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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97화 (497/541)

인간성의 마지막 조각(12)

카라코룸과 칸발리크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방어전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긴 했지만, 만약 일본 내 ‘친원파’와 협력할 수 있다면…… 불가능한 작전은 아니다.

일본이 끝내 멕시카에 패할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

그때 일본은 다이온의 ‘동쪽 방파제’가 아니라, 멕시카가 대륙으로 건너오기 위한 ‘징검다리’가 되어 줄 것이다.

공간 도약을 통해 수도권에 타격을 입고, 극북에서는 괴물들이 상륙하고 있는데 동쪽 바다에서 멕시카군의 공세를 시작한다?

고려가, 다이온이 그렇게 늘어난 전선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지만,

충동을 내리누른다. 리안은 일본열도 점령 작전이 성공한 ‘이후’를 가정해본다.

한창 멕시카와 싸우고 있던 일본의 군인들이, 다이온군을 등에 업은 ‘신정권’의 명령을 받아들일까?

적어도 절반은 ‘서쪽에서의 침략’에 분노해 멕시카에 항복해버릴 것이다. 멕시카군과 손을 잡고 ‘조국을 되찾으려고’ 뱃머리를 돌리겠지.

나머지 절반은 ‘정권이 뒤집히긴 했지만 그래도 전쟁은 멕시카와 벌이고 있던 것’이라며 일단 수긍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이 되면 전쟁은 일본 내전의 양측이 수행하는 대리전이 되는 건가.

만약 일본열도로 전쟁의 무대를 한정 지을 수 있다면, 리안은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공간 도약을 통한 기습이 가능한 시점에서 무가치한 생각이다.

다이온이 전장을 일본열도로, 다이온인이 아니라 일본인을 주요 희생자로 삼고 싶어도 멕시카가 그러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머리를 헤집어 놓는 짜증이.

“일본공화국 측에, 할 수 있는 한 그쪽의 요구대로 맞춰준다는 조건으로 군사동맹과 공동전선을 제안해봅시다.”

상식을 뛰어넘는 전쟁을 맞이했는데, 대응은 상식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말도 못 하게 짜증이 난다.

-하지만 견하와 조유관이 보고 온 대로, 일본의 ‘귀족화한’ 정치인들은 효율적인 협상 방식을 취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우리 일본은 이러저러한 것을 원한다. 이것이 동맹의 조건이다.’라고 밝혀오는 게 아니라, ‘일본이 만족할만한 협상 조건을 고려 측에서 먼저 제시해달라’고 지껄인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제시된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일본 측은 별다른 응답도 없이 협상을 결렬시킨다.

그러면서 말한다. 고려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배려’ 따위를 입에 담는 순간 아가리를 찢어버렸겠지만.

대원수의 환도를 만지작거리며, 듣는 것만으로도 분통이 터졌던 그때의 외교를 회상한다.

상황이 조금이라도 짜증을 더는 방향으로 풀리면 좋으련만…… 전황은 리안의 어깨 위에 더 무거운 짐을 얹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동명에서도 멕시카군 출현! 황성방위군이 결사 항전 중!”

세 번째 공간 도약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

명나라도 몽골의 기술에 바보처럼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적이 신과 악마를 전장으로 불러내어 싸운다면, 명나라도 신과 악마에 대항할 수단을 마련해야 했다. 당연한 전략적 사고였다.

하지만 잘 되진 않았다.

“……신조차 인간의 사정에 얽매인 건가.”

연구원들을 이끌고 한족 지역을 탐사하며 명나라 시대 연구 흔적들을 찾아내던 한재연의 감상은 그러했다.

“전쟁을 그만두자는 목소리부터, 주원장 개인의 역량, 명교 문제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했군.”

신하들을 잔혹하게 숙청하기로 유명한 명나라의 태조 황제 주원장. 그러나 그도 휘하 명장들의 원정 반대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카라코룸에서 많이 잃기도 했고.”

패배로 국력도 손상되고 체면도 잃은 황제가 원정을 더 고집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 무렵에는 동쪽에서는 이성계, 서쪽에서는 티무르가 함께 몽골 황실을 떠받들며 주원장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주원장과 그 수하들이 명장이라 해도 그 둘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는 없었을걸.”

송나라 이래 오래도록 잃었던 화북을 수복한 데에서 만족하라는 신하들의 외침을, 주원장은 받아들이고 말았다.

명교의 처리 문제도 한몫했다.

“명나라라는 국호 자체가 명교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지만…….”

그러나 명교의 최후는 비참했다. 토사구팽. 다른 말로 형용할 방법이 없었다.

한족 반란의 구심점이 된 신앙공동체, 그것이 명교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까지 닿는다.

주원장 본인도 명교와 깊은 관련이 있었던 듯하고, 몽골의 이단이나 혁세주에 대항할 수단을 연구할 때도 명교가 활약했다.

“하지만 종교가 황제의 머리 위에서 노는 꼴을 볼 순 없었겠지.”

명교의 연구가 성공한다 해도 기껏해야 ‘몽골과 대등해지는’ 상황이 될 뿐이다.

카라코룸 원정 실패, 칸발리크 공성 실패로 주력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주원장은 어느 시점엔가 이러한 연구에 별다른 의욕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연구를 구실로 명교 집단이 성장하는 것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명교에 대한 숙청과 함께, 명나라의 이단, 파멸인 및 혁세주 연구는 중단된다.

“명교의 연구는 주르반이라는 개념까지 닿긴 했던 모양입니다.”

연구원들의 보고를 듣는다. 연구원들은 이번 일이 잘 풀리면 다시 지위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아주 의욕적이었다.

“본래 시간의 신으로 상정되었지만, 어느 순간엔가 공간의 신이라는 개념도 흡수했습니다.”

“시공간에 대한 그들의 관념이 변화한 탓인가, 아니면 흔히 있는 신의 이합집산인가.”

다신교의 발전 과정에서 종종 있는 일이다. ‘같은 신’이 지역에 따라 ‘여러 이름’을 가졌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여러 형상’을 지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이름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각각 ‘다른 신’이 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신’이 비슷한 이름을 공유하면서 하나의 신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주르반도 같은 과정을 겪은 듯하다.

문제는…….

“주르반이 정말로 신종의 하나인가, 아니면 선악을 낳은 개념을 상상해낸 것인가를 파악해야 해.”

“예. 명교는 바로 앞의 뿌리인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까지는 인식했어도 그 너머, 마니가 상정한 태초의 신에 대해서는 상당히 낯설게 여겼던 듯합니다.”

주류 조로아스터교는 선악이라는 쌍둥이 중 결국 선의 우월성과 선의 최종 승리를 믿었고, 이에 따라 ‘선도 악도 시간의 신, 주르반의 아이’라는 식의 해석을 이단으로 몰아갔다.

명교인들은 그 이단적 해석을 발굴해냈다. 그들은 낯설지만 ‘다시 만난’ 그들의 진정한 신을 환희 속에서 경배했다.

주원장의 숙청과 함께 중화의 마니교, 명교는 끝을 맺었지만, 그래도 성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이들의 연구는 명나라를 위한 군사적 유용성이 아니라, 낯선 태초의 신을 찾아내려는 방향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주원장이 이들의 쓸모가 다했다고 판단한 계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중요한 단서를 남겨주었죠.”

“단서?”

“북방의 육로는 몽골에 의해 막혀 있었기에, 이들은 남쪽 바닷길을 통해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본토 페르시아에서 ‘이단’이라 박해받은 종교는 동쪽으로만 퍼져나간 게 아니었다.

서쪽으로도 퍼져나갔다.

“고대 말기의 로마 제국으로 말입니다.”

“거긴 더 일찍 박해를 시작했을 텐데.”

“예. 하지만 흔적을 남기는 데는 성공했죠.”

뭔가 떠오를 것 같았기에 재연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생각을 정리해보자.

로마 제국…… 그들은 지금 메소포타미아도 정복한 상태다.

신수덕은 아마 로마 제국으로도 망명한 것 같다.

멕시카가 벌이는 이 기상천외한 공세에는 신수덕이 개입하고 있지 않을까.

신수덕이 벨리사리우스의 지원을 받아, ‘주르반’에게 닿았다면?

주르반에 대한 어떤 연구 성과로, 멕시카군이 시공간을 주무를 수 있게 된 것이라면?

“설마, 로마 제국이 뒷배인가.”

무심코 그렇게 내뱉고 나서, 재연은 검지를 들어 올렸다.

입술 앞에 수직으로 세운 검지를, 연구원들에게 보여준다.

함구령.

오늘 여기서 말한 것이 새어나가선 안 된다는 명령.

-로마 제국이 동맹을 흉내 내면서 뒤로는 신수덕을 지원하며 2차 세계대전을 종용했다면…… 아니, 그 사실을 알아도 당장은 새로운 전선을 감당할 수 없다.

재연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우리도 주르반에 닿을 수는 없겠나?”

***

동명을 지키는 황성방위군의 전력은, 카라코룸과 칸발리크를 지키던 전력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하긴 했다.

그러나 다른 두 도시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 후 황성방위군 전력 일부가 그쪽으로 차출되는 바람에 다소 약해진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세 번째 공격은 하늘에서도, 지상에서도 오지 않았다.

그들은 지하에서 나타났다.

누군가 동명시 지하철에 파멸인이 나타났던 사실을 기억했더라면…… 아니,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 기억에 카라코룸, 칸발리크에서 일어나는 공격을 연결 지으려면 ‘상상력’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

때문에 각오는 하고 있었어도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칸발리크와 카라코룸의 전력 일부를 다시 떼어내어 동명에 보내는 한편, 주요 도시의 방어 계획을 다시금 세심하게 조정한다.

특히 고려 본토의 상경 지역에 대한 방어가 그러했다. 이곳은 1차 세계대전이든 고려 내전이든 군대를 뒷받침하던 중요한 공업단지였으니까.

“1차……”

견하는 그 말을 한 번 중얼거려본다.

어느새 이런 수식어가 익숙해지고 말았다.

다이온 연방, 일본 및 해상방위동맹, 멕시카가 얽힌 이 전쟁은 확실히 이미 세계대전이다. 재연의 보고 대로라면 로마 제국이 움직이는 것도 시간문제다.

견하는 ‘2차’라 불리는 이 전쟁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가늠해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 전선도, 김천열 원수의 명령도 무시하고 당장이라도 동명으로 군을 움직일 것만 같았다.

충동을 억누르는 데에는 다른 생각, 그것도 깊은 분석을 요하는 생각이 좋다.

“방법을 알아내도, 기껏해야 대등해질 뿐.”

명나라와 주원장이 명교의 연구를 중단시킨 이유 중 하나. 견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멕시카군처럼 공간을 도약해서 아즈텍 대륙을 타격하게 된다 해도, 그것은 멕시카와 다이온의 입장에 대등해진 것에 불과하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것도 보통 압도적이어선 안 된다.

멕시카와 서로 공간을 넘나드는 공방을 주고받는 것으로는 이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

설령 다이온의 원정군이 멕시카를 정복한다 하더라도, 혹은 정복이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로마 제국이 다이온을 기습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잖은가.

벨리사리우스가 신수덕과 결탁했다는 증거가 점점 늘어나고만 있으니, 도저히 안심할 수 없다.

“우리는 마음껏 공격하되, 적은 우리를 공격할 수 없는 그런 상황…… 그 정도로 적을 압도할 수단이 있을까?”

마치 그 물음에 누군가 답이라도 던져주듯, 국면을 뒤흔드는 새로운 소식이 남쪽에서 전해져 왔다.

에스파냐령 마카오에서.

신수덕이 마카오에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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