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1)
“짐은 거부권을 행사하겠다.”
그렇게 선언하는 루우의 눈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웠다.
리안이 죽자마자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달려드는 버러지들을 보는 눈길이었다.
류성일과 그 무리는 황제의 표정과 어조에도 당황했지만, 그보다도 루우의 차림새에 더 놀랐다.
황제는 용포를 입지 않았다. 고려풍도 몽골풍도.
미리안이 입던 바로 그 옷은 아니지만, 양식은 동일한 군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미리안이 달고 있던 대원수 계급장을 달았다.
법적으로 이게 가능한가는 둘째치고, 황제의 의지는 명확했다.
이제 루우는 황제이자 군인으로서 행동하겠다는 것.
미리안의 의지를 잇겠다는 것.
류성일도, 그에게 아첨하던 무리도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황제는, 그들에게, 전혀 우호적이지 않다.
“폐하, 하오나…….”
“비상시국이다. 오늘부터는 짐이 직접 최고사령부에 나서서 지휘하겠다.”
그러니 당장 태사는 둘 필요가 없다는 말.
거부권 이상의 거부였다.
류성일은 좀 더 용기를 내보기로 한다. 이대로 물러나면 체면도 손상되겠지만, 뒤에 선 지지자들의 의심을 사게 된다.
정말로 류성일의 편에 서 있어도 좋은 것인가, 하고.
이 답답한 몽골 계집년이!
지금 제국에서 가장 큰 정치 세력을 이끄는 건 나란 말이다! 나와 협력하지 않고서 어떻게 제국에 군림할 생각이지!
“전 태사 미리안이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지금, 폐하의 존귀하신 옥체를 지키는 일은 나라와 만백성의 첫째 되는 과제이옵니다. 밝게 살펴 주십시오.”
그래도 감히 ‘그러실 수는 없습니다’하고 막아서진 못한다. 이런 식으로 최상의 경배를 바치며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 류성일을 답답하게 한다.
권력이 아무리 커도, 거대한 ‘권위’ 앞에서는 찌그러질 수밖에 없으니.
명백히 아래를 향한 눈동자. 그 시선 끝에 서 있으면 나이나 경력 같은 것은 상관없이, 자신이 아랫사람임을 실감하게 된다.
루우가 지금 그런 눈으로 류성일을 내려다보고 있다.
“짐이 두 번 말해야 하는가?”
***
최고사령부에 나타난 황제 폐하 앞에서 모두가 바짝 얼어붙은 경례를 올렸다.
지금까지 ‘황제는 군 계급을 초월한다’라는 이념에 따라 군 계급을 부여받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 루우 테무르, 혹은 고려식으로 왕서라라는 이름의 여자는 대원수 계급장을 달고 왔다.
미리안과 달리 ‘전략’을 지휘해 본 경험이 많지 않은 루우 테무르에 대한 염려 섞인 시선들도 있었고, 분위기에 압도된 장교도 있었다.
특히 김천열의 입장에서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광경이었다.
여기 있는 장성들보다 훨씬 어린, 소녀라도 해도 좋을 여성이 당연하다는 듯이 군인들의 중심에 서, 그들에게 승리할 것을 명령하는 광경.
미리안을 향한 반신반의는 수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믿음으로, 열광으로 변해갔다.
오늘 그녀보다도 어린 루우가, 그녀의 계급장을 달고 찾아왔다.
처음 미리안의 지휘를 받을 때가 떠오른다.
몇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날 미리안의 머리카락은 인상적일 정도로 길었지만, 오늘 루우의 머리카락은 소년처럼 짧다는 것.
새카만 비단 같던 태사의 머리카락과 달리, 황제의 머리카락은 금발에 가까운 갈색이다.
키도 더 컸고.
또 다른 점이 있다면, 약간은 혼란스러워했던 미리안과는 반대로 루우의 눈빛에서는 명확한 목표를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복수.
황제는 태사 미리안의 복수를 바란다.
이 최고사령부 안의 모든 장교도 복수를 외치긴 했지만, 황제는 어렴풋한 그 감정에 열기를 불어넣었다.
미리안 시대에 출세한 사람도 있다.
미리안과 함께 몇 번이고 사선을 넘어온 사람도 있다.
그녀가 세운 이상과 다이온 연방에 자신의 미래를 건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미리안과 그녀의 시대를 추억한다.
그렇기에 미리안을 앗아간 자들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돌칼로 뼈에 새기듯이.
그들이 지금 품은 감정은 신수덕이 허동주의 죽음에 품은 감정과 거의 같았다.
최고사령부의 장교들은 이제 그 어떤 무자비한 작전이라도 실행할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주견하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가.
김천열은 딱히 주견하를 책망하는 건 아니었다.
주견하는 일단 공을 세우긴 했다. 그리고 정상적인 휴가 신청 절차를 밟아서, 공식적으로는 ‘휴가’ 중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의 서남방면군 사령부는 매우 세세한 지침을 하달받았고, 사령관이 부재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 돌아가는 상태다.
당장 주견하가 나서야 할 작전은 없다.
하지만 미리안의 연인, 측근 중의 측근이자 다음 시대를 견인할 실세라는 평가를 받았던 자가 나서지 않는다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
개인적으로도…… 조금 안타깝다.
그는 김천열이 아직 소장일 때부터 알았던 사람이다. 그때, 생존이 확인된 태사 앞으로 불려갔던 날, 주견하는 의식을 잃은 소년에 불과했었다.
주견하의 불안하고 극단적이면서도, 어떨 때는 감탄을 자아낼 만큼 대범한 행보를 지난 8년간 지켜봐 왔다.
-내가 그런 소년기를 보냈다면 절대로 주견하처럼 성장하진 못했겠지.
그랬던 사람이 완전히 무너져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른 건가.
빨리 회복하고,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복수에 나서길 바라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한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김천열 원수, 설명을.”
황제의 한마디가 김천열의 생각을 중단시켰다.
그의 시선은 장교들이 가져온 작전도 중 하나로 향했다.
“급박하게 진행된 쿠데타였지만 일본의 신정부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군의 통제에도 아직까지 문제의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라는 말은 향후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인가? 최고사령부는 그렇게 보고 있나?”
황제의 말투가…… 완전히 미리안을 닮아버린 것 같다.
자비로운 황제는 이제 없다.
변명하지 말고 대답해라!
“……그렇습니다.”
“추가 파병이 필요하겠군.”
“이미 추가 병력을 투입해 가마쿠라에 상륙한 멕시카 육군과 교전 중입니다만, 병력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구실로 더 보내서 일본 정국 장악에 쓸 수는 있습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가고야 만 건 김천열 입장에서도 씁쓸했다.
일본의 신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는 ‘적국 멕시카의 사주를 받았다’라며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다.
일본공화국의 국력을 생각하면 결코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나라가 아닌 데도, 몇몇 한심한 정치가가 전쟁통에 나라를 팔아먹자마자 바로 이 꼴이다.
국민들이 외국군에게 죽어가는데, 일본 신정부의 정치인들은 권력을 유지하는 데 쓸 더 많은 외국군을 바란다.
‘어쨌든 전쟁에서 이기면 침략을 물리친 정권이 된다’라는 게 그자들의 생각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작태다.
“가마쿠라 전선에서의 교전은 어떻지?”
“카라코룸, 칸발리크, 동명을 향한 공격은 우리의 주의를 끌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았고, 가마쿠라 상륙이 본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매우 공을 들인, 대규모 상륙 작전.
이 작전을 위해 멕시카군은 신형 상륙정까지 대규모로 생산한 것으로 확인된다.
“주견하 대장의 공세로 멕시카 본토가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텐데, 그 타격과는 관계없이 진행된 상륙 작전인가?”
“그렇다고 보기엔 가마쿠라에 상륙한 멕시카군은 순조롭게 교두보를 넓혀나가고 있습니다. 보급선도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외무성이나 정보부의 의견에 따르면 본토 타격에 의해서는 멕시카 정권이 딱히 위기를 맞은 것 같진 않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멕시카 정권은 내전의 승자다.
반정부 여론을 주도할 구심점 자체를 모조리 죽여버린 후니까, 그게 유의미한 수준으로 집결하긴 어려울 것이다.
구심점이 없는 민중은 무력하다.
아니 애초에, 멕시카의 민중이 현 정부에 반감을 품기는 할까?
내전에서 살아남아 멕시카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사람 중 대다수는, 자의든 타의든 쿠에츠팔린 정권에 복종한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을 것이다.
처음엔 군인들을 파멸인으로 만들어 전장에 보내고, 나중에는 포로들, 정치범들을 파멸인으로 만들어 전장에 내보낸 잔혹한 범죄에서도 눈을 돌리겠지.
알게 된다 해도 그건 사실이 아니다. 아니어야만 한다.
최고지도자 쿠에츠팔린과 그 정부를 비방하는 모든 말은 ‘적국의 선동’이다.
왜 전사한 가족의 시체가 돌아오지 않는가 의문을 품는 행위는 ‘밀고자’들의 번뜩이는 눈을 피하지 못한다.
아니면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모든 것을 ‘국가를 위한 영광’으로 받아들이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으니까.
“이 이상 교두보를 넓히게 둬선 안 된다. 특히 혼슈 동북부를 장악할 경우 아이누가 적의 공세와 맞닿겠지.”
아이누가 뚫리면 그때는 고려의 동북부도 위협받는다.
“어떻게든 저지하도록.”
다행스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일본의 신정부가 다이온 연방과 군사 동맹을 맺자 베트남, 아이누, 다리다 역시 동맹 의사를 밝혀왔다는 것이다.
어설프게 상황을 지켜보다가 다이온군의 개입으로 정권이 무너지는 사태를 겪는 것보다는 낫다, 그런 계산도 있었겠지.
황제 루우의 시선은 이번엔 다른 작전 계획으로 향한다.
극북방면군 사령관 최효윤 대장과 그 참모들이 마련한 작전이다.
최효윤 역시 최고사령부의 회의에 참석했다.
작전 계획을 집어 든 루우의 눈길이 최효윤에게 닿았다. 효윤 역시 루우를 본다.
말 없는 말이 두 사람의 시선을 타고 오갔다.
장교들은 그것이 어떤 말인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미리안에게 있어 가장 ‘가족’에 가까웠던 사람들 간의 대화다.
처절한 통곡을, 복수심으로 억누르고 있다.
작전 계획을 훑는 루우의 눈, 그 눈에 일렁이는 살의가 복수심을 대변한다.
“알래스카 상륙 작전. 가마쿠라에 적 병력이 묶인 틈을 타 알래스카를 통해 북서쪽에서부터 아즈텍 대륙을 공략해 나간다?”
“멕시카 정부가 누리는 권위에는 손상이 없을지 몰라도, 대륙의 생산력에는 분명 타격이 있었을 겁니다, 폐하.”
루우는 효윤을 바라보다, 김천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상되는 문제점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극북의 전투 환경은 통상적인 전투를 치르기엔 어려움이 많다는 겁니다. 단련된 극북방면군이라면 모를까, 서남방면군만 하더라도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 소모율이 엄청날 겁니다.”
“훈련하면 됩니다.”
효윤의 반론에 루우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일단 김천열 원수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지.”
“둘째는 상륙정과 상륙정을 호위할 함대 전력의 부족입니다. 겨울이라면 두껍게 언 얼음 위로 보병을 진군시켜 추크치와 알래스카 사이의 해협을 통과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물자, 중장비와 기갑 전력은 아닙니다. 그런 불확실한 경로로 부대와 장비를 이동시키고 보급선을 유지할 순 없습니다.”
일본공화국의 해상 전력은 박살이 났고, 다이온의 해군도 3년 동안 박차를 가했다곤 하지만 멕시카에 비하면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멕시카는 해군력 대부분을 태평양에 쏟아붓고 있다.
“셋째는?”
“병력 자체의 부족입니다. 적이 공간 도약을 통한 공격을 재개할 가능성을 무시할 순 없습니다. 본토에는 충분한 방어 병력이 배치되어야 합니다. 일본 열도 전선을 유지할 병력도 필요하고, 혹시 모를 세련의 움직임도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알래스카 상륙 작전에 돌릴 병력은 거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