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의 마지막 조각(14)
기갑사 대 기갑사의 대결은 기갑사의 기술적 우위, 그리고 탑승한 이단의 기량으로 판가름 난다.
기술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데, 그 결과물은 기계들의 백병전이라니.
멕시카의 기갑사를 찍어누르며 전진하던 루우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흘렸다.
양측 모두 자신들의 사정으로 포격전을 할 수가 없었다.
멕시카는 포병대를 둘 배후 지역 확보에 실패했다. 항공전도 패배했고, 이제는 ‘문’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것이 다이온군의 대공포에 바스러진다.
도시의 적지 않은 부분이 피해를 입었지만, 카라코룸 방위전은 방공망의 확충과 그 정밀성의 상승으로 성공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여전히 ‘문’을 닫을 방법을 모르는 게 문제긴 한데…….
지상에 남은 멕시카군의 병력이 격렬하게 저항 중이지만, 국면은 ‘소탕전’에 접어들었다.
결국 카라코룸에 들어온 멕시카의 지상군은 소멸하고, 다이온의 대공포와 레이더가 하늘의 문을 겨냥한 대치 국면이 이어지게 될 것이다.
다이온군 쪽에서는 이 이상 카라코룸 시가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포격을 자제하고 있었다.
카라코룸을 방어해내긴 했는데, 남은 것은 폐허뿐이더라…… 그런 식으로 이 전투를 끝맺고 싶진 않았다.
하늘에 저런 구멍을 두고서라도, 다이온 연방, 하나 된 제국은 어쨌든 카라코룸을 수도로 삼아야 했으므로.
그렇게 양측은 최첨단 기계를 앞세워 옛 시대의 전쟁을 벌인다.
-칸발리크에서는 문이 지상까지 열리고, 동명에서는 지하에 문이 열렸다던데.
카라코룸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건 멕시카의 여력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것 또한 ‘작전’의 일환인지.
그걸 구분할 방법은 루우에게도, 다이온군에게도 없었다.
-그저 눈앞의 적을 치울 수밖에.
또 하나의 멕시카 기갑사가, 용의 발톱 같은 룡황의 손아귀에 찌부러졌다. 안에서 피인지 기름인지, 혹은 뒤섞인 무언가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뿜어져 나오다 주르륵 땅바닥을 적신다.
역겨운 광경이었지만 익숙한 광경이기도 하다.
룡황의 발이, 쓰러져 있지만, 아직 살아있는 보병의 머리를 밟는다. 진로에 있었다. 밟을 수밖에 없었다.
보병이 내뱉는 비명, 단말마는 알아들을 수 없으면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밟지마, 밟지마.
머리가 찌그러져 터며 나가고, 뇌수를 쏟으면서도 보병은 온몸을 버둥거려 루우의 발을 치우려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이내 온몸을 파르르르 떨더니 잠잠해진다.
이것이 전쟁이다.
루우는 전진한다.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했지만, 황궁의 어떤 문은 기갑사가 지나기엔 좁고 낮았다. 부순다. 루우를 향해 쏟아진 대전차포를 거대한 언월도로 가른다.
불길 속에서 멀쩡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룡황.
겁에 질린 보병의 얼굴이 똑똑히 보인다.
“이제 이걸로 끝.”
보병의 몸을 정수리부터 가랑이까지 반으로 쪼갠다. 아니, 쪼개지는 게 아니라 언월도 날을 따라 몸이 가운데로 꾸겨지며 주저앉는다.
주변을 돌아본다.
다른 기갑사가 적 기갑사를 향해 창을 겨눈다. 적 기갑사의 한쪽 팔은 이미 잘려 나갔고, 남은 팔로 버둥대며 찌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다. 찌른다. 손짓은 창을 잡는 게 아니라, 찔렀다는 이 행위를 취소해 달라고 빌듯이 움직이다가 곧 멎는다.
황궁의 바닥에 깔린 돌과 지붕의 기와가 날아가고, 어디서는 불이 나고 있었지만, 어쨌든…… 지상전은 끝났다.
카라코룸 방어전은, 불완전하긴 해도 승리라고 할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불길하게 일렁이는 검붉은 하늘을 보며, 루우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저는 동명으로 가서 시민들을 위무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전선을 떠나 최고사령부로 복귀한 황제와 실질적인 지휘를 맡은 김천열 원수, 그리고 다른 참모장교들 앞에서 리안은 그렇게 발표했다.
“합하!”
김천열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리듯 리안을 불렀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는 폐하가 계십니다. 카라코룸은 연방의 신수도로서 기능해나가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김천열 원수도 내가 없는 동안 지휘를 잘 맡아 줄 거라 생각합니다.”
다시 모두를 돌아보며 리안은 덧붙였다.
“말했던 것처럼 제가 동명으로 가는 건 국내 정치적인 이유입니다. 대원수 계급을 달고, 태사의 자리에 있는 자가 가지 않으면 동명 시민들의 불안은 가라앉히기 어렵습니다.”
제국의 지도부 전체가 카라코룸으로 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지금 누군가 얼굴을 내밀지 않으면, 동명 시민들은 ‘버림받았다’고 느낄 수도 있었다. 그것은 그대로 동명의 불안으로, 나아가 제국의 불안으로 이어지리라.
물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카라코룸으로 이주하는 고려인들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카라코룸이 피난 온 고려인의 물결로 북적대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다이온 정부와 카라코룸은 당장 그런 피난민을 수용할 여력이 없고, 피난민들도 카라코룸에 간다고 해도 빈곤 외에는 건질 게 없다.
“태사가 황성방위군과 함께 도시를 방어하면서, 여전히 동명이 ‘또 하나의 수도’로서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음을 알리면 혼란도 가라앉을 겁니다.”
리안이 동명으로 가려는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한 번, 동명시 지하에 출현한 파멸인과 싸워 본 적이 있다.
그 후 또다시 지하 시설을 이용한 적의 공격이 있을 경우를 상정해, 동명시 방어 계획을 짤 때 그녀도 깊게 관여했었다. 그 방어 계획은 이런 전면전 상황을 가정하지는 않았지만, 쓸모는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가서 직접 지휘해야 한다고, 리안은 판단했다.
-이렇게 하면, 나도 카라코룸에서 멀어지는 셈이지.
카라코룸에 견하도 자신도 없는 상태가 된다.
천손민족협회도 없고, 애초에 카라코룸은 그 환상 속에서처럼 느긋하게 무슨 공연 관람이나 할 상황이 아니게 됐……
문득,
리안은 어떤 ‘가설’을 떠올렸다.
-나는 분명 상황을 변화시켰어.
견하와 자신이 함께 카라코룸에 있는 상황을 피했다. 견하는 지금 칸발리크에 발이 묶여서 못 온다. 자신도 동명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그 비극을 피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지금 이런……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낳은 게 아닌가?
그 환상 속에 없었던 일을 만들어내니 없었던 전개가 이루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털어내듯 고개를 젓는다.
-지나친 망상, 이야.
이 위기가 지나면, 그때는 견하와 함께…….
-그게 언제쯤인데?
언제까지 운명을 피해 도망 다니듯 살 것인가?
그 사슬은 대체 언제 끊어낼 수 있단 말인가?
좌절감. 그에 따른 깊은 우울은 늪처럼 리안의 발목을 잡고 끌어들인다.
그것을 떨쳐내려는 것처럼, 리안은 동명으로 향한다는 결정을 곧장 실행에 옮겼다.
***
견하는 신수덕의 정신력을 조롱이라도 하듯, 깨끗한 옷과 쾌적한 숙소, 풍족한 식사를 제공했다.
인간의 정신은 보통 고통스러울 때 꺾이지만, 고통에 익숙한 인간은 그런 식으로는 잘 꺾이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고통이 마침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고통 한가운데에서는 상상도 못 한 안락함이 주어지는 순간 꺾인다.
트럭에, 기차에 짐짝처럼 실려서 칸발리크까지 오는 동안 너덜너덜해진 정신을 부여잡으려 애써본다.
신수덕은 견하가 부리는 수작의 의도쯤이야 금방 간파했다.
그러나 간파했다고 해서 일단 허기를 채우려고 눈앞의 음식을 집어 드는 손길까지 막을 순 없었다.
꺾이지만 않는다면, 무릎 꿇지만 않는다면 이 음식은 정신의 버팀목이 되어주리라 계속해서 되뇌면서.
이윽고 군인들이 들어와 빈 그릇을 치웠다. 배가 찬 수덕도 슬슬 각오를 다졌다.
주견하의 말을 어떻게 맞받아치고, 또 어떤 말을 꺼내서 그의 흥미를 끌지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상황을 구성해본다.
그러나 수덕에게 실망감을 안겨줄 생각이었는지, 주견하는 들어오지 않았다. 취조실에 들어온 사람은 한재연이었다.
수덕은 꽤 오래, 자기 앞에 앉은 미청년의 이름을 기억하려 해보았다. 하지만 끝내 기억나진 않는다.
“한재연이라고 합니다.”
“……주견하의 수하인가?”
“한때는 저도 천손민족협회 회원이었죠. 그쪽에서 보기엔 배신자겠지만.”
“자네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달라는 건가?”
“비난 정도는 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쓸데없는 소리.”
핫, 하고 냉소 한 번 던지고 나서, 신수덕은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가 저지른 배신은 자네의 것이지. 중요한 건 자네의 의도네. 무엇 때문에 자네가 내 앞에 왔는가? 나도 배신하라고 회유하러 왔나?”
“회유된다고 해도 당신이 살아나갈 확률은 희박합니다.”
“그럼 이러고 있는 의미가 없잖은가. 자네 상관더러 어서 죽이라고 하게.”
“실컷 욕보이다 죽이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군. 내가 무의미하게 죽는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면 주견하의 기분이야 어찌 되든 알게 뭔가?”
“왜 귀국했습니까?”
“거래를 할 생각이네. 내가 가진 정보를 그쪽에 주고, 그 대가로 나는 사면되는 거지.”
“당신은 한족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한족 목숨이 그렇게 소중한가?”
“한족 반란을 진압하느라 죽어간 우리 장병들 목숨은 소중하죠.”
“한족의 씨를 말리면 더는 그럴 일이 없을 텐데?”
“사면된다고 하면, 조용히 살아갈 생각이었습니까?”
신수덕은 그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재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재연도 신수덕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마주 바라본다.
기세에서 지면 취조는 실패다.
“자네도 내심 동의하는군, 아직도.”
“무엇을 말입니까?”
“한족의 제거. 그 체계적 방안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다고 하진 않겠지.”
이번엔 재연이 답하지 않았다. 그는 질문을 반복했다.
“사면된다면 어떻게 할 계획입니까?”
“당연히 정계에 진출해야지. 돌아가신 문하시중의 정신에 다시 불을 지필 걸세.”
“살려는 의지가 있긴 한 겁니까?”
“살려줄 의지는 있던가?”
“곱게 죽일 의지는 있죠.”
“그러면 거래는 성사될 수 없겠군. 그쪽은 내가 바라는 걸 내줄 생각이 없고, 나도 그런 조건에는 줄 게 없으니.”
“네. 유감입니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재연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한때 천손민족협회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신수덕의 이름을 들었을 때 기묘한 감회에 사로잡힌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미련 없이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르반.”
신수덕은 그 이름을 말한 직후, 한재연이 보인 찰나의 정지를 놓치지 않았다.
“호오, 거기까지 도달했나. 안 먹히면 어쩌나 했는데.”
일어나려던 동작을 멈추자, 무심코 경청하는 태도가 새어 나왔다.
“주르반의 이름을 발굴해냈다면 이야기는 빠르겠군. ‘문’을 다룰 방법이 바로 거기에 있네.”
“당신이 이 전쟁을 뒤에서 부추겼습니까?”
“정확히 말하지. 나는 전쟁 일으키라고 부추긴 적이 없네. 변명이 아니라 진짜로. 나는 그저 문에 달린 열쇠 구멍에 맞는 열쇠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알려줬을 뿐이지. 그 열쇠를 어디다 꽂고 문을 열어젖힐지 말지 결정하는 건 순전히 멕시카 수뇌부의 몫 아니겠나?”
“……천일야화라고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이야기를 듣는 동안엔 살려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