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의 마지막 조각(16)
무장을 모두 떼어내고 ‘작업용’으로 개조된 기갑사가 문을 통과한다.
이 기갑사의 특이한 점은 안에 이단이 아니라 일반인을 집어넣었다는 사실이다.
-일반인도 미약하긴 하지만 칠정을 통한 기의 운용이 가능하다. 그 점에서 이단과 일반인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런 발상 하에 멕시카 자주국은, 포로 중 일부를 화물용 기갑사에 집어넣고 노예 노동에 동원했다.
물론 이단이 아니니만큼 감정만 마모되는 게 아니라 어딘가 심각할 정도로 고장이 날 밖에.
기갑사의 완력을 이용해서 반항을 시도해볼 만도 한데, 포로들은 기갑사에 들어가자마자 빠르게 자아가 부서졌다.
전두엽 절제술이라도 받은 것처럼 멍한 얼굴로, 내려진 명령만을 따른다.
물론 그러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기 때문에, 이 노예 노동은 실질적인 유용성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멕시카에서도 다른 포로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줄 형벌 정도로만 활용했다.
이번에 문을 통과시킨 노예 기갑사도 마찬가지였다.
쿠에츠팔린은 문 너머의 붉은 공간에 기지 겸 연구소를 구축할 생각이었다. 일단 그곳에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면 다른 나라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파멸인이나 혁세주 연구에서 앞서나가게 될 것이다.
노예 기갑사는 기지 건설 자재를 옮기며 몇 걸음 걷다가, 갑자기 꾸겨져 버렸다.
“으음…….”
예상치 못한 상황은 언제든 생기리라 각오했건만, 이건 좀 뼈아팠다.
일이 쉽게 흘러가진 않으리라는 징표였으니까.
“크기가 너무 크면 또 안 되는 건가?”
쿠에츠팔린이 그런 의견을 냈지만, 연구 책임자는 부정했다.
“작업용 기갑사가 파손되는 게, 마치 구겨지는 것처럼 보이긴 합니다만, 단순히 어떤 힘으로 짓눌린 건 아닙니다.”
안에 든 인간도 갈기갈기 찢겨나가듯 흩어져 기계와 뒤섞였다.
“기갑사 탑승의 부작용 중 하나인 ‘불가살’은, 인간의 작동 방식 중 하나가 인간이 아닌 것과 뒤섞이면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그게 저기서 나타났다는 건가.”
“이 세상에서도 불안정한데 저쪽으로 넘어가면 그 불안정이 더욱 가중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길어봤자 며칠 못 버티고 죽는, 일반인을 무리하게 탑승시킨 기갑사다.
언제 기계로 흘려보냈던 것들이 역류해서 온몸을 뒤틀며 죽을지 알 수 없는 것들인데, 붉은 세계에서 버틸 리가.
“기갑사에 탑승하지 않은 놈들은 계속 버티는군.”
“아마 저 세계가 기갑사에 탑승한 자와 인간을 다른 종으로 분류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인간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하는 철학적 토론을 할 시간은 없네. 나는 기갑사 전력을 투입해야 하네. 전차도, 대포도, 비행기도 저쪽으로 넘어가서 작전을 해야 한단 말일세.”
“실험을 속행하겠습니다.”
미련한 시체 쌓기가 재개된다.
고철과 고기의 혼합물이 또다시 무수히 쌓이는, 아까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살아남은’ 기갑사가 나타난다.
멕시카 측에는 다행스럽게도, 기갑사에 일어난 일은 다른 장비에 탑승한 사람들에겐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장비들은 사람과 기계 사이에 기(氣)로 통로를 놓진 않았기 때문이겠지.
이후 순조롭게 기지를 건설한다.
연구원들이 붉은 토양을 채취한다.
군인들과 함께 ‘폐허’처럼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 문명의 흔적을 탐색한다.
물론 이곳을 영토로 삼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곳에 멕시카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있다면, 다른 국가들이 감히 따라오지 못하는 나라가 되리라.
다른 나라들이 지구의 한 귀퉁이를 겨우 차지하고 있을 때, 멕시카는 뒤에서 행성 하나를 통째로 영토로 삼는 셈이니까.
하지만 당장의 과제는 아니었다.
이곳이 얼마나 유용한지, 개척할 수 있는지 여부는 연구원들의 손에 맡겨두고, 쿠에츠팔린은 ‘다시 문을 여는’ 문제에 매달렸다.
그러니까 멕시카에서 들어와, 다이온에 문을 여는 문제 말이다.
들어오기만 하고 나갈 수 없다면, 나가더라도 원하는 곳으로 나갈 수 없다면, 멕시카는 이 작전에 배정된 예산을 삭감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곧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답은 쿠에츠팔린을 비롯한 멕시카의 군사, 정치 지도자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곳에서 나왔다.
붉은 세계의 문명을 탐사하던 연구자들이, 한 유적을 찾아낸 것이다.
이곳의 상공을 떠돌며 ‘부유하는 산’을.
***
“카라코룸 상공에서 ‘부유하는 산’이 부서지지 않았나?”
견하는 신수덕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견하도 카라코룸에서 전달된 자료는 읽었다. 갑자기 부유하는 산이 나타나 파괴와 회복을 반복하더니, 하늘에 문이 열리고 괴물들이 쏟아졌다고.
“처음 쏟아진, 파멸인이 되다 만 시체들, 고철 덩어리와 엉킨 시체들은 저쪽에서 ‘문을 열 때’ 겪었던 시행착오의 결과물일 걸세.”
“인간이 함부로 진입하면 ‘이(理)의 붕괴’가 일어나는 건가?”
“이단이 그 허여멀건 덩어리와 접촉하면 붕괴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원리지.”
그렇기에 붉은 세상으로는 ‘의식의 전이’만이 허용된다.
“옛날 성리학자라는 사람들은 참 똑똑했네. 그렇지 않은가?”
“인간의 원리와 세상의 원리는 같다. 그러니 의식이 세상의 ‘어느 곳에든 존재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우리의 본질을 그곳에서 드러내는 것에 더 가깝지만.”
본질. 영혼 없는 육신.
세상들의 원리마다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면, 몸을 깨어나 움직이게 하는 육체의 작용 역시 공통될 것이다.
그 작용은 여기에 존재할 수 있다면, 다른 세상에서도 존재하게 할 수 있다.
다만 육체는 가지 못하고 그러한 ‘작용’만 다른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무방비한 육체가 직접 가면 ‘공통되지 않은 부분’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영혼이 없는 육체가, 영혼을 얻으려는 시도로 멸망한 그곳에 가면…….
견하는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봤다.
신수덕은 흥미롭다는 듯, 같이 그 손을 바라보다 말했다.
“섞인 것 같지만, 실은 ‘잘 붙어 있다’고 봐야 하네.”
“……무슨 의미지?”
“섞였으면 자네 몸이 멀쩡하지 않았을 걸세. 기갑사와 억지로 뒤엉켜서 짜부라진 시체 꼴이 됐겠지.”
‘저쪽 세상에서 얻어온 영혼’을 사용하는 자가 곧 이단이다.
이단이 영혼을 소환해 무기로 사용하면서도 멀쩡한 이유는, 영혼과 몸이 섞여서 이가 붕괴하지 않고, 육신의 ‘밖’에 두었기 때문이다.
“자네는 선천적이지 않은 이단이지.”
“그 하얀 덩어리…… 그게 영혼인가.”
“인위적으로 이단을 만들어내는 실험에서 마모될 대로 마모된 영혼이겠지만, 어쨌든 그게 몸에 섞이느냐, 아니면 몸과 영혼이 적당히 타협해서 ‘분리’되느냐가 생사를 가른다네.”
“섞이면 이단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죽는 거군.”
“하지만 자넨 살아남았지. 매우 우수한 이단이 되었어.”
“이 팔도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아마도 자네는 ‘불가살’을 겪었을 테지?”
의외의 단어가 나왔기에, 견하는 조금 놀랐다.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자신이 허동주를 죽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 거지?
“자네 안에서 그 기갑사 덩어리는 섞이지 않았네. 하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 그 왼팔만 저쪽 세상으로 넘어갔을 때, 안에 있던 게 ‘드러난’ 게지.”
견하는 두 번, 손을 접었다 펼쳐 보였다.
“이렇게 내 육체의 일부처럼 움직이니 그 말이 와닿진 않는군.”
“‘적응’한 걸세. 중요한 이야기라네. ‘적응’이란.”
견하는 잠시 신수덕의 말을 되짚어본다. 그가 이런 정보를 들려주는 동기는 차치하고서라도, 걸리는 부분이 있다.
저쪽 세상에 육체의 붕괴 없이 가려면 ‘의식의 작용’만이 전이해야 한다.
그건 마치…….
“영혼, 같군.”
신수덕이 씩 웃는다.
“영혼 없는 우리가 영혼 비슷한 뭔가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그건 이미 영혼이 있는 존재 아닌가?”
“비슷하긴 했는데, 정답은 아닐세.”
신수덕의 추가 설명을 기다리며 견하는 침묵했다.
“어리석은 자들이 얻고자 하는 영혼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네. 육체를 ‘초월’할 수는 없지. 육체를 벗어난다든가, 영혼 그대로 새로운 육체로 다시 태어난다든가, 혹은 영혼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세상, 영혼에 가해지는 고통의 세상으로 가지도 않는다네.”
“의식은 육체를 초월하지 못한다?”
“육체가 파괴되면 의식도 그걸로 끝이지.”
하지만, 이라며 신수덕은 덧붙인다.
“인간의 그 의식이 ‘영혼’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네.”
이 경우 영혼은 육체와는 별개의 무언가가 아니라, 인류라는 생물 종의 진화 중인 신체 기관에 더 가까울 것이다.
“말하자면 영혼기관(靈魂器官)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런데 마침내 우리가 영혼을 얻어낸다 해도, 그것의 발전 경로는 신종의 영혼과는 완전히 다르다네.”
“계통이 다른 영혼이 한 몸에 섞이는 데서 이의 붕괴가 시작되는 건가.”
그것을 표현할 개념이 영혼이라는 단어 정도라 비슷하게 들릴 뿐, 실상은 유사한 기능을 하는 전혀 다른 요소다.
서로가 서로의 불순물이 된다.
“과학 수업은 이쯤 하지. 어쨌든 그런 실패작들을 내보낸 뒤에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되었다는 건, 멕시카군이 부작용을 극복했다는 말이겠군.”
“신종도 여기 들어와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적응한 것처럼, 그 세상도 인간에 적응한 것이지.”
“그렇다면 역습 작전에서 한 가지 걱정을 덜게 되는군.”
다이온군이 저쪽으로 넘어갔을 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작전을 망설였는데, 이제 그럴 이유가 없다.
칸발리크는 지상까지 문이 열려 있으니 이대로 군을 투입, 멕시카군의 기지를 파괴하거나 점령하면서 전진하여 저 너머, 멕시카 본토를 타격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멕시카가 열어준 문을 활용할 뿐, 우리가 문을 다룰 수는 없으니 말이지.”
“그 쪽한테 내 참모 역할을 기대하진 않았는데.”
“나도 군략을 다루는 사람일세. 한마디 보탤 수는 있지 않나?”
“인제 와서 공을 세워서 죄를 무마해 볼 심산인가? 배신자들을 흉내 내서.”
“이 정국에, 조국에서 살아가려면 합당한 공을 세워야 하지 않겠나?”
신수덕의 말에 견하는 냉소했다.
“내가 널 살려줄 이유는 둘째치고, 폐하와 합하 역시 네 목을 남겨두려 하지 않으실 거다.”
그리고, 라면서 말을 끄는 견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역시, 나를 용서할 이유가 없지 않나?”
“증오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신수덕은 헛웃음을 길게 흘렸다.
뱀이 웃을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기괴하고 섬뜩한, 있을 수 없는 무언가를 보는 느낌.
“나는 그 문제에서 증오가 정확히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안다네.”
“무슨 뜻이지?”
“자네가 누군가의 농간으로 문하시중 각하의 목숨을 빼앗았다면, 미리안 역시 속아서 문하시중을 공격하고 내전에 돌입한 거라면 어쩌겠는가.”
미리안과 주견하 두 사람 모두를 속이고 조종한 누군가?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