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의 마지막 조각(23)
일본열도 전체가 멕시카에 넘어간다면, 그건 단순히 고려 본토, 특히 삼한반도가 위협당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물론 최대의 걱정거리는 일본열도가 다이온을 타격하는 불침항모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외에도 멕시카 함대에 다양한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된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우리가 멕시카의 일본열도 장악을 방관할 경우 멕시카군은 일본의 동맹인 다리다, 류큐, 아이누 역시 공략할 것입니다. 멕시카가 일본열도를 장악한 상황에서 이 공략을 막기란 무척 곤란합니다. 해상방위동맹의 공략이 마무리되면 우리의 동쪽과 남쪽 바다는 멕시카 해군에 완전히 장악당하고 맙니다.
결단을 요구하는 자세한 ‘예측’이 덧붙여졌다. 리안의 머릿속에서는 그 예측이 말하는 대로 멕시카의 세력선이 지도 위에 그려진다.
-일본공화국 정치의 특수성으로 인해, 다이온 연방 가입을 바라는 세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들은 일본이 현 정치체를 유지한 상태로는 전쟁에서 승기를 잡기란 어렵다 보며, 정권 장악을 위한 우리 측의 지원을 절실히 바랍니다.
그래봤자 결국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 좀 쥐어보려는 역적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저쪽에서 우리 군을 맞이할 준비는 마쳤습니다. 상륙전의 어려움을 감당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겠다고 치졸한 수단도 가리지 않은 지도자로 역사에 남는다, 라.”
더러운 수단을 쓰는 건 멕시카도 마찬가지다. 리안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행동하면 너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다’라는 식의 거짓말을 전혀 믿지 않았었다.
상대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이쪽만 점잖게 있으면 그건 고결한 게 아니라 병신이다.
전쟁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먼저 침략해온 쪽이 확실히 더 나쁘다. 전쟁은 인간을 대량으로 살해하는 악의 구렁텅이이지만, 확실히 침략국이 피침략국보다 더 악하다고 말할 수 있다. 피침략국은 침략국보다 선하다.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그것은 절대로 뒤집을 수 없는 사실이다.
“불가피하다고 변명해도 이번엔 이쪽이 침략자가 된다.”
이렇게 일본의 뒤통수를 치면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을까.
국제사회는 다이온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어쩌면 이 결정으로 함께 멕시카의 침략에 맞설 수도 있었던 잠재적 동맹이 모조리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
신뢰할 수 없는 나라가 되고 만다.
다른 나라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멕시카와 다이온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는 로마 제국은 어떨까.
신수덕이 거기 있다가 들어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벨리사리우스가 말한 ‘동맹’은 믿고만 있을 수가 없다. 그들 역시 명분만 잡았다 하면 배신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세련은 좀 더 직접적인 위협이다.
만약 전쟁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 티베트를 중립 지대로 둔다는 약속을 깨고 북진할 가능성이 있다.
그…… 혁명정신재건위원회인지 뭔지 하는 집단의 우두머리 하르샤도 나름 급한 사정이 있으니까 말이다.
아슬란을 쿠데타로 몰아낸 후, 세련을 자기 발밑에 제대로 두려면 뭔가 성과를 내야 한다. 그 성과로 가장 화려하면서도 당장 결과를 보기 편한 것이 바로 전쟁이고.
군의 주력이 수도권, 나아가 동쪽 섬나라에 묶인 상황에서 다이온이 세련의 티베트 국경 돌파를 저지할 수 있을까.
저지는 못 하고 새로운 전쟁에 휘말려 드는 것은 아닌가.
회원국, 역외사국, 그 주변국들까지 위협하는 상황이 되면 다이온은 맹주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두 번째 전선을 열 수밖에 없다.
이중전선.
그 어떤 나라도 피하고 싶어 하는 상황.
이런 변수들이 리안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오간다. 그러나 그녀가 망설이는 사이에도 시간은 간다.
빠른 판단을 했다고 해서 남는 시간이 어디로 사라지지 않듯, 늦은 판단을 했다고 모자란 시간이 보충되진 않는다. 시간은 빠른 자에게 딱히 더 큰 이익을 주진 않지만, 늦은 자에게는 확실하게 불이익을 준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믿어볼까. 일본이 멕시카군의 상륙을 저지할 수 있다고. 우리의 지원을 조금 받으면 육상전에서는 승리할 수 있다고.
그러나 그 믿음이 배신당했을 때의 피해가 너무 막심하다.
초조감이 만들어낸 오판일지도 모르지만, 리안은 지금 오판이든 뭐든 ‘해야만’ 한다.
“외무장관 조유관과 전쟁장관 강태훈에게, 작전 결행을 승인한다.”
이제 더는 거둘 수 없는 명령이 리안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흘러 내려간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리안은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계략과 멕시카의 일본인들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이 말 한마디로 날려버린다.
“이런 상황까지 몰고 오질 말았어야지. 해전에서 이기든지, 아니면 동맹을 똑바로 고르든지.”
***
일본공화국은 딱히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교토에 두었다.
군주가 있던 시절부터 수도이기도 했고, 몽골 역시 이곳을 함락시킨 후 학살을 저지르긴 했지만 같은 자리에 그대로 일본행성(日本行省)을 세웠다.
일본행성이라는 몽골의 지방정권을 무너뜨린 뒤, 신생 공화국은 그 행정 체계를 그대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기에 계속 교토를 수도로 삼았다.
지도로 일본열도를 내려다보면, 이른바 혼슈라는 거대한 섬이 바로 교토 인근에서 잘록해진다.
사태를 최대한 빨리 종결시켜야 할 쿠데타 세력이 다이온군을 맞아들일 지점이 바로 이 잘록해진 부분, 와카사만이다.
사실 다이온 연방 가입을 추진한 세력도 이 정도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전까지는 많이 망설였다.
그래서 전에는 연방 가입이 아니라 연방과의 ‘동맹’에서 그치자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일본공화국의 ‘답답한 정치’는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불리한 전황만 질질 끌고 있었다.
속속 들려오는 태평양 섬들의 함락 소식.
결전을 만류하기만 하는 정부.
슬슬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데, 결정적인 패배가 그들을 강타했다.
-이오지마에 멕시카 해군의 대규모 공격이 임박!
본토의 남쪽 바다에 있는 중요한 섬.
이 섬이 넘어가면 남쪽 바다로 연결되는 주요 해로가 끊기는 것은 물론, 멕시카가 본토로 침공해 올 유용한 거점까지 내주고 만다.
그제야 일본 정부는 아껴두기만 했던 함대를 출동시켰다. 그 느린 판단마저도 다이온 연방 ‘합류파’의 불만을 샀다.
어쨌든 함대는 남쪽으로 침로를 잡고 항해해, 이오지마 인근에서 멕시카의 대함대와 맞닥뜨렸다.
그간 양측의 항공모함이 굉장히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서로 견제만 했다면, 이번 이오지마 해전은 확실히 상대 함선을 격침시킬 각오로 거리를 붙여서 함재기를 출격시켰다.
여기서 일본 해군은 멕시카 해군의 기만술에 놀아났다.
이오지마를 점령할 대규모 상륙 부대를 호위할 함대라고만 본 것이 첫 번째 오판이었다. 물론 상륙 부대가 오긴 했다. 일본이 덜컥 물어버렸던 멕시카군의 통신도 그런 내용이었고.
하지만 멕시카 해군은 철저하게 일본 해군을 격멸한 뒤에 느긋하게 상륙작전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계속 일본 함대, 특히 항공모함에 맞춰져 있었다.
일본 해군의 두 번째 오판은 멕시카 대함대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이오지마를 타격하는 걸, 본격적인 공격 개시라고 봤던 것이다.
멕시카 해군은 이 기만술을 통해 이오지마 쪽으로 일본의 함재기들을 유인하는 한편으로, 주력 대부분을 일본 함대 쪽으로 보냈다.
육지를 공격할 때와 함선을 공격할 때 폭격기의 움직임은 전혀 다르다.
일본의 전투기들이 엉뚱한 고도에서 멕시카의 폭격기들을 찾는 사이, 멕시카의 폭격기들은 사각으로 접근, 어뢰들을 떨어뜨렸다.
기함으로 쓰던 항공모함을 비롯해, 일본공화국 해군이 자랑하는 모든 항공모함이 불타올랐다.
제독이 기함을 옮기면서 함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멕시카의 잠수함이 물밑에서 그들을 하나둘 사냥했다.
이오지마로 헛걸음했던 전투기들이 돌아와 뭐라도 해보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그들은 착륙할 발판인 항공모함을 잃고 바다에 불시착하거나, 멕시카의 전투기에 두들겨 맞고 격추되었다.
좀 더 영리한 조종사들은 그대로 이오지마의 비행장에 착륙했지만, 직후 멕시카의 상륙작전이 시작되면서 역시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 말려들었다.
결과적으로 함대는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본토로 퇴각했고, 이오지마는 멕시카의 손에 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혼비백산해버린 정부의 작태를 보면서, ‘합류파’는 쿠데타를 최종적으로 결심한 것이다.
***
멕시카와의 결전을 위해 대부분의 함대를 동쪽과 남쪽 바다로 돌렸기에, 서쪽과 북쪽, 즉 다이온 방향의 바다는 거의 비워둔 채였다.
소수의 경비선이 그 주변을 떠돌고는 있지만, 그마저도 상당수가 ‘합류파’ 정치인들에게 회유당했다.
설령 그들이 회유를 거부했더라도, 경비선 따위로 본격적인 침공을 막을 수는 없었을 테지만.
경주에서 출발, 일본 해군의 눈을 피해 동북쪽으로 다소 빙 돌아갔다가 남쪽으로 급선회.
다이온군을 가득 실은 상륙정이 와카사만의 해안에 닿았다.
침묵 속에서, 그들은 내려섰다. 어촌 마을에서 그들을 목격하긴 했지만 신고를 받은 경찰이 뭔가 해볼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경찰이 기껏 군부대에 알린다 해도 이 정체불명의 군대를 막으려고 움직이는 부대는 없을 것이었다.
합류파의 쿠데타 준비는 완벽했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현 정권의 무능과 혼란이 쿠데타를 완벽하게 만들어주었다고 보는 게 옳았다.
다이온군은 마치 익숙한 절차를 따르듯 준비된 차량에 탑승, 불과 수 시간에 걸쳐 일본의 수도 교토에 진입했다.
일본 정부는 이오지마 해전 패배 직후, 어느 정도 혼란이 가라앉자 적의 상륙을 막을 방안을 열심히 짜냈다.
교토 주변으로 혼슈가 잘록해지는 건 북쪽 해안만의 일이 아니었다.
서쪽 오사카만으로도 해안선이 움푹 들어왔고, 동쪽 이세만으로도 해안선이 들어와 있었다.
정부는 이 두 만을 유력한 적의 상륙 목표로 보고 방어를 강화하던 중이었다.
합류파는 바로 이 틈을 노려, 북쪽에서 찌르고 들어간 것이다.
합류파에 동조하는 군부대가 다이온군과 합류.
방송국과 주요 기관을 장악해나갔다.
수뇌부가 도망칠 틈도 없었다.
기존 정부는 전쟁에서도 무력했듯이, 쿠데타군에게도 무력한 모습만 보인 채 순순히 권력을 양보했다.
일본공화국 신정권의 방송이 전국으로 퍼져나간다.
“……코앞에 닥친 조국의 위기를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바, 군사 및 외교 전략상의 대전환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서 부패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권에서는 불가능한 행동에 나서기 위해, 우리는 불가피하게 혁명을 단행하였습니다……”
리안은 그 방송의 번역본을 읽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쓴웃음을 지을 여유도 잠시, 곧바로 그녀의 휴식을 빼앗는 소식이 동명의 사령부로 들어왔다.
“서남방면군이…… ‘문 너머’로 진격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