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의 마지막 조각(20)
견하의 대답은 상식적인 것 같으면서도,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연방 민의원은 바로 그 부분을 파고들었다.
“서남방면군 사령관 주견하는 지금 민의원을 업신여기는가?”
“애초에 신수덕의 입국과 체포 사실을 적극 알리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압송이 어렵다면 주견하 대장의 사령부로는 어떻게 이송했단 말인가?”
“체포 즉시 처형한다는 방법도 있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살려두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견하 대장은 혹시 다른 의도를 품고 있진 않은가? 대군을 지휘하게 되었다고 교만해진 것인가?”
말이 되고 아니고, 그러한 항의가 정당하고 아니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주견하 비판’의 배후에 선 자, 류성일의 ‘주견하를 압박한다’라는 목적만 달성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안세규는 일단 ‘신수덕 압송 권고’에만 참여한 후, 비판에는 참여하지 않고 일단 흘러가는 상황을 살폈다.
과연, 류성일은 제가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주견하를 몰아붙이는 중이다.
혹은 몰아붙이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 날뛰는 걸지도 모르지만.
류성일은 이런저런 의혹이 있는 서남방면군 사령관을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이 의견을 들고 황궁에 알현을 청했다.
***
“류성일 이 자가 결국 미친 건가?”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주변에 듣는 귀가 많으니 참는다.
루우는 류성일 이하 연판장처럼 죽 늘어선 명단을 다시 읽었다. 다들 류성일을 다음 태사로 밀 생각이 가득한 제국입헌당 내 ‘원로’들이다.
목소리를 낮춰, 중얼거린다.
“이런 행동은 문제가 많은 정도가 아니야…….”
민의원 의장이 이 정도로까지 막 나가도 되는 건가.
갑작스럽게 두통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리안은 매일 매 순간 이런 일들을 겪고 있겠지.
일단 견하가 지적한 대로, 민의원이 제기한 문제들은 실은 민의원이 제기할 문제는 아니었다.
신수덕이 체포되지 않고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다면 또 몰라도, 방면군 사령관이 ‘포로’의 형식으로 붙잡아 둔 건 딱히 문제 삼을 일이 아니다.
굳이 문제 삼겠다면 군통수권자인 태사 미리안에게 의견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절차다.
물론 견하의 말대로 신수덕에 얽힌 사건은 ‘대역(大逆)’이고, 따라서 황제가 이 사건에 대해 ‘의견을 표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주견하 자격 없으니까 폐하께서 교체해주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의 헌법, 그리고 고려의 헌법에 기초해 작성된 다이온 연방의 헌법에 어긋난다.
헌법은 이 점에서 황제의 권력이 제한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황제가 전선에 나가 지휘관처럼 행동하는 것도 특수한 상황에서 ‘눈감아주는’ 것이지, 법적으로 인정해줄 수 있는 행동은 아니란 말이다.
단순한 생떼.
혹은 미리안에게 하면 안 통할 것 같으니까 황제에게 찔러나 보는 꼼수.
그것도 아니라면 황제와 태사의 권력관계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도발인가? 일부러 논쟁과 갈등을 일으켜 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니, 류성일의 목적은 다른 데 있다.
신수덕이 견하의 손아귀에 들어가서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이 상황.
그것이 류성일의 조급증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다.
황제가 이 문제에 대해 헌법이나 태사의 권한을 무시하고 나서준다면 류성일 입장에서는 가장 좋겠지.
설령 그러지 않더라도 견하에 대한 압박으로 작용해주기만 한다면 더욱 좋다.
왜냐하면……
“……수상쩍다는 생각은 계속해 왔지만.”
루우의 의심은 안세규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가 철저히 정치적 목적으로 자신을 고려 황제에 올린 것까지는 이해한다. 루우 본인도 안세규의 그런 점을 이용해서 여기까지 올라온 거니까.
그러나 그 과정에서 리안과 손잡을 때, 안세규는 뭔가 더러운 수작을 감추려 애썼던 것 같다.
이후 안세규와 류성일 사이의 회담, 묘하게 함께하는 듯한 행보를 보면, 그들 사이에도 거래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류성일은 안세규와 무슨 거래를 했던 걸까.
“안세규가 내전에서 어떤 음모를 꾸민 게 사실이라면, 류성일도 거기에 개입되어 있을까?”
섬뜩한 가정.
허동주의 미리안 암살 시도. 허동주와 미리안이 벌인, 고려의 미래를 둘러싼 다툼…… 그것들이 모두 누군가의 농간에 놀아난 거라면?
미리안의 정당한 저항이 저항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필요했던 희생이 아니라, 그저 놀아났을 뿐인 미리안이 허동주를 급습해버린 발작적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면?
물론 미리안에게는 ‘황제를 옹립하여 제3제국 체제를 확립한다’라는 명분이 남았으니, 명분 손상은 절반에 그칠 것이다.
그래도 제3제국 체제의 정당성에 상당한 손실이 생기는 건 분명하다.
“류성일이 제국의 안정을 지키려고 저런다?”
그렇진 않은 것 같다. 그랬다면 저렇게 견하를 끌어내리지 못해서 난리를 치진 않겠지.
좀 더…… 저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려 있다?
견하를 끌어내리려 든다는 건 견하가 벌일 일이 두렵다는 말.
견하를 두려워한다는 건…… 견하의 상당히 ‘사적인’ 보복이 두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견하는 무자비한 처형인이면서, 처형을 집행할 때 꽤나 사적인 감정을 싣는 단점도 있는 사람이니까.
그것이 감정의 마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우려되긴 하지만, 당장 급한 문제는 그게 아니다.
“류성일이 견하의 사적인 원한을 두려워할 만한 일?”
설마.
가설은 생각을 중단하려는 시도를 뚫고 무자비하게 루우의 뇌리를 파고든다.
“류성일…… 견하 부모의 죽음에 관련된 건 아니겠지.”
리안과 효윤이 암살을 피해 우연히 마주한 고등학생 남자애, 견하의 집에 머무르던 밤.
암살자들이 견하의 집에 쳐들어와 양친을 처참하게 살해했다.
지금 이때까지는 그것이 허동주가 리안을 죽이기 위해 보낸 암살자들일 것이라 알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도 그렇게 알려졌다.
하지만 앞선 가설, 즉 허동주는 리안을 암살할 의도도 없었고, 리안이 무방비한 허동주를 급습한 것이 진실에 더 가깝다면…….
그렇다면, 그 암살자들은, 누가 보낸 거지?
류성일이 정말 범인이라면, 그는 죽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어떻게 죽여야 하나.
류성일을 죽이겠다고 카라코룸으로 달려올 견하를 어떻게 말려야 하나.
그로 인한 격동은, 피바다는, 어떻게 예방해야 하나.
다시 눈앞의 연판장을 본다.
가증스러운 이름들이다.
그리고 교활하다.
황제의 처지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것을 떠넘겼다.
“여기서 주견하 대장의 의사를 존중한다고 밝히면 그건 그것대로 내가 군 인사에 개입한 꼴이 되겠지.”
리안에게 가서 물으라는 것도, 마치 태사와 황제 사이에 알력이 있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기껏해야 헌법을 준수하라는 것 정도인가.”
그게 가장 무난한 대답일 테고, 류성일 일당이 헌법을 지키지 않는다며 타격을 줄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황제의 무력함’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점이 문제다. 황제가 개입하지 못하는 빈틈을 이용해 멋대로 군다면서 미리안과 주견하를 압박해 들어가겠지.
밖에선 전쟁이 벌어지는데, 안에선 권력 투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전장에 나서는 군인이 당연히 먹고 자듯이.
권력의 현장에서 투쟁이란 먹고 자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니까.
다만.
“빨리 방법을 생각해내야 해.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
제국의 안정. 권력의 확장.
리안이 바라는 것이고, 그녀가 바라는 것은 곧 견하가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거라고 믿었는데.
하지만 리안은 제국의 안정과 권력의 확장을 위해, 불필요한 것들은 묻어버렸다.
의혹, 의심, 심증…… 그 앞에서, 안정적 권력 구도를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눈을 돌려버렸다.
파고들고자 했다면 주어진 정보로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견하는 동명을 방문한 김에 곧장 정치감독청의 전, 현직 부하들을 모았다.
견하가 서남방면군 대장의 모습으로 복귀한 것만으로도, 리안의 명령 없이 그런 월권이 가능했다.
그들은 견하에게 충성한다.
이제는 견하가 그러길 바란다.
“배영훈의 행적을 조사해.”
부하들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조사에 착수했고, 견하가 칸발리크에 있는 자신의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는 보고가 먼저 올라와 있었다.
“배영훈은 태사 합하의 명령을 받고 안세규의 뒤를 캐봤던 모양이야. 안세규의 측근과 접촉했던 정황도 포착했고. 정확히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조사는 합하의 명령으로 중단되었어.”
보고 내용을 정리해주는 한재연의 눈길도, 차갑다. 도저히 부드러운 눈길과 어조로 있을 수 없었으니까.
“알려고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다는 의미군.”
삶의 의미는 오로지 리안에게 달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광대 노릇이었을 줄이야.
“……어떻게 하겠어?”
재연의 물음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행동에 나서겠는가, 침묵하겠는가.
행동에 나선다면 어떤 행동에 나설 것인가.
그 부분은 견하도 혼란스러웠다.
“나는 태사의 명령을 거부했지.”
신수덕을 죽이거나 압송할 것을 거부한 건, 항명이다.
“태사가 먼저 행동에 나설까?”
자신을 저지하러.
“아니라는 보장은 없지.”
태사가 행동에 나서기 전에 견하가 먼저 행동한다.
어떤 행동을?
류성일 죽이고, 그에게 협력하거나 그를 따르던 모든 이를 도륙 내는 것?
아니면…… 원래 목표로 삼던 ‘내무장관’보다 좀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하는 것?
쿠데타.
내란.
생각할 수도 없었던 개념들이 마구잡이로 견하의 눈앞에 튀어 오른다.
그 무렵에, 류성일이 연방 민의원을 움직여 견하를 규탄하기 시작했다.
그 뻔뻔한 수작에도 화는 나지 않았다.
오히려 유쾌했다.
“그래, 서로 감추고 재볼 것 없이 죽여보자는 의미군.”
류성일은 견하마저 죽이겠다고 나왔다.
그렇다면 기꺼이 죽여주지.
“반격을 가해볼까.”
다시금 견하의 전략 두뇌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견하가 쥐고 있는 군권, 서남방면군이라는 대병력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어야 했다.
그러려면 누구도 감히 ‘사령관 교체’ 따위의 말을 꺼낼 수 없어야 하고.
가장 좋은 방법은 어떤 사람도 부정할 수 없는 전공을 세우는 것.
“작전을 속행한다.”
다시 감옥에 끌려들어 가 있던 신수덕이 견하 앞으로 불려 나왔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감출 수 없는 유쾌함을 목소리에 묻히며 말했다.
“드디어 대장 각하께서 결심이 서신 건가.”
“아, 그래.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 전에 멕시카 새끼들부터 좀 처리해야 해서.”
견하는 턱짓했다. 군인들이 신수덕의 수갑을 풀고 옷을 내주었다. 제복은 아니었지만, 깨끗한 사복이었다.
“네놈이 제시한 방법이 확실하지 않다면 죽느니만 못한 상태로 만들어 주겠다.”
“나도 자네와 ‘해야 할 일’이 겹치는데, 그렇게 되면 곤란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