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502화 (502/541)

인간성의 마지막 조각(17)

“내 증오는 그 ‘누군가’를 향해야만 하네.”

견하는 고개를 아주 천천히,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이해가 잘되지 않는다.

아니, 이해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전의 발발을 둘러싼 이상한 정황은 있었다.

류성일의 총장실을 암살자들이 급습했을 때, 마침 나타난 루우.

내전 발발 직전, 황궁 앞에서 리안을 죽이려 했던 소령의 성향은 분명 천손민족협회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견하의 앞에, 신수덕은 무자비하게 진실을 들이밀었다.

“자네의 부모님을 죽인 암살자들은 류성일이 보냈다네.”

***

동명시 지하철 전 구간이 봉쇄됐다.

각 역뿐만 아니라, ‘비밀노선’까지도 방어 병력을 배치해야 했다.

특히 비밀노선은 그대로 황궁 지하까지 연결된다. 그렇기에 황궁 밖이 아니라 안에 더 많은 병력이 배치되었다.

“이렇게 병력을 분산 배치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나.”

리안의 입에선 미처 억누르지 못한 불평이 새어 나왔다.

도시를 지키기에 충분한 병력이 있긴 하지만, 만약 어딘가로 공세가 집중된다면 이런 식의 방어는 금방 뚫리고 만다.

게다가 적의 근본적 퇴치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여기는 ‘문’이 여러 곳에 열렸다.

어떤 문은 시간이 지나 닫히기도 했고, 지하 어딘가에서 다른 새로운 문이 열리기도 했다.

일단 병력을 위쪽으로 철수시켜 역을 방어하는 태세를 갖췄다.

각 역은 방어 거점으로 삼기에 알맞고, 지상의 지원을 받기도 용이하다.

그러나 이렇게 각 역으로 물러난 사이에 문이 계속해서 열리고, 역과 역 사이, 선로들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적이 움직인다면…… 동명시는 지하에 적군이 들끓는 도시가 되고 만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지하철 전체에 병력을 빈틈없이 배치하는 거겠지만…….”

그러다 적이 갑자기 지상에 문을 연다면 대응이 늦어질 수 있기에, 약점을 알면서도 이런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러기엔 병력도 부족했고.

도대체 어디에 어떤 기준으로 문을 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동명시 지하 곳곳에서 문이 열렸다 닫히는 것을 보면 전 국토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즉 당장 전선에만 병력을 집중해선 안 된다.

상경이나 평양을 비롯한 다른 중요 지역에도 병력을 분산 배치해, 언제든 시작될 수 있는 적의 기습에 대비해야 한다.

어찌어찌 지하를 봉쇄하고, 시민들이 불완전하게나마 일상을 누리게 했지만…… 과연 이 상태를 얼마나 이어나가야 할지.

카라코룸과 칸발리크도 적을 격퇴하고 ‘문’과 대치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마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태사부에서 매일 교전 보고를 받고, 보충할 인력과 물자를 분배하면서 ‘해결책’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견하에게서 ‘제안서’가 올라왔다.

“반격 작전……?”

아직 루우나 투글룩에게서 어떠한 연락도 없었는데, 대체 견하는 뭘 알아내고 이런 작전을 제안해 온 걸까.

내용을 훑어보던 리안의 고개가 의아함으로 기울어지다가, 곧 다시 꼿꼿해졌다.

리안은 일어서서 집무실 안을 배회했다.

이윽고 멈춰선 리안의 입에선 한탄 비슷한 말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세상을 담보로 이런 작전을…….”

하지만 그녀도 자신이 이 작전에 관심이 기운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었다.

***

“……태사의 열차를 습격한 자들도 류성일의 사주를 받은 자들인가?”

“그건 안세규의 짓이지. 문하시중과 태사의 갈등이 심해지는 걸 노려 내전을 유발할 생각으로 저지른 연극이었다네.”

태사가 죽으면 곧장 그 죄를 허동주에게 뒤집어씌우고, 허동주를 따르지 않는 파벌들과 손잡고 루우를 황제로 추대할 계획이었을 거라고 신수덕은 덧붙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리안을 죽이지 못하면서 계획이 어그러졌다.

“류성일을 죽이러 온 암살자들은?”

“그건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비(非) 안세규 파벌이었을 걸세. 안세규는 그래서 일단 지금의 황제를 보내서 자네와 태사를 구하고, 태사와 손을 잡기로 했겠지.”

신수덕의 말을 종합해보면, 그때의 사건에는 적어도 세 개의 집단이 관여되어 있었다.

류성일.

안세규.

안세규를 제외한 구 민국정부 세력.

셋 모두 혼란을 유발하고, 그 과정에서 정국의 주도권을 쥐려 했다.

안세규가 리안에게 협력해주는 대가로 자신을 따르지 않는 고려국민당 내 파벌들을 손쉽게 숙청했던 걸 떠올린다.

그런가. 비밀은 류성일과 안세규만 공유하고, 그 외에 알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던 건가.

그리고…….

그 말대로라면 루우도 이 사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텐데.

하지만 견하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분노를 느끼기 전에, 한 가지 의심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네 말을 믿어야 할 이유는?”

“내 말은 자네의 신뢰를 구하는 게 아니라, 자네의 판단을 구하네. 자네가 멍청한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이미 짐작 가는 구석이 있지 않나? 그리고 그 짐작에 내 진술이 얼마나 합치되는지 판단하는 건 순전히 자네 몫이라네.”

참으로 교묘하게 옳은 말이었다.

“증명할 방법도 있지 않나? 곧장 카라코룸으로 올라가 안세규나 류성일에게 내 말을 들이밀어 보게나. 무슨 반응을 보이는지.”

무슨 반응을 보이는지…… 루우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리안도 알고 있었을까?

“너는 이걸로 무엇을 얻지?”

“자네는 나를 실컷 이용하겠지. 류성일과 안세규가 제거된 자리에 남는 게 지금과 같은 체제는 아닐 테니. 천손민족협회와 손잡고 정국을 장악한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나?”

“유용하게 써먹었으니 제거한다는 선택도 있을 텐데.”

“혼자서? 혼자서 황제와 태사 모두와 싸울 수 있겠나?”

신수덕은 ‘류성일과 안세규’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견하가 류성일, 안세규와 싸우는 과정이 체제의 파괴가 될 것이라 내다본다. 그리고 체제의 파괴는…… 황제와 태사가 막아설 것이다.

신수덕은 복수심이 무엇인지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신수덕은 견하가 복수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주견하라는 인간의 행동 원리는 아주 재미있다.

그는 권력 다툼 속에서 가족을 잃었기에,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주변 사람들을 지키는 길이라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을 터.

주견하가 걸어 온 모든 길이 그러한 가설이 참임을 입증한다. 그는 그 어떠한 권위 손상도 참지 못한다.

그렇기에 동기의 밑바닥, 가족을 잃은 그 순간을 건드려본다.

어떻게 해서든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복수의 앞을 가로막는다면,

과연 주견하에겐 어떤 지옥이 펼쳐질까.

이 나라에는 어떤 지옥이 펼쳐질까.

이 세상에는 어떤 지옥이 펼쳐질까.

***

“멕시카가 벌이는 작전은 혁세주 출현이라는 위험 부담을 지고 있어요.”

오랜만에 만난 연인은, 연인다운 대화를 나눌 겨를도 없이 그렇게 말을 꺼냈다.

약간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리안은 사고를 군통수권자의 것으로 전환한다.

한 번 생긴 거리감은 줄이기 어렵고, 시간을 들여서 해결할 문제겠지.

그러니까 이 사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나면…… 그때는 여기 동명에서 둘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져보자.

이야기를 많이 나눠보자.

견하의 말이 이어진다.

“멕시카 측에서도 그걸 어떻게든 최소화하려고 했더군요. 태양이 안 떠오르던 시절, 신화시대에 나타난 혁세주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들을 발굴해서 말이에요.”

“구체적으로는 어떤 방식이지?”

“전근대 아즈텍의 종교에는 독특한 면이 있어요. 이들은 온 세상의 구원이나 영혼의 성취 같은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죽음은 어쩔 수 없다, 세상의 작동을 위해 죽자는 식으로, 삶이 아니라 죽음을 지향해요.”

인간을 세상의 유지를 위한 자원 정도로 바라본다.

멕시카의 파시즘에는 이 종교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다고, 견하는 생각해본다.

그렇기에 ‘국가를 위해 무수한 시체를 투입한다’라는 식의 전략이 가능한 거겠지.

“영혼과 구원을 바라는 종교들과는 다르군.”

“주르반 신앙의 기도문을 도입한 것만으로도 문을 열고 유지하듯이, 아즈텍 종교의 특수한 신앙을 그 붉은 공간 안에서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혁세주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을 거예요.”

즉 견하의 말에 따르면 붉은 공간 내에서 혁세주 출현을 억제하는 아즈텍 ‘성소’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루우 한 사람의 의식을 마르코 폴로가 있는 곳으로 도약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설비가 ‘부유하는 산’에 동원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즈텍의 성소도 그 규모가 작진 않을 터.

“작전은 일차적으로, 그 성소를 찾아내 파괴하는 쪽으로 진행되겠지.”

“네. 동시에 여기 열린 문들을 한꺼번에 닫아, 그 반동으로 아즈텍 대륙을 향해 ‘튀어 나가게’ 하죠.”

혁세주를 나타나게 하는 것을 넘어, 아예 아즈텍의 대지에 직격시킨다.

혁세주가 아즈텍 대륙의 어디에 나타나느냐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제대로 피해를 입힌다면 멕시카와의 전쟁을 단숨에 끝낼 수 있다.

다만 문제는…….

“혁세주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멕시카만 타격해줄 거라고는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까.”

근본적으로 혁세주는 그 이름대로 ‘붉은 세상의 주인’이자 붉은 세상 그 자체다. 그 세상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갈망이 망집이 되어 남은 것이다.

당연히, 혁세주를 빠르게 격퇴하지 못하면 그 영향은 도시나 나라, 대륙을 넘어서 전 세계로 뻗어나가겠지.

전 세계 사람들의 목구멍에서 새 울음소리 같은 기괴한 비명이 쏟아져 나오며 파멸인으로 변해버리는 광경을 보고 싶진 않았다.

그러면 이번 세상도 그걸로 끝이다.

리안이 마르코 폴로를 통해 봤던 무수한 세상들처럼.

“도박이긴 하지만, 격퇴할 방법도 있긴 해요.”

“신수덕이 그렇게 말해주던가?”

드디어 리안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

신수덕이 마카오로 들어왔으며, 견하가 직접 출동해 잡았다는 이야기는 감춰질 수가 없다.

아무리 전쟁으로 정신이 없고, 수도 및 수도급 도시들이 공격받아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이 따로 두 전선에 서야 할 지경이 되었어도, 리안은 들어야만 하는 정보는 놓치지 않는다.

“네.”

“왜 죽이지 않았지?”

“그가 지닌 정보가 유용하리라고 판단했고, 결국 죽이더라도 확실히 합하나 폐하의 이름으로 하는 게 낫다고 봤으니까요.”

뒤의 말은 변명이다.

“너한테는 죽일 권한도 있고, 네가 죽인다고 해서 나나 황제의 권위가 실추되진 않아. 어쨌든 우리는 오래도록 추적해 온 반역자를 주살한 셈이 되니까.”

일어나서, 책상에 두 손을 짚고, 몸을 앞으로 내민다.

“이 작전 제안이 신수덕의 머리에서 나온 거라면 쓸 수가 없어. 설령 신수덕의 말이 모두 사실이고 그 덕분에 전쟁에서 이긴다 해도 신수덕은 죽어야 해. 놈은 승리의 공로로 살아남을 생각이겠지만 제국의 안정을 위해선 그 목숨이 꼭 필요하다고.”

리안은 견하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넘겨. 네 말대로 태사인 내 이름으로 죽일게.”

“그렇게는 못 하겠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