃는 류성일은 태사가 될 조바심에 눈이 멀어, 세규가 무슨 꿍꿍이인지는 짐작도 하지 못 하리라.
세 번째 제안이 가능해지려면, 의회 과반의 동의를 얻어야만 한다.
즉 총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해야 안전한 태사 임명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미리안이 없는, 류성일 체제하에서의 제국입헌당이 과반 의석 확보가 가능할까?
물론 미리안에 대한 동정 여론이 제국입헌당에겐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미리안의 지도력’이 없는 상황에서 류성일만으로 선거전의 승리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미리안의 카리스마에 눌린 ‘원로’들.
미리안에게, 더 정확하게는 주견하에게 충성하는 ‘신진’들.
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어야 제국입헌당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신진’의 협조를 받지 못한 ‘원로’ 세력만으로는 제국입헌당이 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하기가 어려워진다.
차지한다고 해도 ‘신진’ 쪽에서 류성일을 향해 표를 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세규가 ‘류성일의 세 번째 태사 추대’에 동의할 생각이 없었다.
-미리안만 없다면 얼마든지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 이성을 잃어버린 류성일 따위야.
즉, 최소한 류성일은 태사가 될 수 없다.
고려국민당이 선거에서 이긴다면, 선거 결과 공산당 및 사회민주당, 나아가 다이온혁신당과의 광범위한 협력을 이룰 수 있다면,
다음 태사는, 안세규가 된다.
-그러려면 먼저 제국입헌당에 혼란의 씨앗을 뿌릴 필요가 있지.
어디를 먼저 공격할까.
역시 약한 부위를 먼저 공격하는 게 정석이다.
당장 주견하는 칩거해버렸고, 그를 우두머리로 하는 ‘신진’은 혼란스러워 보인다.
이 제국입헌당 신진을 무너뜨리면서 원로들도 동요시키고, 그 와중에 포섭할 수 있는 인간은 고려국민당으로 끌어들인다.
누가 공격에 나서기에 적당할까.
후보는 금방 좁혀졌다.
주견하와 원한이 있으면서도 아직 살아있는 사람.
바로 정보사령부의 구종환이다.
정해졌다면 시간을 끌 틈은 없었다.
안세규는 곧장 제국정보사령부로 향해, 구종환과 접촉했다.
“미리안 태사의 전사에는 주견하 대장의 실책도 상당히 주요하게 작용했다는 풍문을 들었는데…….”
그렇게 운을 뗐는데, 구종환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안세규의 얼굴만 빤히 쳐다본다.
“주견하의 안하무인 성향은 장군께서 확실히 피부로 겪었던 일 아닙니까? 당장 연방 전체의 정보를 다루는 구종환 장군이 아니라면 이 혐의를 입증하고 주견하의 방종을 끝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대답이 없다.
약간의 불쾌감에 안세규의 눈썹이 꿈틀거렸을 때,
그제야 구종환은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됐다.
구종환과 안세규가 회견하는 응접실의 모든 문이 거칠게 열린다.
밀어닥치는 사람들은…… 정보사의 군인들이 아니었다.
“……정치감독청……!”
세규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두 여자. 세규는 유지나와 양수영이라는 이름까지 떠올리진 못했다.
그저 이 광경이, 무척 익숙하다고 생각했을 뿐.
아, 그래, 태사의 힘을 빌려서 고려국민당 내 반대파를 숙청했을 때, 바로 그 광경이다.
장신의 안세규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달려온 유지나의 군홧발이 허벅지에 꽂힌다.
비틀거리는 안세규의 얼굴을 유지나의 권총 손잡이가 무자비하게 강타한다.
안경이 깨져나가고, 찢어진 입에서 흐른 피는 바닥으로 쏟아진다.
“우리가 구종환을 석방했을 때 아무런 대비가 없었을 줄 알았냐, 멍청아.”
구종환의 낄낄거림은 이제 광소로 바뀌었다.
그도 한 세계의 종말을 보고 있었다.
국가 기관 사이에 최소한의 견제가 이루어지고, 예의와 품위를 존중하는 상식이 남아 있던 세계는 사라져버렸다.
양수영의 권총이 구종환의 입에 처박힌다. 구종환은 웃음을 멈췄다. 분노도 광기도 죽음의 위협 앞에서는 조절되는 법이다.
안세규는 자신의 오판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절망적으로 느꼈다.
“제국정보사령부는…… 이미 껍데기만 남기고 정치감독청으로 흡수된 건가.”
“사실상 방첩국의 지부가 된 지 오래지.”
조롱하듯 대답해주고 끌고 가, 라며 유지나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두 팔을 붙잡혀 질질 끌려 나가면서 안세규는 생각했다.
공화고 민주고, 모든 이상은 다 끝이라고.
그렇게 많은 사선을 넘어왔건만, 이제는 살아날 수 없을 것이라고.
***
계략은 눈치를 봐야 할 때 치밀해진다.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생각도 없다면 다소 거친 계략이어도 상관없다.
힘으로 찍어누르면 되니까.
이의 제기는 총살.
저항은 총검으로 척살.
견하는 멍한 얼굴로 계산한다.
적의 방심을 유도.
틈을 만든다.
넋이 나가버린 것은 연기가 아니라 진짜다. 견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무기력하다.
그러나 견하라는 인간, 아니 인간이었던 것의 사고는 그것마저도 계산에 넣는다.
주견하는 늘 ‘자신이 없어도 작동하는 시스템’의 구축에 매달렸다.
그것은 다시 말해 ‘자신을 부품으로 하는 시스템’의 구축도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류성일은 태사가 될 욕심에 무기력한 주견하를 ‘나중에 처리해도 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계속 정신을 못 차리면 저대로 폐인으로 둬도 상관없다고.
안세규는…… 이쪽은 좀 위험하다. 분명 주견하를 먼저 ‘확실하게’ 처리하는 방식을 선호할 터.
하지만 안세규의 움직임을 예상할 수 있다면, 함정을 파놓는 것 역시 가능하다.
행동의 시점은 언제인가.
황제가 첫 번째 거부권을 행사했을 때.
류성일이 두 번째 거부권 행사를 유도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조기 총선거가 열리기 전.
바로 그때 류성일의 방심은 절정에 달하고, 안세규는 위험한 도박을 시작한다.
“각하.”
친구, 한재연이 부른다. 그의 도움을 받아 제복을 걸친다.
거울을 보며, 견하는 자신에게 들려주듯 말했다.
“우리들의 제국이다. 도적들을 주살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