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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13화 (513/541)

인간성의 마지막 조각(28)

견하를 앉혀두고, 리안은 주변 장교들에게 명령했다.

“향후 당과 군에 관한 내 모든 권한은 주견하 대장에게 맡긴다. 제군은 이 점을 명심하도록.”

대원수의 계급장을 떼어 견하의 손에 쥐여주었다.

“합하……?”

장교들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전선 너머 먼 하늘과 땅만 바라보았다.

이 붉은 공간, 칸발리크와 멕시카 사이의 통로가 되는 곳.

뒤틀리고 있다. 이대로라면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여기 들어온 다이온군 수십만이 먼저 죽는다.

혹은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한 꼴이 되겠지.

“병사들 사이로 동요가 번지지 않도록 하라.”

그렇게 말하곤 리안은 갑자기 앞으로 뛰어나갔다.

멕시카군의 전선은 이미 붕괴되어 있다. 그들은 푸른 불꽃과 함께 불타오르는 자기네 진지와 신전만으로도 혼란에 빠져, 갑자기 다이온군 전선에서 튀어나온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다.

환도를 뽑아 든다.

원리는 지난번과 같다.

영혼이 있든 없든.

육체가 있든 없든.

마음만큼은 누구도 침범하지 못 하리라.

그 마음만으로 마르코 폴로의 공간을 가르고 나왔듯이, 이 공간을 어지럽히는 현상 역시 베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극한에 달한 기는 사람이 원래 해낼 수 있는 이를 뛰어넘는다.

몸의 구성과 작동 원리가 마음의 이치를 얽매진 못 하리라.

물론, 몸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그만한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겠지만.

손끝이 떨리지만.

내려친다.

그 어떤 이단도 보이지 못한 섬광이 공간을, 세계를 가른다.

일직선으로, 문 너머까지.

작제건이 해냈던 일에 감히 도전한다.

감히 혁세주 따위가 우리 세계를 침범치 못하도록.

기가, 이가 규정한 것 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마음이 육체를 초월한다.

문득, 생각한다.

평생을 운명에 휘둘리며 살아왔다는 억울함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순간 자신은 비로소 운명을 휘둘렀노라고.

독재자였던 자신은 그 어떤 독재자도 해내지 못한 것을 해냈다.

후대를 믿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후대를 위한다는 말이 그저 말에서 그치지 않고, 자기 몸마저 바쳐서 이뤄낸다.

아, 그러고 보니 견하하고는 작별 인사를 했는데,

효윤과 루우하고는…… 아쉽……

***

견하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여, 벌레처럼 기어서라도 리안에게 가려고 했다.

하늘과 땅이 모조리 뒤틀리는 가운데, 멀쩡한 사람도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데 견하가 리안에게 달려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견하는 리안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녀의 일격이 뿜어낸 빛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것을.

그녀가 문득 뒤를 돌아보고, 눈물과 함께 견하를 향해 미소 짓는 것을.

그녀가 빛이 되어 흩어지는 순간을.

그 순간,

견하가 품었던 인간성의 마지막 조각이, 산산이 깨졌다.

***

서남방면군 사령관 주견하 대장의 역공은 성공적이었다.

동명, 칸발리크, 카라코룸을 짓누르던 문은 사라졌다.

붉은 공간 안으로 진격했던 서남방면군도 희생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무사히 퇴각.

문이 다시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경계는 늦추지 않았다.

좀 더 정확한 정보는 다른 나라의 첩보와 교차 검증을 거쳐야 나오겠지만, 어쨌든 제국정보사령부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번 작전으로 멕시카 본토가 입은 피해는 상당한 듯했다.

주견하 퍼부은 공격도, 미리안이 마지막으로 쏟아낸 공격도.

하지만 다이온이 잃은 것도 컸다.

“……합하께서는 장렬히 전사하셨다.”

이런 내용의 방송이 라디오를 타고 전국에 퍼져나갔다.

황제 루우 테무르는 애도 주간을 선포했다. 따로 연설을 하진 않았다.

미리안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동명특별시 황궁 안에 있는 태사부 앞으로 이어졌다.

그녀가 공식적으로 태사로 나선 기간을 모두 합치면 집권 기간은 10년에 이른다.

그 시간 동안 그녀의 통치에 그저 익숙해진 사람이건, 은혜를 입은 사람이건, 혹은 비판자였더라도 죽음을 기리는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와서 꽃을 바친다.

그러나 꽃이 수북이 쌓이는 동안 주견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철군을 지휘할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다고 들었는데.”

“예. 하지만 카라코룸으로 오시고 나서는 계속……”

효윤을 안내하는 장교는 송구스럽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극북방면군 사령관 최효윤 대장은, 그녀가 맡은 전선에서도 적을 격퇴해 여유가 생기자마자 새 수도 카라코룸으로 내려왔다.

리안의 전사 소식을 듣고, 그녀도 물론 오열했다.

효윤은 리안을 지키기 위해 훈련받았고, 10년 넘게 동안 그녀를 지켰다. 분수에 맞지 않는 지휘관 자리를 맡아 극북으로 가기 전까진.

자신이 리안의 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리안이 지금 살아있을까.

아니, 애초에 자신이 지휘관이 되겠다는 선택만 하지 않았어도…….

“여기서부턴 나 혼자 가지. 사람들을 물려주게.”

장교는 경례를 올려붙이고 돌아 나갔다.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소용없는 가정, 소용없는 죄책감이다.

울고만 있을 순 없다.

우는 건 리안이 맡기고 간 일들을 다 해냈을 때, 그녀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을 때, 그러고서도 비로소 옛일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을 때 해도 늦지 않다.

효윤은 견하가 머문다는 방까지 거침없이 걸어갔다.

문을 두드리는 짓거리 따윈 하지 않는다. 잠겨 있다면 부숴버릴 기세로 열고 들어간다.

무너져버린 남자가 있다.

효윤 본인이 좋아하고, 효윤이 사랑했던 여자가 사랑한 남자.

침대에 앉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벽만 바라본다.

방에 누가 들어왔는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암살자가 손쉽게 견하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눈물은 말라붙은 건지, 아니면 흘리지 않은 건지.

효윤은 견하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네가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

리안이 왜 죽었는지,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른 사정을 그녀는 짐작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겨진 사람들이 이렇게 주저앉아만 있어야 하겠는가.

미리안의 뜻을 이어야 한다.

최소한 그녀가 남긴 나라를 지켜야 한다.

잡은 멱살을 몇 번 흔들어보지만, 견하는 눈만 굴려서 간신히 효윤을 인식했을 뿐 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다.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대로 견하의 면상에 주먹을 내질렀다.

반격은 없었다. 그대로 다시 침대에 쓰러진다.

맞은 건 견하인데,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건 효윤 자신뿐이다. 그 사실에 짜증을 느끼면서 효윤은 말을 쏟아냈다.

“멕시카군이 가마쿠라에 상륙했대! 적 지휘부, 해군은 아직 멀쩡하다는 이야기야. 아마 육군도 꽤 남았겠지!”

전 같으면 이런 화제에 총명함을 빛내며 입을 열었을 텐데, 견하는 계속 반응이 없다.

“나는 알래스카 상륙작전을 지휘할 거야.”

더 말했다간 자신이 먼저 눈물이 터질 것 같아, 효윤은 돌아섰다.

방을 나서기 전, 배에서 힘을 끌어모아 외쳤다.

“복수는 해야 할 것 아냐!”

***

“폐하, 전란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때, 군과 민을 총지휘할 태사의 자리를 비워둬서는 안 되옵니다!”

시끄럽다.

“폐하, 민의원 의장 류성일, 고려국민당 총재 안세규 모두 출중한 인물들로……”

시끄러워.

짐은 친구의 죽음을 슬퍼할 시간도 없단 말이더냐!

진즉에 눈치챘어야 하는데.

고뇌에 잠긴 그 눈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이게 네가 내린 결론이란 거지, 미리안…….”

리안의 유품, 대원수 계급장.

견하의 손에 있던 그것은 지금 루우가 모은 두 손 위에 있다.

한 방울, 두 방울, 화려한 그 계급장 위로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용이 통곡한다.

처음 만났던 그날을 떠올린다.

암살자들에게서 도망치면서도, 피를 뒤집어쓰면서도 권력자의 위엄을 잃지 않았던 미리안.

리안도 루우에게서 신비로움을 느꼈지만, 루우 역시 리안에게서 신비로움을 느꼈다.

또래 여자애가 저렇게 권력을 두고 투쟁할 수 있구나 하고 감탄도 했다.

의식하진 않았지만, 루우는 황제로서 어떤 행동을 보여야 하는지 고민될 때는 늘 리안을 모범으로 삼아왔다.

울음을 그치고 나서, 용은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

이 제국은 다른 누구도 아닌 미리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한동안 태사 자리는 공석으로 두고, 자신이 직접 최고사령부로 나가 지휘하리라.

대원수 계급장을 가슴에 대 본다.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으로 무작정 고려로 들어왔던 소녀는, 그렇게 대원수가 되었다.

***

“폐하께선 아직 슬픔에 잠겨 계시는가.”

“뭐 8년이나 함께 했으니 그만한 애증이 있으시겠지요. 권신이었다고는 하나 폐하를 옹립한 사람이기도 했잖습니까?”

적당히들 좀 떠들어라. 떠들려면 입가에 기대에 찬 웃음기나 지우고들 좀 떠들고.

안세규는 차가운 눈으로 류성일과 그 주변의 무리를 바라봤다.

태사가 될 생각에, 그리고 새로운 태사한테서 떨어질 콩고물에 들뜬 인간들.

민의원 회의장에 모여놓고선, 국정은 논의하지 않고 아무 데나 비딱하게 기대어 저런 이야기들이나 주고받고 있다.

미리안의 죽음을 슬퍼하라고는 안 하겠지만, 그런 척은 해야 할 것 아닌가.

미리안이 죽었다고 해도 미리안의 인기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논란은 있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행적은 황실 복구, 내전 승리, 몽골과의 동군연합, 다이온 연방 수립…… 이렇게 이어지는, 절대로 폄훼할 수 없는 공적들로 채워져 있었단 말이다.

게다가 그녀의 죽음은 ‘전사’이기까지 하다.

민중 사이에서 신격화가 이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런 그녀의 죽음을 두고 ‘이제 태사가 될 기회가 왔다’라면서 희희덕거린다고?

제정신인가?

게다가 누구도 주견하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는 신경도 안 쓰는 건가?

주견하가 카라코룸 어딘가로 칩거해버렸다는 사실 자체가 세규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듣자 하니 신수덕은 이미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리안의 죽음은 신수덕이 작전에 차질을 빚게 해서라는 이야기도 들었고.

그렇다면 반역자를 빨리 압송하지 않고, 그 반역자를 작전에 참여시킨 주견하의 작전 능력을 문제 삼아야 할 것 아닌가.

상급자인 대원수, 나라의 재상인 태사를 전장에서 죽게 만든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

탄핵이든 뭐든 해야지 저게 뭣들 하는 짓거리야!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안세규는 침묵했다.

“그래도 태사 자리를 비워둘 수만은 없잖습니까? 의장께서 직접 폐하께 상주를 드려 보심이?”

“허허…… 아무리 그래도 본인을 추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의원님을 태사로 추천할까요?”

“예? 아이고, 의장님이 계시는데 제가 어찌…… 농담도 적당히 해주십시오.”

“태사는 의장님께서 하셔야지요.”

“그럼 제 후임 의장을 추천해야겠군요. 이거, 민의원 의장이 태사가 되기 전에 밟는 단계가 되진 않을지……”

농담 같은 말속에서, 류성일은 자신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의원들을 아첨 경쟁으로 몰아넣는다.

저런 것들에게 가까이 가서 ‘조언자’ 역할을 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 당장 저들이 충고를 받아들일 리도 없고, 만일의 사태가 생겼을 때 류성일 일당으로 몰리기도 싫으니까.

안세규의 예감은 옳았다.

얼마 뒤 제국입헌당의 원로들이 무리 지어 어전으로 나아갔을 때,

황제는 그들의 상주를 다 듣지도 않고 ‘거부권’을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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