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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12화 (512/541)

인간성의 마지막 조각(27)

누군가는 하고야 만다.

리안은 그 누군가의 얼굴들을 단숨에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은 극북의 방어선을 지휘하고 있는 효윤.

카라코룸에서 몸을 던져가며 방어에 임하는 루우.

리안은 마르코 폴로가 보여줬던, 또 다른 세계들의 가능성도 기억해냈다.

리안을 대신해 연구를 강행하며 견하를 살리려던 효윤.

온몸에 용의 비늘 같은 게 돋아나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견하를 살리려고 발버둥 치던 루우의 충격적인 모습까지.

“내가 안 해도 누군가는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는 건가?”

“우리의 마음만 절실한 건 아니거든.”

이번에는 리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가, 뒤집었다. 이제는 그녀도 이곳에서의 환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리안과 또 다른 리안 사이에 풍경 하나가 펼쳐진다.

바로 지금 견하가 처해 있는 상황이다.

“네가 견하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견하가 저 지경이 되어도 좋다는 거야?”

리안의 손가락이 죽은 피 같은 하늘을 가리켰다.

“네 귀에는 아직 견하를 잃지 않은 사람의 배부른 소리일지 몰라도, 세상을 꼭 이런 위험한 지경으로 몰아가야만 하겠어?”

“질문이 두 가지네.”

다른 리안의 얼굴 가득, 슬픈 미소가 차오른다.

“……우리가 견하를 애초에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어.”

“뭐……?”

되묻긴 했지만, 리안은 단숨에 다른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

근본적으로 무엇이 문제였을까.

견하의 부모를 죽인 건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자들의 소행이었고, 그 암살자들을 보낸 자가 나쁘다.

막연히 그렇게 머릿속 한구석으로 치워뒀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피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8년 전 그날, 비를 맞으며 죽음을 피해 도망치던 그날 자신이 견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견하의 집을 안전 가옥으로 삼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그냥, 자신이 죽어버렸더라면……

다른 리안은 리안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만나버렸지. 우리는 무수한 세상에서 무수히 만났어. 무수히 만난 만큼, 견하도 무수히 망가졌지.”

부모를 잃고, 허동주를 죽이려고 탄 기갑사에서 불가살 반응을 일으키고, 신종의 씨앗이 만들어낸 문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견하를 최소한 인간으로 성립하게 하려면, 견하의 이가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내가 개입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어.”

다른 리안은 한숨을 내쉬듯 말하곤, 리안이 보여준 환상의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견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반드시 이렇게라도 견하를 살려냈으리라는,

믿음.

아름답게 들려야 할 감정은 어째서 이 자리에선 광기가 되어버린 걸까.

“세상이 이렇게 된 건 딱히 내 탓은 아니지만,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나는 견하를 위해서라면 전 인류가 파멸인류가 된다 해도 상관없어. 망설이지 않고 같은 선택을 또 반복할 거야.”

두 사람의 리안은 침묵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상은 뒤틀려간다.

리안의 음울한 손짓이 풍경을 바꾼다.

견하가 겨냥한 아즈텍 대륙으로.

대륙 절반을 뒤덮을 만큼 거대해진 하늘의 붉은 반점 너머,

무언가가 꿈틀대는 게 리안의 눈에 들어왔다.

***

벨리사리우스 황제는 첩보원들로부터 올라오는, 절규에 가까운 보고를 무덤덤한 얼굴로 받았다.

“멕시카 자주국 국토 상당 부분에 걸쳐 상공에 이상 현상 발생, 이라…….”

보고는 그의 집무실로 올라온 다른 보고들 틈에 섞인다.

바로 전에 요르요스가 아라비아 지역에서 반역자들의 ‘청소’가 끝났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렇게 ‘깨끗해진’ 지역에 새로 도로와 철도를 깔고, 로마인들의 산업을 진출시켜야 한다.

특히 유전 개발 사업은 그 자체로 로마 제국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겠지만, 군수 물자로서의 가치도 높다.

현대전은 결국 항공기와 전차, 각종 군용 차량, 함대에 들어가는 석유를 얼마나 오래 감당할 수 있느냐가 판가름하는 법이니까.

에반겔로스는 신성 제국과 브리튼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 동맹의 동향을 가져왔다.

“신성 제국은 이탈리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폐하.”

“……그런가. 그들도 멕시카의 사정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모양이군.”

내가 아는 건 다른 사람도 안다. 그걸 깨우치는 게 전략의 기본 중 하나다.

“대서양 저편에서의 압력이 줄어드니, 동쪽으로 고개를 돌려보겠다는 건가.”

“정세가 좋다고 말하긴 힘듭니다. 최선의 전략은 우리가 동맹으로 삼은 멕시카와 다이온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지만,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써 반년 넘게 지속되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구도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물론 벨리사리우스에겐 정세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 역시 황제 자리라는 도구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벨리사리우스는 요르요스와 에반겔로스 앞에선 멕시카에서 벌어지는 일을 ‘현안 중 하나’로 취급했지만, 실은 관심이 온통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대륙 절반을 뒤덮었다는 멕시카 상공의 붉은 반점.

그건 얼마나 거대해질 것인가.

그것이 멕시카인들에게 어떤 변화를 끌어낼 것인가.

나아가 전 인류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

“폐하, 지금이라도 멕시카와 다이온 사이의 중재를 맡으셔야 합니다. 멕시카가 전쟁에서 이겨도 한동안은 태평양, 아시아의 관리에만 집중할 겁니다. 반대로 멕시카가 지면 대륙에는 힘의 공백이 생깁니다. 두 나라가 승부를 가르지 못하고 전쟁이 길게 끌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압박에서 자유로워진 서유럽 동맹은 전쟁을 준비할 겁니다. 아니, 이미 준비하고 있습니다!”

에반겔로스의 절박한 외침은 벨리사리우스의 심드렁한 말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다가올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준비하면 되지 않겠소?”

***

나, 마르코 폴로는 본다.

한 사람의 두 가지 가능성이,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단숨에 다가가 뭔가 말해주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문제의 결론은 그녀들이 스스로 내려야 한다.

결론이 나오면, 나는 그저 방법을 제공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 결론을 알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결론에 이른 세계를 관찰했다.

늘 이야기하듯이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펼쳐져 있고, 삼라만상은 그 위를 흘러가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고통.

그녀들이 남길 슬픔.

그것은 아직 남아있는 내 인간성의 마지막 조각을 아프게 한다.

***

“또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지.”

리안은 다른 자신을 향해 물었다.

“너는 여기가 아니면 그…… 영혼의 형상으로밖에 있을 수 없는 거지?”

‘하얀 괴물’이라고 말하려다 리안은 말을 돌렸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라 해도 그렇게 함부로 부르고 싶진 않았으니까.

다른 리안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거 말이야,”

리안이 말하는 ‘그거’는 환상 속에서 봤던 견하의 죽음 이후, 그 상처에서 튀어나왔던 괴물의 촉수였다.

“너도, 슬펐던 거지?”

“또 실패다, 라는 허망함에 가깝지 않았을까.”

세계와 세계를 건너, 시간과 운명을 넘어 견하를 다시 만난다. 그러나 이미 인간의 육신을 버리고 하얀 영혼 덩어리가 되어버린 그녀가 견하와 직접 이야기할 방법은 없었다. 꿈을 통한 암시라면 모를까.

최소한 이렇게 ‘같은 존재’와 접촉하거나, 세계의 틈 사이를 관망할 수 있는 존재 앞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것은 두 미리안이 나누는 마지막 대화일 터.

리안은 다른 리안을 보며 말한다.

“아직, 생각만 해본 가능성이 하나 남아있어.”

두 사람의 시선이 아즈텍 대륙의 하늘로 향했다.

두 미리안은 일단 지켜본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꿈틀거리던 검붉은 하늘을 찢고, 마침내 혁세주가 모습을 드러낸다.

“칸발리크 때와는 비교도 안 되잖아…….”

리안의 중얼거림처럼, 그것은 칸발리크 사태 때보다 더욱 거대했다.

도시 하나 면적만큼 모습을 드러냈던 때와 달리, 이제는 대륙 하나 정도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으니까.

저것이 멸망한 행성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두 행성의 중력이 충돌한다.

물체들이 지면에서 약간씩 떠오르나 싶더니, 도로가 들썩이고 건물이 깨져나간다.

영혼을 향한 갈망의 본능 역시 마지막 방어선이 깨져버렸다.

너도나도 짐승처럼 고개를 쳐들고 혁세주를 찬양한다. 그를 닮으려 한다. 파멸한다.

대륙 단위로 이런 일이 벌어지면 마침내 붉은 하늘이 지구 전체를 뒤덮는다.

혁세주가 지구와 포개지듯 낙하한다.

혁세주는 지구를 부수는 게 아니라, 큰 물방울이 작은 물방울을 빨아들이듯, 지구를 자신의 일부로 삼는다.

그렇게 또 하나의 세계가 멸망한다.

종말.

영겁 반복되는 종말의 한 장이다.

“시간이란 참으로 미묘하지.”

음울한 얼굴로 마르코 폴로는 두 미리안 앞에 나타났다.

“알겠지만 이건 이대로 ‘내버려 두었을 경우’ 맞이할 종말이다.”

“아직 기회는 있단 말이지.”

리안은 다른 리안에게 다가가, 끌어안았다.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견하를 부탁해.”

“이봐…… 무슨……?”

지금 리안이 하는 생각만큼은 다른 리안이 읽지 못한다.

“꽤 오래 생각해 왔던 건데.”

다른 리안과 마르코 폴로를 보며 씩 웃는다. 하지만 그 웃음은 흔들리고 있다.

“마지막 변수가 있어.”

“너 설마…….”

“견하를 카라코룸에서 멀어지게 하고, 권력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면, 다른 요인을 제거하면 돼.”

항상 리안과 함께 있다가 죽음을 맞이했던 견하.

‘리안이 있다’는 조건 자체를 없애는 것만큼 그 상황을 피할 확실한 방법이 있을까?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리안은 마르코 폴로를 향해 섰다.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다.

견하가 사랑하는 표정.

“자, 이제 뭘 하면 되지?”

***

붉은 공간 안 다이온군과 멕시카군, 양측의 이단 전력은 무력화되었다. 전투 불능이다.

이는 견하도 예외가 아니었다.

리안이 견하의 갑옷에서 손을 떼자, 그것은 증발하듯 사라졌다.

완전히 지쳐버린 견하의 모습이 드러난다. 상의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기계처럼 변해버린 왼팔이 완전히 드러나 있다.

쓰러지려는 그를 리안이 몸소 받쳤다.

왈칵 끼치는 그의 땀 냄새. 피부의 따스함. 심장의 고동.

이 모든 것이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이제 다시는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다.

“누나……?”

전에 그렇게 충돌했던 게, 마치 먼 옛날의 이야기라는 듯 견하는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견하, 잘 들어.”

울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목소리는 어느새 울먹이고 있다.

“내 모든 걸 맡기고 갈게. 잘 할 수 있겠지? 잘 할 수 있을 거라 믿어.”

“누나…… 무슨 말을……?”

“‘사람’으로 살아 줘.”

아, 어느새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버렸네.

리안은 입을 맞춘다. 더는 놓지 않겠다는 듯 견하의 목을 잡고, 길게.

그러나 그 감미로움조차 슬픔을 가리지 못하고, 아쉬움은 다가오는 때를 멈추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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