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의 마지막 조각(19)
리안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울었다.
여기서 흐느낀다 해도 그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진 않을 것이다. 리안의 붉게 부은 눈두덩을 보고 수군거리긴 하겠지만.
그러나 고통에 차서 토해내는 외침은 지나가는 누군가 들을 수도 있다. 그래서 리안은 입을 막고 어깨를 바짝 움츠린 채로 울었다.
위로해 줄 사람 하나 없다.
그러나 홀로 견뎌야 한다.
그녀에게는 아직 지휘해야 할 전쟁이 있었고, 통치해야 할 나라가 있었기에.
“나도 변했네.”
눈물을 닦아내며, 이번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예전 같았으면 우선순위가 딱 정해져 있었을 텐데.”
그녀가 아무리 견하를 사랑한다 해도 고려를, 제국을 향한 의무보다는 우선하지 않는다.
분명 그랬을 터.
그러나 함께한 시간은 그대로 감정의 무게가 된다. 그 무게는 마침내 신념의 방향마저 틀어버린다.
만약 막 사귀기 시작할 무렵 같았으면, 리안은 제국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한 견하의 목을 사정없이 쳤을 것이다.
끝내 자신도 자결하는 결말로 향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제국의 안위를 견하보다 위에 둘 수 있는가, 리안은 그 물음에 확답할 수 없었다.
“……연애 소설의 여주인공 같은 어리석은 인간이 되진 않으려 했는데.”
자신은 멍청하고 나약해진 걸까.
남자에 빠져서 국정을 소홀히 하는 머저리.
국가와 그 국가에 기댄 억 단위 목숨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에만 몰두하는 버러지.
모르겠다.
지금 자신은 아예 태사의 의무를 내팽개치고 견하의 편이 되어주지도 못하고, 국가를 위해 견하를 냉정하게 끊어내지도 못한다.
견하가 구금 중인 신수덕을 생각하면 뭐든 하긴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견하가 뭘 얼마나 지휘하고 있든 그 권한을 박탈하고 역적을 숨긴 죄를 묻고, 당장 신수덕을 끌어내어 찢어 죽일 수 있다.
그러지 못하는 건 순전히 마음의 문제, 아무것도 결론 내리지 못하는 혼란한 정신의 문제다.
견하와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는 사실에, 혼돈에 빠져버린 정신이 겹치니 그 고통이 배가 된다.
언제나 그래왔듯 그 고통을 부여잡는다.
난파선의 조각 위로 올라가듯 정신을 끌어올린다.
이런 짓이 몇 번이나 가능할까.
“세상 사람들은 나를 강철의 여자라고 부르는 것 같지만…….”
자조한다.
강철은커녕, 언제 끝장날지 모르는 위태로운 정신의 소유자이거늘.
사람들은 몇 번이고 위기를 겪으면서도 끝내 이겨내는 자신의 정신, 결코 굴복하지 않고 마침내 승리하는 의지를 칭송한다.
그러나 과연 이런 짓이 몇 번이나 더 가능할까.
권력을 향한 열망이 부서져 가는 마음을 얼마나 더 붙들어놓을 수 있을까.
리안은 점차 평정을 되찾아가면서도, 그런 불안을 느꼈다.
배영훈을 부른다. 그도 대령으로 진급했다.
“서남방면군 사령관이 직접 구금 중인 신수덕의 감시를 강화한다. 태사의 직속 부대로서, 서남방면군 사령관 주견하 대장의 의사를 존중하되 석방이나 감시 철회 등의 명령은 거부하도록.”
배영훈은 별다른 질문 없이 그대로 경례를 올리고 나갔다. 불필요한 질문이 없는 자다. 하긴 그렇기에 오래 이 정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
이렇게 일단 타협적인 조치를 취해둔다. 신수덕 문제는 따로 풀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제 눈앞의 문제는……”
소강 국면으로 접어든 전황.
카라코룸에서는 루우와 김천열이, 동명에서는 자신이, 칸발리크에서는 견하가 방어선을 최대한 전진시켰다. 제1 방어선이 뚫린 극북이 걱정스럽긴 하지만 효윤은 잘 해나가고 있다.
적은 문 너머로 나오지 않고, 다른 지역에서 새로 문이 생겨났다는 보고도 없다.
“……일본에 달렸나.”
태평양 섬들이 속속 점령되고, 점점 더 많은 멕시카 함대가 태평양으로 집결 중이라는 소식은 들었다.
일본은 다이온 연방과의 군사동맹은 거절했지만, 그래도 리안은 정말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를 대비해 일본공화국 대사를 불러 이야기를 나눠 봤다.
-함대 결전에서 패배했을 경우의 대책은 있는가.
리안의 이 물음에 일본 대사는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이었다.
마치 그걸 왜 당신이 묻느냐는 것처럼.
“결전에 패배할 때를 구실 삼아 다이온군이 상륙할 것을 여전히 두려워하는 건가.”
하지만 설령 그걸 두려워한다 해도, 적국과 동맹국은 완전히 다르다.
동맹국이 고압적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동맹 체제에 종속되라고 압박하는 것과 적국이 국토를 유린하는 것이 어떻게 동일선상에 놓일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애초에 대책 따윈 없는 걸지도 모르지. 없으니까 대사에게 이런저런 대응을 하라고 지시하지도 못하고.”
대책을 생각할 능력도 없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눈 번히 뜨고 일본이 멸망하는 걸 바라만 봐야 하나?
만약 일본이 멸망해버리면, 당장 일본열도가 다이온 본토를 타격하는 기지가 된다.
다이온이 멕시카의 상륙을 저지하고 항공전에서 승리하더라도 다시 일본에 상륙작전을 펼칠 때는 ‘잘 무장된 멕시카군의 방어시설’을 뚫어야 한다.
그게 얼마나 아득한 일이 될지…….
문득, 한 가지 아이디어가 리안의 뇌리를 스친다.
“일본 내 친원파와 손을 잡을 수 있다면 그 어려움은 반감된다.”
일본공화국이 끝내 말을 듣지 않았을 경우의 선택지.
일본 내에서의 반발, 그들이 아예 멕시카쪽으로 돌아섰을 때의 난감함 때문에 머릿속에서 치워둔 계획이었는데.
허물어져 가는 정신의 틈을 비집고, 그것이 다시 머리를 든다.
펜을 쥐었다.
리안은 미친 듯이 태사 명령을 종이에 휘갈기기 시작했다.
-일본공화국 내의 친원파와 교섭할 여지가 있는지를 외무성과 전쟁성에서 적극 검토하기 바람. 일본의 현 정부와의 협력은 기대할 수 없음. 일본열도 전체가 멕시카의 점령지가 되는 것도 묵과할 수 없음.
더 늦기 전에,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세상이, 운명이, 상황이 자신에게 협력해주지 않는다면,
리안 역시 협력해주지 않는 자들을 더는 배려할 필요가 없으니까.
“전투를 치르더라도, 상륙전을 치르는 것보다는 일본열도 내에서 치르는 편이 낫지.”
그리고 다이온인의 피가 흐르는 것보다 일본인의 피가 흐르는 편이 낫다.
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결론 내리고, 명령 초안을 하달하기 위해 전화기를 들었다.
***
“중요한 점은 주견하가 신수덕을 ‘살려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세규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젊은 나이에도 주변을 위압하던 그 목소리, 수없이 사선을 헤치고 나온 자의 경험이 깃든 그 목소리가 지금은…… 명백한 공포로 떨린다.
류성일은 그런 그를 비웃지 못한다.
“……주견하의 성격을 생각하면 ‘죽이지 않는다’는 판단을 했을 리 만무하네. 신수덕이 살아있는 건 순전히 그놈이 말로 구워삶았기 때문이야.”
류성일의 목소리 역시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기에.
“구워삶는다고 삶아질 인간이겠습니까?”
“그러니 보통 수단이 아니겠지.”
여기서 두 사람의 말은 그쳤지만, 둘 다 ‘보통이 아닌 수단’을 추론해낸다.
“신수덕이…… 알고 있을까요?”
“그놈도 허동주의 복수에 미친 인간인데,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해보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리안의 관용 덕분에 살아남은 천손민족협회 출신들이 꽤 있다. 그들 중 위장 전향을 한 자가 있다면? 수년간 신수덕과 연락을 계속 주고받은 자들이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신수덕이 그들로부터 국내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면, 지난 수년은 어떤 결론에 이르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민의원 의장 각하께서 주견하 양친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누설된 게 아니겠습니까.”
전쟁이 벌어졌어도 쿠릴타이와 제국최고회의간의 통합은 계속 이어졌다. 리안은 동명으로 가서도 그 과정을 계속 감독했고, 황제는 전투 중에도 그 의지를 피력했으니까.
그리하여 쿠릴타이는 참의원으로, 제국최고회의는 민의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다이온 연방 의회의 두 축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의장 각하라는 거창한 호칭이 무색하게, 류성일은 크게 뜬 눈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완전히 겁을 먹은 노인네…….
자신도 공포를 느끼고는 있지만, 이 정도는 아니라고 안도하면서 동시에 류성일을 경멸한다.
류성일의 당당한 태도, 여유로운 웃음.
그것들은 노회한 정객으로서 다른 이들이 모르는 사실들을 꿰뚫어 본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니 비밀을 ‘다른 이들도 알게 되었을 때’, 류성일이 점유하던 알량한 우위도 거기서 끝난다.
우위를 잃어도 관록으로 돌파할 수 있으련만, 이 늙은이는 이처럼 벌벌 떨 뿐 상황을 타개하려 하지 않는다.
동명 정계에서 밀려나 카라코룸으로 쫓겨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것이 제1대학교 출신 혁명가들이 존경하던 스승의 민낯인지.
아니면 민의원 의장이라는 자리와 ‘태사로 무난히 선출될 것’이라는 전망이 그를 이렇게 나약하게 만든 것인지.
안세규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알 필요도 없었다.
“주견하가 알게 됐다면 이렇게 가만히 있겠는가? 그놈도 미친개인데.”
“사냥감의 목을 확실히 물 기회가 오기 전까진 풀숲에 몸을 숨긴다는 점에선 이리에 더 가깝겠습니다만.”
비유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는 일이다.
“황제나 태사의 입장, 전쟁이라는 정국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아닐지.”
“그, 그래. 그렇겠구먼. 아직,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네.”
애써 당황을 가라앉히려는 게 보인다.
“하, 하핫, 그놈도 꽤 까다로운 놈이 되었어. 그날 처리해버렸으면 이렇게까지 크지도 못했을 놈이……!”
당황 다음엔 허세인가.
안세규의 마음속에서 류성일과의 동맹은 이미 멀찌감치 떨어져 나가버렸다. 자신도 살아야 했다. 류성일을 미끼로 던져 주면 주견하가 그를 물어 죽이는 동안 자신은 안전한 곳까지 대피할 수 있겠지.
그래서 일단은 협력하는 척한다.
“각하의 말씀대로, 주견하가 아직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우리 쪽에서 먼저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리하여 카라코룸의 민의원 임시회의에선, 서남방면군 사령관이 구금 중인 신수덕을 카라코룸으로 압송하라는 권고를 결의했다.
류성일이 미리 포섭해 둔 제국입헌당 내 자기 파벌과 고려국민당의 전 의원이 여기에 찬성표를 던졌다. 사회민주당과 공산당도 국가의 적인 신수덕을 감쌀 이유는 없었기에 권고안은 빠르게 통과되었다.
하지만 민의원의 권고를 받아보자마자 주견하는 압송을 거부.
“당연한 말이지만, 전시다. 압송 과정에서 신수덕이 탈출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호송에 배치할 병력도 부족하다. 유감이지만 상황이 안정되기 전까지는 압송이 불가하다.”
그런 현실적인 이유에 다음과 같은 원칙적인 답변도 덧붙였다.
“애초에 이러한 권고를 민의원에서 발하는 건 부적절하지 않은가. 사법부나, 형을 집행할 행정부 즉 태사 합하의 명령이 내려오는 것이 적법한 절차 아닌가. 혹은 대역죄이니만큼 황제 폐하의 칙령도 이 경우엔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적법성이 갖춰지기 전에는 함부로 신수덕을 이송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