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의 마지막 조각(13)
견하는 지체없이 움직였다.
에스파냐령 마카오로 들어온 건 당연히 고려의 손길을 피하기 위함일 터.
멕시카와 전면 전쟁에 말려든 다이온은 신수덕의 이야기를 듣고 말고 할 여유가 없었다.
일말의 불안 요인이라도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신수덕이 다이온의 어떤 항구로 들어왔다면, 그곳에선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일단 죽였을 것이다.
그 정도의 위험인물이다.
“본인도 자기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알겠지.”
견하는 신수덕을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었지만, 결코 만만하게 보지 않았다.
사방에서 죄어오는 포위망을 뚫고, 그 와중에 게레센제를 구슬려 탈출하는 데 성공한 인간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가 산동에서 저지른 학살 역시 궁지에 몰린 나머지 폭주한 게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된 책략이 아니었나 싶다.
“그 덕에 식민 정책이 전부 어그러지고 지금도 한족 정책으로 고생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산채로 씹어먹어도 속이 시원치 않아.”
으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내는 짐승. 재연은 견하의 모습을 보며 그런 심상을 떠올렸다.
그 역시 견하의 급보를 받고 연구원들을 남겨둔 채 급히 합류했다. 신수덕을 상대하려면, 역시 같은 천손민족협회 출신의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즈텍 대륙에서도 꽤 애를 먹었지.”
재연이 말하자 견하는 끄덕였다.
“애를 먹은 정도가 아니지. 완전히 의표를 찔렸어.”
‘완패’해서 물러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견하는 덧붙였다. 아즈텍 대륙으로 숨어든 그를 잡지 못하고, 인력 손실만 입었다.
대공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내전으로 치달을 아즈텍 연방의 운명만 확인했던 씁쓸한 기억이기도 했다.
그 탓일까.
신수덕이 마카오에서 뭔가를 한 것도 아닌데, 그 의외성이 견하가 ‘의표를 찔렸던’ 기억을 자극한 듯하다.
그런 친구를 달래듯 재연은 말했다.
“신수덕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견하는 아주 잠깐 간격을 두었다가 대답했다.
“우리가 그 인간의 속내를 이것저것 추측해보게 하는 것 자체가 놈의 목적이야. 에스파냐의 ‘양해’를 얻자마자 체포해서 주살한다.”
단정적인 말에 재연은 약간 놀랐다. 평소에는 ‘……지도 모른다’라며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을 남겨두던 사람인데.
“신수덕이 자기가 살 궁리도 안 하고 왔을까?”
“우리가 그 궁리를 추측하려 들면 놈이 살 빈틈이 생기겠지. 그러니 심문할 필요도 없이 보자마자 사살해야 해.”
견하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대로는 한 가지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다.
“신수덕을 잡자마자 죽일 생각이라면, 나를 동행시킬 이유가 없잖아?”
재연의 물음에, 그의 오랜 친구는 정말 오랜만에 씩 웃었다.
그 웃음이 고등학생이던 시절과는 무척 달라져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순수한 소년의 웃음, 어딘가 난처해하면서도 부드럽게 짓던 웃음.
그런 웃음은 주견하에게서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여기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마저도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삼을 수 있는 남자다.
요컨대, 신수덕에 대한 말은 부하들에게 전달하는 방침 따위가 아니다. 정말 신수덕을 죽여야 하는 순간, 결단이 필요할 때를 대비해 주견하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즉, 저 웃음은 그런 자신을 재연더러 설득해보라는 것.
견하 자신이 신수덕에 대한 적대감 속에서 미처 떠올리지 못한 것들을 일깨워주고, 신수덕을 보자마자 죽이지 않고 대화를 나눠 봐야 할 이유를 제시하라는 것.
그는 재연에게 철두철미하게 참모로서의 기능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번엔 재연이 잠깐 간격을 두었다가 말했다.
“신수덕은 이 사태의 해결책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신수덕이 이 사태의 배후에 있는 건 확실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결책까지 알고 있으리라 보는 건 속단 아닌가? 해결책이 없는 문제도 있어.”
“해결책이 없으면 여기 안 왔겠지.”
신수덕은 기갑사, 파멸인, 혁세주 관련 기술을 로마 제국과 멕시카 양측을 오가며 뿌려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이 세계대전이라는 무대가 그 한 사람의 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놈이 꾸민 무대를…… 그놈 스스로 막을 내리게 한다……. 그런 연극 하나를 보려고 내가 신수덕과 마주 앉아서 얘기를 나눠야 한다?”
“다른 수가 있어?”
재연의 반문은 추궁처럼 견하의 가슴에 박힌다.
견하는 잠시 재연을 노려보다 고개를 저었다.
“……없지.”
“그러면 일단 이야기는 들어봐야 해. 들어보고 나서 죽여도 늦지 않아.”
“왠지 신수덕은 그때도 자신을 죽일 수 없는 수단을 마련해뒀을 것 같은데…….”
***
보우슈엥과 에스파냐령 마카오의 접경 지역은 원래 군사적 긴장과는 거리가 먼 지역이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명나라 황제에게 머리 조아려 얻어낸 ‘무역을 할 수 있는 자그마한 땅’이 바로 마카오의 기원이다.
이후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을 동군연합 형태로 합병하면서 그대로 에스파냐령 마카오가 되어 지금까지 유지되었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주나라였든 태평천국이었든 이곳을 위협하진 않았다. 포르투갈인이든 에스파냐인이든 이곳을 거점으로 중화 왕조의 정세에 개입하려 들지도 않았고, 굳이 정벌하기엔 너무 작은 땅이었던 데다 내버려 두는 편이 더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이 멸망하고 이 주변을 보우슈엥 왕국이 장악한 후로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육해로를 거쳐 마카오로 온 물자는, 여기서 유럽행 배에 실려 서쪽으로 떠난다. 수백 년을 그렇게 해 왔다.
그렇기에 군사적 긴장은 마카오 사람들에겐 무척 낯선 일이었다. 민간인에게든, 주둔 중인 에스파냐군에게든.
요구사항은 간단했다.
-직접 신수덕을 체포해서 넘기든지, 우리 군이 마카오 내에서 신수덕 체포 작전을 벌이는 걸 양해해달라.
검문소에서 친근하게 인사나 담배를 주고받던 보우슈엥군이 아니라, 낯선 다이온군이 잔뜩 나타나자 마카오 주둔군은 공포로 얼어붙었다.
다이온군 장교가 와서 요구사항을 전달했을 때, 마카오 주둔군의 장교는 거의 상관을 대하는 것처럼 예의를 갖췄다.
어떤 지역에서 평화가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 군사적 위기가 닥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은 곧 군의 예산이 적게 배분된다는 뜻이다.
마카오의 에스파냐군은 불법입국자를 막거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소총을 갖췄을 뿐 화포 같은 중화기는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해도 마카오의 역사를 소개하는 박물관의 유물이 전부였다.
굳이 찾자면야…… 바다에서의 공격을 막기 위한 해안포가 있지만, 그걸 뜯어다 육상에 배치하기엔 시간도 없었고, 다이온군에 비하면 초라한 전력이었다.
게다가 마카오 주둔군이 그런 짓을 한다면 다이온군은 그것을 ‘거부’로 받아들이고 즉각 공격에 나설 게 뻔했다.
수도가 기습당하면서 시작된 전쟁이 아직도 진행 중인 나라였다. 군대를 끌고 와서 하는 요구가 거부된다면 그건 곧 적대 행위로 간주된다.
게다가 요구하는 인물이 다이온의 오랜 반역자이자, 이 전쟁의 배후에 있는 인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에스파냐는 신수덕 하나를 지키겠다고 전쟁을 불사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단 로마 제국의 여권을 들고 온 사람을 에스파냐군의 손으로 체포하는 것도 외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다이온군의 진입을 허용한다. 단, 민간인 피해가 있을 경우 에스파냐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비용을 청구할 것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뒤의 조건은 경고의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에스파냐의 체면을 위한 것이었다. 실상은 부탁에 더 가깝다.
견하도 이 일이 고려 내에서의 권력 다툼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일이라는 건 이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다이온 연방이 에스파냐령 마카오의 존립을 위협하지 않기로 했던 ‘약속’은 견하의 이름으로 체결된 것이었다.
“에스파냐 측의 체면이 손상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안심시키듯 정중한 말로 대답한 직후, 견하는 자신이 데려온 부대 일부를 이끌고 마카오로 진입했다.
에스파냐군은 혹시라도 신수덕이 도주하면 자기들이 시간을 끈 탓이라고 책잡힐 게 두려웠기에, 신수덕이 머무는 숙소 주변을 봉쇄했다. 그들에겐 신수덕을 직접 공격하거나 체포할 의도도 없었지만, 도주를 방조할 생각도 없었다.
주견하가 직접 이끄는 체포조는 당당하게 마카오 한복판으로 진입, 신수덕이 머물고 있다는 한 고급 호텔을 찾았다.
다른 투숙객들이 웅성대며 물러서는 가운데, 신수덕은 아무렇지도 않게 1층 휴식 공간 한복판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왔군.”
“부하도 없이 당당하군.”
“그쪽이야말로, 이게 내 함정이었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들어왔지?”
소개는 필요 없었다. 신수덕도 주견하도 사진을 통해 서로의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몇 년 지났다고 해도 별반 달라지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예우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애송이. 나는 적의 핏물로 세수하고 똥 지린 시체들 속에서 취침하던 군인이다.”
“자만은 안타까운 습관이지. 이 애송이 손에 죽은 허동주도 그러던데.”
아주 잠깐의 정적.
신수덕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견하가 먼저 턱짓했고, 병사들이 달려들어 신수덕의 얼굴을 탁자에 내리찍었다. 어디가 부러지고 터지든 말든, 아니 ‘거친 손길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길 바라는’ 듯한 얼굴로, 병사들은 신수덕의 팔을 억지로 뒤로 당겨 묶었다.
다리도 묶고, 재갈도 물려서 짐짝처럼 들어서 트럭에 던져넣는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신수덕에게, 견하는 웃으며 말해주었다.
“의외였나? 아니면 직접 듣기 전까진 반신반의했나? 본인이 확인해주니 어떤 기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할 시간은 충분할 거다. 네가 그토록 숭배하던 사람의 심장을 이 손으로 찔렀다.”
견하는 붕대를 풀어, 기계적인 질감으로 둔탁하게 빛나는 왼손을 드러냈다.
“날 죽이는 상상이라도 실컷 해보도록.”
***
보병의 앞에 선 기갑사들이 전진한다.
탄환의 속도에도 대응할 수 있는 이단의 기동성을 희생한 대신, 압도적인 내구력을 제공해주는 게 바로 기갑사다.
쏟아지는 탄환 정도는 무시하며 돌진.
도저히 인간이 휘두를 수 없는 크기의 무기로 적을 찍어누른다.
원래 베기 위해 만든 날붙이라 해도 그 정도 질량이면 맞은 사람이 터져나간다.
1929년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당시의 구형 모델이라면 병사가 이단의 탑승부를 조준 사격해서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신병기도 등장한 지 어느새 8년 차. 개량을 거듭하는 중에 자연히 그런 약점은 사라졌다.
최소한 대전차 무기 정도는 퍼부어야 한다. 아니면 이단 여럿이 달려들어 기갑사의 관절부터 절단하거나.
혹은, 똑같이 기갑사로 맞서거나.
다이온측 기갑사 중에 금색 빛줄기를 뿜어내는 것이 하나 있다.
멕시카의 기갑사들은 그것이 다이온 황제의 전용기임을 포착하고 달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