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의 마지막 조각(9)
도시가 포격을 받는다.
물론 칸발리크도 수없이 외적의 침략을 경험했던 도시다. 명나라, 오삼계의 주나라에서 가한 공격을 물리쳤고, 태평천국에 함락되긴 했지만, 곧 되찾았다.
첫 번째 세계대전 이후로는 혁세주 출현을 제외하더라도 두 번이나 권력 쟁탈의 무대가 되었다.
게레센제와 울제이가 카간 자리를 두고 싸우는 각축장이 되었고, 풍군 작전 때는 루우가 승자로서 입성했다.
당연히 포격에도 대비를 해두었다. 새로운 대포와 건축 기법이 등장할 때마다 무기를 바꾸고 요새를 개량하면서, 육상에서의 공세에 대비해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수도로 육박하는 적이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게 있다. 그 과정에서 수도의 시민들도 마음의 준비를 한다.
예를 들자면 발해만의 항구에 적이 상륙했다. 상륙 저지에 실패했다. 적이 밀려온다. 항전을 준비하라…… 는 식으로 말이다.
적이 누구냐에 따라 사람들이 사태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달라진다.
한족 국가 같은 외세의 침략이라면 결사 항전을 생각한다. 울제이나 루우 테무르라면, 수도 밖에서 승부를 짓고선 ‘통치자’로 입성하리라는 기대를 하기에 긴장감은 약해진다.
그러나 이 정체불명 ‘지상군’의 기습은, 혁세주의 강림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시민들뿐만 아니라 칸발리크 방위군도 그렇게 느꼈다.
하늘, 지평선을 뚫고 갑자기 나타난 미지의 군대.
원래 포격을 두들겨 맞는 동안 군인은 위축된다. 미지의 군대가 가하는 포격은 그보다 몇 배는 더 효과적으로 군인들의 사기를 무너뜨렸다.
아무리 군인 한 명의 육체적 기량보다 무기의 첨단성과 생산력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곤 하지만…… 그래도 사기는 전장의 중요한 요인이다.
군인이라면 당연히 총을 쏘기는 해야 한다. 적의 포격에 반격하는 대포병사격을 할 때도 포병의 기민함이 요구된다.
적에게서 받는 위압감을 떨쳐내고 한 걸음을 내딛는 것, 한 동작이라도 더 수행하는 것.
그것이 사기에 달려 있다.
사기가 부족한 군인은 전장에서 도망치거나 상관을 살해하는 극단적인 경우에 이르진 않는다고 해도, 전투 효율은 분명히 떨어지게 된다.
겉보기엔 사소한 실수들일 수도 있다. 명령을 조금 늦게 알아듣고, 실행에 이르는 동작이 약간 굼떠지는 것 정도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전장이라는 상황에서 움직여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게 누적된다면?
적의 움직임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면?
전투의 패배는 그렇게 소리 없이, 눈에 띄지 않게 찾아온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전투 패배는 칸발리크의 함락으로 이어질 것이다.
-칸발리크 방위군의 사기를 진작해야 한다.
김천열 원수와 카라코룸으로 옮겨 온 참모본부는 그런 결론에 이르렀다.
-현시점에서 사기를 진작할 가장 빠른 수단은 지원군의 도착이다.
김천열 원수가 주견하 대장에게 명령한 서남방면군의 북상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김천열의 지휘인가.”
불과 몇 달 만에 행정 관료에서 다시 지휘관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견하는 그 감각을 신선해 하면서도 즐기진 않았다.
즐길 틈이 없었으니까.
세 개의 한족 관리 특구, 보우슈엥과 대예, 응천 행정장관이 관리하는 각 도에 걸쳐서 서남방면군은 흩어져 있다.
그 군대를 어디는 주둔지를 지키고 또 어디는 이동시켜 중간 집결지를 설정하고 재편해 북상시킬지…… 그걸 논의하고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작업이었다.
응천 행정장관의 업무는 각 도 부지사의 협의체에 위임했다. 견하 자신은 서남방면군 사령부도 북상시켜, 칸발리크 서남쪽 교외에 자리 잡도록 했다.
견하의 사령부를 중심으로 포진한 서남방면군은 그대로 도시의 외곽을 지키면서, 각각 도시 북부와 동부의 적을 공격한다. 또 한편으로는 도심으로도 군대를 일부 진주시켜 치안을 보조하면서 주민들을 안심시킨다.
칸발리크 방위군을 지휘하는 장교들도 자연스럽게 견하의 사령부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참모본부에서 내려온 명령도 명령이고 군대의 규모도 규모지만, 돌아가는 정세가 그의 지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설령 실각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이 전쟁을 기회로 주견하는 다시금 권력 중추에 다가서는 게 아닐까.
주견하의 갑작스러운 진급, 그에게 집중된 권한은 그런 추측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주견하보다 훨씬 먼저 대장 계급에 오른 사람들조차, 일단은 그의 지휘를 지켜보기로 한다.
정치감독청에서 공작을 펼치는 것과 대군을 지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지만 혹시 모르잖는가.
주견하는 풍군 작전이라는 위대한 작전을 입안하고 성공시켰다. 참모장교로서 자질은 충분하다.
‘정통파’를 자처하는 완고한 군인들도 ‘신진’ 장교들의 움직임은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다. 이번 칸발리크 방위전에 투입된 그들은 주견하의 복귀와 지휘에 열광하고 있다.
만약 주견하가 이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그는 정계에도 화려하게 복귀할 것이다. 신진 장교들, 정치감독청과 여당인 제국입헌당의 ‘신진’을 아우르며 정치, 사회, 군 모든 면에서 무시무시한 괴물로 두각을 나타낼 것이다.
그렇다. 전쟁의 와중에도 권력은 작동한다.
괜히 주견하더러 ‘어린놈이 건방지게……’ 하며 질시하기보다는, 주견하라는 동아줄을 어떻게 붙잡을지 고민하는 게 더 생산성 있다.
이 전쟁에서 주견하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것. 그리하여 주견하가 ‘참모로 쓸모가 있다’라고 장성들을 평가하는 것.
기회가 왔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잖은가.
그러니 열심히 의견을 말한다.
“주 장군, 작금의 과제는 칸발리크의 수호임에는 틀림없으나, 넓게는 수도권 전체의 물류 회복일세.”
대장의 발언이었다.
다이온의 각 도시 주식시장도 요동쳤을 테고, 아직 전쟁에 말려들지 않은 나라들의 금융도 곤두박질쳤겠지.
전쟁이 일어난 이상 그런 문제까지 신경이 닿진 않겠지만, 어쨌든 장기적으로는 산업 중심지가 입을 타격을 최소화해야 한다.
칸발리크와 동명, 넓게는 카라코룸까지.
“공간을 도약한 멕시카군은 공교롭게도 칸발리크의 동북쪽을 장악하고 공세를 퍼붓고 있습니다. 이는 칸발리크의 북쪽, 동쪽 교통망이 끊겼다는 의미입니다. 동명, 카라코룸과의 단절은 길어질수록 좋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중장 하나가 그렇게 의견을 상신한다.
산업은 해당 지역에 얼마나 큰 공업단지가 배치되었는가에만 달린 게 아니라, 다른 지역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도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산업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단순히 군의 보급만 생각하더라도 전투는 오래 끌지 않는 게 좋았다.
병사들의 식량, 탄약뿐만 아니라 각종 화포에 들어갈 포탄. 그것들을 서쪽으로 빙 돌아온 열차를 통해 받는다고 해도, 그 열차는 석탄을 먹는다. 집화까진 또 어찌어찌한다 치더라도 다시 전선으로 운반하는 차량은 기름을 먹는다.
차량이 아니라 우마차라는 전통적인 수단을 활용할 경우엔 꼴을 먹는다.
전장이 자국 내라고 해서 이런 보급의 문제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아니다.
“속전속결이어야겠군요.”
견하의 말에 다시 대장 하나가 의견을 보탠다.
“칸발리크를 빠르게 정리하고 카라코룸을 구원해야 하네. 동시에 다른 방향에서의 침공은 없는지도 경계해야 하지. 적이 이런 기상천외한 수단을 마련한 이상 전 국토가 언제든 전장이 될 수 있다고 가정해야 할 걸세.”
“한 전장에서 빠른 전투 종결 후 언제든 적의 공간도약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전군이 기동타격대가 된다고 생각해야겠지.”
“적이 오면 그제야 대응해서야…… 장기적으로는 좋지 않습니다.”
일단 적이 가한 첫 공세의 피해에는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한 전장에서 적을 격퇴한다 해도 입은 피해는 누적된다.
그게 반복된다면…… 그 반복으로 마침내 다이온과 멕시카의 전력이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다면……?
“하지만 멕시카가 동시다발적인 공간도약을 한다 해도, 분명 한계는 있을 걸세. 아무리 허공에 문을 여는 짓거리를 할 수 있다고 해도 결국 건너가서 싸워야 하는 건 우리가 잘 아는 병기들이기 때문이지.”
“적도 소모는 되겠죠. 그러나 본토가 타격받지 않는 이상 그런 소모는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고요.”
그러니, 지금 눈앞의 적을 격퇴하는 것만큼이나 ‘반격의 방법’ 혹은 적의 공간도약을 원천 봉쇄할 방법을 찾아내는 게 중요했다.
“최고사령부와 참모본부에서 혁세주, 파멸인 관련 기술을 전면 검토하며 방법을 찾고는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 결과를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칸발리크 방위전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방법을 고민해주시기 바랍니다.”
***
칸발리크를 공격하는 멕시카군의 보급 문제는, 육상 보급을 하기에 카라코룸 쪽보단 낫긴 해도 금방 비슷한 문제에 부딪혔다.
반면 광활한 지역에 분산 배치되어 있던 다이온 서남방면군은 서서히 증강. 포격으로 적의 공세를 격퇴, 대포병사격으로 적 포병을 무력화할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에 더해 화하 특구, 개봉 행정장관이 관할하는 키타이 민족 지역에서 끌어모은 군대도 서남방면군 사령부의 지휘 아래 집결.
사령관을 맡은 견하는 일단 참모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상식적인 방침만을 정해둔 채, 전술적인 문제는 참모들의 재량에 맡겨두었다.
무책임한 듯 보여도 전문가의 의견에 함부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믿고 맡기는 것. 그것도 지휘관의 역량이다.
다만 ‘모든 책임은 사령관인 제가 집니다’라는 자세만 버리지 않으면 된다. 창의적인 전략 전술을 내놓을 부담을 줄여줄 뿐만 아니라, 장교들의 호감을 사는 데도 좋다.
그러나 전투를 지켜보면서 견하의 마음은 두 가지 문제로 인해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하나는 이렇게 긁어모아 100만을 헤아리게 된 서남 방면군의 민족 구성이다.
광군 동원이 시작되긴 했지만 고려 본토에서 끌어모을 그 병력은 대부분 카라코룸, 또는 아직 공격받지 않은 고려 지역의 방위에 투입될 것이다. 그러니 서남방면군의 규모가 너무 커질 걱정은 없지만…….
“구성원 중 적지 않은 수가 한족 출신이군요.”
“한족 출신이긴 하지만 몽골어나 고려어, 또는 두 언어 모두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정신적인 면도 확실히 다이온화 되었습니다.”
천천히 걸으며 그런 감상을 말하자, 참모 하나가 약간 뒤에서 보조를 맞추며 설명한다.
연방화 혹은 다이온화. 그것은 한족이 얼마나 고려인처럼, 몽골인처럼 행동할 수 있게 되었는가를 의미했다.
간혹 자신을 ‘키타이 민족’이나 ‘낭키아스 민족’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도 다이온화라는 말을 쓰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지금 서남방면군에 없다. 군인으로 쓰기엔 부적합하니까.
적어도 몽골어나 고려어로 내려오는 명령 중 하나는 이해할 수 있어야 군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