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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07화 (507/541)

인간성의 마지막 조각(22)

문 너머에서 포격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에 멕시카의 최고지도자 쿠에츠팔린은 당황했다.

“……아니, 예상 못 할 일은 아니지.”

인간이 생존할 수 있도록 변화시킨 공간이다. 인간이라는 측면에서는 저들도 자신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저들도 이 안으로 들어오려고 시도할 수 있다.

각종 무기 역시 문을 잘만 통과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다이온군은 정석적으로 포격을 퍼붓고, 그 후에 육군 및 공군을 진입시키는 전략을 세웠을 것이다.

“뻔한 것 외에 어떤 방법이 가능하단 말인가.”

다이온측은 문의 구조를 아예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멕시카의 수도 쿠아우테목을 타격할 수 있을 거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들 눈앞에는 대륙 하나 이상의 넓이를 자랑하는 광막한 붉은 대지가 기다린다.

멕시카군은 문 너머에서 들어오는 다이온군의 포격이 어디 떨어지는지 가늠하면서 거리를 조정한다. 이후 충분한 제압이 이루어졌다고 착각한 다이온 육군이 머리를 들이밀면 사정없이 두들겨버릴 준비를 하면서.

“설령 쿠아우테목으로 바로 오는 게 가능해도 좁은 구멍에서 개활지로 나오는 형세라는 건 변함이 없다. 그러면 어떤 꼴이 되는지도 모르는 건가.”

쿠에츠팔린은 비웃었다.

다이온군이 무의미한 전력 낭비를 해주는 동안, 멕시카의 주력은 일본공화국과 그들이 만든 ‘해상방위동맹’이라는 장난을 분쇄하면 된다.

신병기가 이 전쟁을 결심하게 했지만, 자신은 신병기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검증된 전략, 안정적인 전략을 쓴다고, 쿠에츠팔린은 자부했다.

하지만 그런 자부심도 전략이 먹혀들어 갔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전략이 어긋나버리면 자부심은 멍청이의 자화자찬으로 끝나고 만다.

또 한 가지 오판이 있다면 쿠에츠팔린은 수도 쿠아우테목에만 머물며 ‘문’ 쪽 전선 시찰을 소홀히 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는 ‘문’을 통한 공간도약 전선뿐만 아니라 태평양 해상의 전선도 감독해야 했으니 수도에 머문 판단을 나무라는 건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문 안쪽 붉은 세계를 들여다보고,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쿠에츠팔린을 뒷골목 극우 폭력배에서 국가의 수장까지 끌어올렸던 직감이 다시 한번 맹위를 떨쳤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쿠에츠팔린은 수도의 집무실에서 전쟁을 지휘했기 때문에 보고를 받는 게 다소 늦었다. 이 지체는 통신과 보고 체계를 아무리 개선해도 ‘의사소통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상’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지만, 치명적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문이 좌우로 넓게 ‘벌어졌다’.

지평선을 가득 채울 정도로.

“저쪽도…… 문을?”

신수덕이 고려로 돌아갈 것이라고는, 또 가서 살아남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쿠에츠팔린은 보고를 받자마자 굳어버렸다.

거짓 보고가 아닌지 의심부터 들었다.

그러나 간신히 부여잡은 이성은 거짓 보고를 올릴 상황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전선에서는 지금도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이다.

방심하면 전선이 뚫리고 구축한 시설이 쓸려나간다.

왜냐하면 적은 멕시카군이 지정한 ‘선’을 따라 들어온 것이 아니라, 광대한 ‘면’에 100만 대군을 밀어 넣어 재래식 전쟁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멕시카가 신비롭고도 불길한 신무기의 이점을 잃은 상황.

물론 멕시카 자주국의 군대도 내전의 경험을 쌓았다곤 하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붙어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애초에 다이온을 타격하던 전력은 육군 중에서도 극히 일부고, 대부분은 점령한 섬 곳곳에 흩어져 일본 본토 상륙 작전을 준비 중이지 않나.

전국 곳곳에 일단 동원만 해둔 국토방위군을 수도로 집결시킬 수밖에 없다.

수도의 병력은 있는 대로 긁어모아 붉은 세계로 보내고.

쿠에츠팔린은 당황한 것과는 별개로 이런 계산을 한다.

“이번 공세를 막아내면 전쟁은 완전히 우리 쪽으로 기운다! 제군의 죽음을 불사한 분투가 필요한 시점이다! 온 힘을 다해 응전하라!”

***

“정지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그것이 견하의 독단을 가능케 한 맹점이었다.

방면군 사령관이 된 시점에서 일정 전선에 대한 상당한 재량권이 주어진다.

방어에 어떤 작전을 쓸지, 어떤 식으로 공세에 들어가 전선을 안정시킬지는 순전히 견하의 책임이었다.

권리만큼 책임이 부여된다고 하지만, 반대로 책임만큼 권한도 부여되는 법이다.

견하가 카라코룸의 최고사령부에서 받은 명령은 칸발리크 방어다. 즉 ‘칸발리크 방어에 필요하다’라는 명목을 내세우면 웬만한 일은 다 가능하다는 말이다.

물론 최고사령부에 앉은 김천열이나, 태사라는 정치적 지위 때문에 동명으로 잠시 나와 있는 미리안이 ‘칸발리크 방어를 위태롭게 한다’라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그래서 정지 및 철수 명령이 떨어진다면 따라야겠지.

하지만 김천열이든 미리안이든 당장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시간이 든다.

‘아직 정지명령이 떨어지지 않은 상황’을 활용해 결정적 승리를 거둔다.

명령이 떨어져도 ‘그 명령에 따를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핑계로 시간이 좀 더 벌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우리도 교두보 정도는 마련해야 한다.”

참모들을 돌아보며 그렇게 말한다.

그들은 손발이 묶인 채 장갑차에 함께 탄 신수덕을 흘끔거리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중에는 마침내 공을 세울 기회가 왔다는 기대로 가득 찬 사람도 있다.

견하 역시, 이번 기회에 자기 휘하 군을 확실히 장악하리라는 기대를 한다.

동시에 ‘장교’ 참모들을 거느려 보는 감각에서 신선함을 느낀다. 이들은 지금껏 활용해왔던 정치감독청의 측근들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다. 정치감독청에는 이익서처럼 군인 출신도 있었지만, 병사의 시각과 장교의 시각은 다르다.

-이런 자들을 쓰는 것도 그렇지만, 또 다른 즐거움도 있지.

견하는 지휘 중에도 계급이 낮은 장교들을 면밀히 살폈다.

특히 ‘신진’이라 불리는, 선출 장교들을.

이들 중에 쓸모가 있다 싶은 사람은 좀 더 복잡한 임무, 더 큰 책임을 지워보고 그에 따라 능력을 드러내고 성장하게끔 한다.

죽어버리면 그것대로 아쉬운 일이지만 어쨌든 살아남은 놈들은 잘 길러서 10년 뒤에 충직한 친위 세력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계산도 해 본다.

포격 소리가 가까워진다.

이미 붉은 세계로 진입한 견하와 참모들은 그 자리에 사령부를 차리기로 한다.

하늘과 땅 모두 시뻘건데 뒤를 돌아보면 기묘한 푸른 단면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들이 들어온, 확 열어젖힌 문이다.

천막이고 뭐고 없이 일단 통신장비며 뭐며 주변을 채운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한 참모가 입을 열었다.

“각하, 사령부를 지나치게 전선에 붙이시는 게 아닌지-”

“아, 그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는다.

사실 이 작전은 참모진에서도 반대가 꽤 거셌다.

붉은 세계는 바다나 강, 식물 같은 게 없다 뿐이지 지형이 모조리 평탄한 황야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광막한 평원도 있지만, 계곡과 언덕과 산도 있다.

심지어는 문명의 흔적처럼 보이는 철골 구조물도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지형에 대한 사전 정보가 매우 빈약하다는 것.

이 세계를 의식을 통해 접촉해 보았던 루우나 견하의 진술만으로는 전략 전술의 자료로 활용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상식을 뛰어넘는 공격에는 상식을 뛰어넘는 반격을 해야 한다’라는 견하의 고집에 따라 강행된 공격이었다.

“무슨 말씀을……”

참모의 말은 ‘어떤 소리’ 때문에 끊긴다.

전쟁 경험이 있는 장교들은 안다.

그것은 폭탄이 아주 절묘한 각도로 그들을 향해 떨어질 때 나는, 공기를 가르는 소리다.

모두가 혼비백산해 엎드리는 가운데, 견하 혼자 하늘로 손을 뻗었다.

굉음, 진동.

눈을 뜬 참모들이 본 것은 찢겨나간 하얀 살점들과 피의 비다.

견하는 왼쪽 소매를 완전히 뜯고, 붕대를 푼 채 금속질의 둔탁한 빛을 내는 왼팔을 본다.

그것이 순식간에 피에 젖어 번들거린다.

하얀 살점들이 추적추적 붙었다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각하, 이건 대체……?”

“제가 소환한 겁니다. 전에는 이 정도로 강하진 않았는데, 이젠 포격 정도는 막을 수 있군요.”

왼팔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이 전장은 또 다른 것을 시험해 볼 자리이기도 했다.

이단으로서, 자신의 인간성을 완전히 망가뜨릴 것을 각오하고서 그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보는 자리.

하얀 괴물의 피로 못 볼 꼴이 된 참모들에게, 견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의 작전은 저를 전략 병기로 활용한다는 관점에서 수립해주시기 바랍니다.”

***

악몽을, 꿨다.

리안은 흠뻑 땀에 젖어 일어났다. 베개와 침대마저 축축할 정도였다. 목이 타는 것 같아 머리맡에 둔 물을 들이켰다.

악몽을 아예 안 꾸는 건 아니다. 압박감을 느끼면 그녀도 종종 악몽을 꾼다.

다만 최근 몇 년 동안은 등과 팔을 쓸어주며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사람이 있었을 뿐.

그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없고, 그와의 관계가 회복될지도 알 수 없다. 그 사실이 슬프게 리안의 가슴을 두들긴다.

그러나 그 전에, 평소와는 다른 악몽의 충격이 리안을 떨게 했다.

정신을 차리니 자신은 잠에서 깬 직후부터 계속 헐떡이고 있었다. 일단 호흡을 진정시킨다.

다른 꿈과는 달리 이번 꿈은 모호한 형태로 머릿속에서 흘러나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또렷해졌다.

붉은 세계를 보았다.

자신은 거기서…… 태어났다.

눈을 떴다.

섬광.

뜨거움. 온몸을 태우고 태워, 몸 안쪽까지 멈추지 않고 파고 들어가며 태우는 뜨거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죽음.

죽음이 반복된다.

리안은 명확히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이었다고.

대체 무엇이었을까 골똘히 생각에 잠기려는 그 순간, 긴급 연락이 들어왔다.

깨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리안은 속옷을 갈아입고, 의복을 갖춰 입었다.

***

“일본공화국 함대결전에서 대패! 멕시카군 상륙 임박!”

악몽의 생생했던 느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막막함, 바닥이 사라져버린 듯한 좌절감이 리안을 덮친다.

“그게…… 무슨…… 어떻게……”

더듬더듬 말하려다 리안은 고개를 털어버렸다.

그걸 만족스럽게 답해줄 사람들은 당장 주변에 없을뿐더러, 어떻게 졌는지는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일본이 해전에서 참패했다’라는 사실 그 자체.

카라코룸의 사령부로 돌아가면 더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순 있겠지만 자신은 지금 동명의 안정을 위해 나와 있다.

사실은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을 판단의 재료로 삼아라.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일본공화국 측에서는?”

동명까지 데려온 몇몇 장군들로 구성한 참모진에게 묻는다.

“본토 결사항전에 들어가기로 결의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딜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외무성이나 전쟁성에서 따로 연락이 온 건 없나?”

‘따로 연락’이라는 것은 전에 검토를 명령했던 건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 내 친원파와 결탁, 다이온군을 상륙시켜 일본열도를 주전장으로 삼는다는…… 리안의 결단을 필요로 하는 그것.

결단을 요구하는 문제는 턱밑에 들이밀어졌고, 이젠 어떻게 피할 수도 없다.

돌이킬 수 없는 횡포, 비난을 떼어낼 수 없는 악행으로 남을 행위.

“결행한다면, 상륙할 지점, 협력할 인사의 명단까지 나와 있습니다. 작전을 실행할 부대는 경주 일대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오직…… 합하의 명령만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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