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03화 (503/541)

인간성의 마지막 조각(18)

즉각적인 거부에, 리안의 몸이 살짝 떨렸다.

분노인가, 당황인가, 경악인가.

리안이 보고 있는 견하의 눈에는 확실히 분노가 담겨 있었다.

“뭐?”

“신수덕은 제가 따로 쓸 곳이 있어요. 죽여야 할 사람들이 있거든요. 아예 지상에서 쓸어버려야 하죠.”

“그러니까 그 작전은……”

“멕시카 이야기가 아니에요. 여기 고려에, 제가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불길. 두 글자가 리안의 발바닥을 끈적하게 붙잡고 늘어진다.

그게 누구냐고 리안은 묻지 않았다. 그 물음으로 말미암아 견하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자신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확인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으니까.

그러나 잔혹하게도 견하는 질문하지도 않은 것을 대답하고 만다.

“류성일. 제 부모님의 살해범이더군요. 안세규. 그런 류성일과 손잡고 뒤에서 우리 모두를 농락했던 음모꾼이고.”

입맞춤할 것처럼 견하의 얼굴이 리안의 얼굴로 바싹 다가온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리안의 입술에 닿지 않고, 증오의 말만을 뱉어낸다.

“제국입헌당 내 류성일 파벌, 안세규와 고려국민당 전원을 죽일 겁니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에서도 이 사실을 눈치챈 무리가 있었다면 저를 농락한 죄로 죽을 겁니다.”

견하의 얼굴이 멀어진다.

그는 뒤로 물러나, 소파에 앉았다. 리안에게서 비뚜름하게 몸을 돌린 채.

쿡쿡, 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주먹으로 입을 막는 듯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그는 웃는다.

이윽고 웃음이 가라앉자, 견하의 독백이 시작된다.

이것이 연극의 한 장면이라면, 연출가는 관객에게 지독한 악의를 품었음이 틀림없다.

“나만 몰랐군. 아니면 나조차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는데 그냥 외면해왔든지.”

견하는 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통과 공포로 일그러진 리안의 얼굴이 보인다.

그것이 한 번, 견하의 마음 위를 칼날처럼 베고 지나가지만 그뿐이었다.

견하의 말은 멈추지 않는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꼭두각시놀음이었을지. 나는 류성일도 안세규도 내 실력과 권위로 꼼짝 못 하게 밀어붙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놈들 눈에는 부모의 원수도 코앞에서 놓치는 희대의 병신으로 보였을 거야, 안 그래?”

리안은 입술만 달싹일 뿐 그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저 말의 화살은 곧……

“한두 사람이 아니었을 거야. 여기에 조금이라도 관여된 사람 중에 얼마나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을까? 왜 나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리안을 향하게 되니까.

견하는 일어나서 다시 리안 쪽으로 걸어왔다.

이번에는 리안의 책상 앞에서 멈추지 않고, 돌아서 그녀 앞까지 걸어왔다.

눈물이 흐른다.

그대로 견하의 얼굴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작전 검토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견하는 오른손을 들어 리안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아직은 따뜻한 손가락이 리안의 눈물을 닦아낸다.

떨어지는 것이 아쉽다는 듯, 손바닥은 리안의 부드러운 볼 위를 살짝 미끄러지다, 떨어졌다.

그것은 부드러운 이별 같은 동작이었다.

***

함대의 해안포격.

일본령 섬마다 멕시카 해군의 포격이 쏟아지고, 곧이어 해군 보병대가 상륙을 개시한다.

쏟아진 포격만으로도 정신을 부여잡기 힘들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기관총을 잡고 무너진 진지를 보강하며 쏟아져 들어오는 적 보병을 분쇄한다.

“……이게 끝인가?”

섬을 점령하겠다는 본격적인 상륙전치고는 장비도 부실하고, 병력 규모도 적었다.

“멕시카군의 역량이 내전 이후로 회복이 안 된 건 아닐지…….”

그런 희망을 품는 일본공화국 장교들 앞에, 절망을 일깨워주는 괴물이 나타난다.

아즈텍 내전에서 자주 보였던 광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체들이 일어난다. 꿈틀대면서. 변이하면서.

기관총 사격을 충분히 퍼붓는다면 그런 괴물들도 무력화시키지 못할 건 없다. 하지만 문제는 해안 포격과 ‘살아있는 적’을 상대하는 데 적지 않은 인력과 물자를 소모했다는 것이다.

‘충분한’ 사격을 가할 수 있을 리 없다.

결국 섬은 허여멀건 괴물들에게 뒤덮이고 만다. 일본군 병사들의 비명조차도.

이런 광경이 섬마다 반복된다.

멕시카의 해군이 적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일본 영해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된 탓이다.

일본공화국 해군은 아직 궤멸적 타격을 입은 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멕시카에 대한 화의 시도는 모조리 좌절되었다. 중립국을 통한 중재 시도도 먹히지 않는다.

다이온과의 동맹을 거절한 탓에, 다이온에서도 지원은 없다. 통상적인 무역도 다이온의 중심지가 전장이 되면서 많이 줄어든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주력 함대가 큰 타격을 입게 된다면, 그건 본토 앞바다까지 멕시카 해군의 길을 터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섬들이 하나둘씩 넘어가고, 그로 인해 일본 해군의 활동 영역이 점차 줄어들고는 있지만 당장의 결전은 피한다.

언젠가 찾아올 ‘전환 국면’, 바로 그 시점에 결전을 치르고 동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일본공화국 수뇌부와 해군은 그렇게 결의했지만, 그 전환 국면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느 시점에 어떤 형태로 올 것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런 국면이 찾아오지 않으면 이기질 못하니까 막연하게 되뇌는 것에 불과했다.

다만 이 전환 국면이 아즈텍 대륙의 ‘일본계’ 주민들로부터 올 것이라 기대하는 이들이 있긴 했다.

그들이 뜨거운 동포애로 반전 운동 같은 걸 해줄 거라는 기대 말이다.

그러나 일본공화국의 정치인들은 그 점에 있어 지나치게 순진했다.

일본계의 흔적은 이름이나 집안 관습에 조금 남았을 뿐, 그들 대부분은 이미 아즈텍 대륙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더 강했다.

게다가 내전을 한바탕 겪고 난 시점에서 멕시카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일본공화국의 편을 들어줄 리도 없었다.

진심으로 충성하는 쪽은 오히려 멕시카에 일본계가 있으니 당연히 일본 전체가 멕시카의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광기를 드러낸다.

그렇지 않은 쪽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감히 반전 운동에 나설 수 없다. 그런 짓을 했다간 언제 전장으로 끌려가 치치미틀의 재료가 될지 알 수 없으니까.

당혹감 속에, 일본공화국과 해상방위동맹은 그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섬들의 함락 소식만 듣고 있었다.

***

쿠에츠팔린은 경이마저 느끼면서 부유하는 산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산 전체를 뒤덮을 정도의 연구시설과 기계장치가 들어차 있었고, 그러고도 모자라 지면까지 길게 이어지는 여러 관이 보인다.

그 관들은 마치 부유하는 산을 묶어두는 사슬 같았다.

관이 지면에 닿은 끝부분은 또 다른 연구시설로 이어졌다. 이 연구시설들을 둘러싸고 다시 중세 아즈텍의 신전을 흉내 낸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물론 이 신전에서는 중세처럼 피의 인신 공양을 올리진 않는다.

이 붉은 세상에 들어오는 데만도 막대한 희생을 치렀고, 전장에서 파멸인-치치미틀을 만들어내는 데에도 많은 인력을 소모했다.

북극을 관통해 다이온의 극북방면군을 상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포로는 무한하지 않다.

멕시카가 치르는 전쟁 방식은 포로를 구하기 힘들다. 대부분은 파멸인에 의해 핏자국 정도만 남기고 짓이겨지니까.

즉 언젠가는 유럽계 노예들도 동원하거나, 그러지 못하면 멕시카의 정규군이 막대한 희생을 치러가며 싸우게 되는 순간이 온다는 말이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최소한 일본열도에 상륙 교두보 정도는 마련해둬야 한다.

일본열도가 공략이 끝나야, ‘문’을 통한 기습과 일본에서의 보급을 연계하여 보다 체계적인 다이온 공격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열어둔 문은 그저 다이온이 일본을 돕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할 뿐.

“어처구니가 없구먼.”

쿠에츠팔린은 오랜만에 최고지도자를 알현하러 온, 태평양 방면 사령관 초필로틀을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800만 신이 있는 신비한 나라’라고 열심히들 홍보하기에 문이 열릴 틈도 많을 줄 알았더니, 하나도 없을 줄이야.”

“신종에게 외면당한 땅이기에 오히려 그런 과장을 할 수밖에 없었을 테죠.”

초필로틀은 최고지도자의 말을 들으며, 이 붉은 세상의 하늘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기이한 하늘이었지만, 지금은 더욱 이상해졌다.

어찌 보면 아름답다고도 할 수 있는 광경이다.

부유하는 산의 꼭대기에서 뻗어 나온 빛이 곳곳으로 퍼져나가 천구(天球)에 푸른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

금이 간 데서 그치지 않고 커다란 구멍이 된 것도 몇 개 보였다.

붉은 하늘과 그 푸른 균열들은 경계선에 미묘하게 번진 듯한 색을 내서, 미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무척 신비하다.

지평선을 향한 구멍. 바닥에 뚫려서 적의 도읍 지하로 통하는 구멍, 하늘에 뚫려서 적의 하늘을 노려보는 구멍.

바로 저것이 ‘문’이다.

‘신종의 씨앗’을 통해 문을 만드는 것이 먼저 알려진 방법이지만, 그 방법을 썼다간 혁세주 억제는 물거품이 된다.

당장 여기 있는 사람들이 대거 죽어 나갈 터.

신전들은 희생 제의를 올리는 대신,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이 세상에 기여하는 바를 말하는 기도문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신전들은 혁세주의 출현을 억제하고, 주르반 신앙의 의식이 다른 방해 없이 공간 도약의 문을 열도록 해준다.

누군가의 절실했던 신앙이, 누군가에게는 세계 정복을 위한 도구로 이용당하는 광경.

물론 초필로틀도 오래 감상에 사로잡혀 있을 생각은 없기에, 현실적인 이야기로 화제를 옮겼다.

“일본공화국에 다이온 같은 도약 작전이 가능했다면 이미 무너뜨리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우리의 시간표도 앞당겨졌겠지. 아쉽지만, 차선책을 쓸 수밖에.”

그 점에 대해서는 초필로틀도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함대 결전을 강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대한의 보급을 끌어모으고, 대서양과 태평양의 거대 연합함대를 구성해 일본열도를 직접 공격해야 합니다.”

그 정도 규모라면 일본 해군에 절대로 지지 않을 정도라 자신해도 좋지만, 그래도 승인하기 전에 긴장이 안 될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꼴사납게 패배해 버리면, 그걸로 멕시카 자주국의 야망은 좌절되니까.

기껏 점령한 섬들을 유지할 힘도, 대서양에서 유럽의 함대를 견제할 힘도 모두 사라진다.

기회를 엿보던 봉래나 마자파히트가 서남쪽에서 일본 또는 다이온과 협력해 치고 올라온다면, 그걸 막을 방법이 없게 된다.

그런 긴장감을 드러내듯 쿠에츠팔린은 물었다.

“패배는 있을 수 없네. 확실하게, 일본의 방패를 일거에 걷어내야만 하네.”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일본을 우리의 ‘불침항모’로 삼으면 그때부터 길은 열릴 것입니다.”

불침항모. 항공기와 함대를 출격시키고, 상륙의 위협을 가하기에 알맞은 위치에 있는 섬을 의미하는 말이다.

침몰시킬 수 없는 섬이 항모의 역할을 하기에 이런 이름이 붙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일본열도를 정복하면 그때부턴 낭키아스, 고려의 동북방이나 삼한반도를 향한 위협적인 공격이 가능해진다.

쿠에츠팔린은 무겁게 끄덕였다.

그 끄덕임과 함께, 일본의 함대를 격멸하러 멕시카의 전 함대가 태평양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