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의 마지막 조각(21)
하나의 신화 체계를 공유하던 유목민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 동서로 갈라지는 갈림길 위에 섰다.
서쪽으로 간 사람들은 페르시아인이 되었다.
동쪽으로 간 사람들은 바라트인이 되었다.
형제들은 헤어질 때, 각자 마음에 드는 신을 골라 새로운 땅으로 향했다.
어떤 자는 다른 형제의 악한 신을 선한 신이라 반대로 해석해 받들기로 했다.
어떤 자는 신들이 맡은 역할을 다르게 해석했다.
한 형제가 자기 신을 ‘전쟁의 신’으로 모신다면, 다른 형제는 다른 신을 ‘전쟁의 신’으로 모셨다. 또 다른 형제들은 그 신을 ‘불의 신’으로 부르거나 ‘태양의 신’으로 불렀다. ‘태양과 불과 전쟁과 약속의 신’이라는 식으로 아예 모든 역할을 인정해버리는 형제도 있었다.
흩어진 형제들은 자신들이 도착한 땅의 토착민들과 섞여 살면서, 그들의 신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삶도, 신도 섞였다.
하지만 서쪽과 동쪽으로 헤어진 형제들이 원래는 하나의 신화 체계를 따랐던 흔적, 갈라진 두 신화 체계의 쌍둥이처럼 닮은 구석은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
“어딘가에 문을 여는 신이 있다면, ‘그 반대쪽에 다른 문을 여는 신’이 있다고 가정할 수도 있지 않겠나.”
여기에 해법이 있다고, 신수덕은 말한다.
“페르시아에서 발전시킨 주르반의 개념을 상대하려면, 반대로 힌두, 그러니까 바라트 아대륙으로 흘러 들어간 쌍둥이 신앙을 쓴다는 건가.”
“그렇다네.”
신수덕은 정답이라는 듯 끄덕였지만, 견하는 그 말에 그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힌두교 신앙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신이 있었나?”
주르반이 시공간의 신이어서 이번 공세에 쓰였다면, 힌두교에서도 비슷한 신의 개념을 활용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역할이 아닐세.”
“그러면?”
“대칭되는 신화의 누구든 적용해도 큰 상관은 없다는 말이지. 이를테면 파괴의 신이라는 시바도 상관없고,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비슈누도 좋지. 전쟁의 신 인드라도 괜찮고 다만,”
신수덕은 인드라에 해당하는 페르시아의 전쟁 신 ‘베레트라그나’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같은 체계 안에 있는 건 안 되네.”
“어째서 그렇지? 주르반은 시공간의 신이어서 이번 공세에 활용된 게 아닌가?”
“시공간의 신이라고 사람들이 ‘믿는 개념이어서’ 동원된 거라네. 이 점을 착각해서는 안 되네, 주견하 대장.”
신수덕은 다소 굳은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파멸인 및 혁세주 사태가 일어났을 때 인간을 미치게 하고, 인간의 몸뚱어리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요인은 파멸인이나 혁세주가 아니네.”
물론 견하도 멍한 얼굴로 듣고만 있진 않았다. 그는 신수덕을 앞질러 정답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했다.
“영혼을 원하는 마음, 신을 믿고 신에 가까워지길 바라는 마음……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곧 변화를 일으켰지.”
“사람의 몸에만 변화를 일으키는 게 아닐세. 이 점을 잘 짚어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네만 파멸인은 개인의 몸을 구성하는 이치만 변한 게 아니란 말이네.”
“그 파멸인이 존재하기 위한 세상의 규칙도, 미세하게 변한다.”
“그 변화가 누적되어 세상의 경계가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면 마침내 혁세주가 문을 열고 찾아오는 게지.”
“우리에겐 주르반처럼 시공간을 담당하는 신의 개념이 필요한 게 아니라, 주르반의 반대쪽에 있는 개념을 활용해야 한다는 거군.”
“정확하게는 ‘주르반을 포함한 조로아스터교 신화 체계 전반의 반대’를 찾아야 하지. 개념은 체계 속에 있네, 주견하 대장. 인간이 상상해낸 신이든, 짐승으로서의 신종이든 논리적 체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어쨌든, 주르반에서 비롯된 이 사태를 끝내려면 체계 자체를 무너뜨려야 하네.”
“아무 신이나 상관없는 건가.”
“글쎄. 우리는 단순히 ‘문을 닫으려는’ 게 아니라 반격까지 나설 테니까 좀 더 전면적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전면적으로. 그 말에 견하는 다시금 의혹에 찬 시선을 신수덕에게 보낸다.
사람을 속이려는 허풍쟁이의 개수작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힌두 신화 체계 전반을 끌어와 보기라도 하려는 건가?”
“그쯤은 해야 하지 않겠나?”
“가능은 하고?”
견하가 그렇게 되묻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라트는 공산국가다. 국가 단위로 무신론을 내세우고 인민들에게도 강요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신’, 그것도 다신교의 신들을 주축으로 한 연구가 살아남았을까? 실제로 바라트에서는 인민의 사고력을 저하시키고 고혈을 빨아먹는 미신을 뿌리 뽑겠다면서 힌두교를 비롯한 아대륙 내 여러 종교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탄압을 피해 망명한 사제들, 열성적인 신자들의 입을 통해 그 가혹함은 전 세계에 잘 알려졌다. 그런 땅에서 과연 힌두교에 기반한 이단 기술이니 파멸인, 혁세주 연구가 잘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견하도 리안도 신을 믿진 않는다. 루우도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 신자이긴 하지만 그건 대외적인 모습일 뿐, 실제로는 무신론적 냉소로 종교를 대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이라는 게 사람들의 관념 속 존재거나 끔찍한 괴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쩔 수가 없다.
인간이 신을 믿어봤자 돌아오는 게 기형적 변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하지만 정치가들은 신에 대해 냉소적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종교 자체를 금지하진 않았다. 그게 통치에 더 유용한 면도 있고, 또 종교는 이단 연구를 발전시키는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견하는 모든 계층에 무신론이 강요되는 바라트 같은 사회는 이단 연구에서 불리하리라 생각했다.
“그건 편견이라네. 자네 논리대로라면 신앙에 있어서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절실했던 아라비아 칼리프국이야말로 최고의 이단 기술을 갖췄어야 하지 않나?”
광적으로 신의 절대성을 믿고,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그 믿음을 강요한 국가.
“그러나 지난 세계대전 때도 그렇고, 이번에 무력하게 로마 제국에 합병당한 걸 생각해보게. 이 나라는 늘 이단 전력의 부족이 발목을 잡았네.”
종교적 열망의 폭발, 그에 따른 대규모 인력과 물자 동원, 군벌들의 규합 성공…… 이 모든 것이 ‘다르 알 이슬람’이 세계대전 초기에 거둔 승리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 외에는 없었던 신흥 이슬람 제국은 결국 여러 전장에서 패하며 아라비아 반도로 밀려나고 말았다.
“뭐, 그들도 이단을 ‘신의 검’이라면서 축복받은 존재로 대우했던 적이 몇 차례 있네. 문제는 이단을 연구해 그 활용법을 확장하고, 발굴하려면 ‘이슬람 너머의 지식’이 필요했단 말이네.”
다른 나라들은 ‘이단’이란 이름으로, 기존 질서에서 어긋나지만, 예외적인 것으로라도 취급해서 어떻게든 끌어안고 갔다. 그러나 다르 알 이슬람은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를 드러냈다.
“‘지혜의 문은 닫혔다’고 옛 이슬람 신학자들이 선포했던 게 독으로 돌아온 게지. 인간의 지혜는 한계에 다다랐다. 신이 허용한 인간의 지혜는 여기까지다. 더 배울 것이 없다. 지식은 지금 있는 것으로 완전하다.”
이단뿐만 아니라 항공기나 전차, 전함 등의 병기에서도 이런 문제는 그대로 적용되어,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전쟁이 끝나고선 더 심각했다네. ‘우리는 왜 패배했는가’라는 물음에 ‘기술이 부족해서’라는 답을 피하고 ‘신을 제대로 섬기지 않아서’라는 오답을 내놓았지.”
“그런 사고로 흘러가는 데에는 로마 제국의 봉쇄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볼 수도 있네. 아라비아 칼리프국이 고리타분한 사고에서 벗어나서 종교와 과학의 타협점이라도 찾아보려면 외부에서 ‘자극’을 받아야 하는데, 로마 제국이 그걸 원천 봉쇄해버렸으니.”
신을 믿는다는 행위가 오히려 목을 죄어오는 아이러니.
신앙은 어떤 곳에서는 육신을 무너뜨리고, 또 어떤 곳에서는 국가의 발전을 저해한다. 물론 그들도 신이 자신들에게 영광을 나눠주어 승리한다고, 그렇게 환호하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냉혹한 세계에서는 아니다.
“‘유일신의 절대성’에 집착한 아라비아 칼리프국과 달리, 일본공화국의 경우엔 반대로 ‘신의 보편성’에 집착했지. 그것도 실패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네만.”
관념적인 역할에서 그치지 않고, 지역, 지형지물, 돌, 나무, 그냥 지나가다 보인 특징적인 무언가에 이르기까지 신이 깃들었다는 발상.
그것이 또 오히려 신, 신종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고 말았다.
“그러니 일본은 해전에서 지면 희망이 없네. 상륙전이 벌어지면 당해낼 수가 없단 말일세.”
“힌두교도 만만치 않은 다신교인데?”
“무신론적 냉소는 때로는 ‘한발 물러서서’ 종교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지.”
“보다 냉철한 시각으로 이단에 접근하는 게 가능해졌다는 의미인가.”
“이단의 초능력이 신의 축복이네 뭐네 하는 종교의 굴레를 벗어나서, 그저 ‘인간에게서 발현되는 하나의 현상’으로 취급받으면 그 연구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한다네.”
“마침내 과학이 되는 거군.”
이론적으로는 납득했는데, 라면서 견하는 말을 이었다.
“어떻게 가져올 거지? 지금 세련 정부에 협력을 요청한다고 해서 그쪽에서 순순히 ‘그러겠습니다’라고 대답할 것 같진 않은데.”
“역사란 참 아이러니의 연속이지 않나? 자네와 자네의 태사가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을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에 등장시켜준 덕분에 입국이 ‘비교적’ 자유로워졌다네.”
즉, 신수덕은 지난 몇 년 사이에 바라트에 들어가 관련 지식을 얻어왔다는 말이 된다.
“아이러니하긴 하군. 그쪽이 이야기한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는 벨리사리우스 황제와 함께 기만의 상징이 되었으니.”
“죽이려던 사람과 마주 앉아 미래를 의논하는 건 또 어떤가.”
신수덕은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견하는 웃지 않았다.
“당신 생명은 그 유용성에 따라 조금씩 연장되고 있는 거지, 사면된 건 아니야. 그 점을 착각해선 안 돼.”
“그래. 언제든 목이 떨어질 거라는 각오 정도는 해 두지.”
그렇게 신수덕과의 회견을 마치고 나온 견하는 ‘문’ 너머로 진격을 명령하기 직전, 아주 약간, 오한이 드는 걸 느꼈다.
전쟁에서 신의 가호를 빌던 시대는 아득히 멀어졌지만, 신은 다른 형태로 전쟁에 임했다.
이제 인간은 신이라는 짐승들을 사슬로 묶어 전쟁 병기로 활용한다.
이것이 어떤 결말을 불러올지도 모르면서, 견하는 진격을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