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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93화 (493/541)

인간성의 마지막 조각(8)

내전을 거치면서 많은 중세식 이름들이 사라졌지만, 예비군을 의미하는 ‘광군’이라는 이름만큼은 여전히 남았다.

예비군을 동원했다는 건 국가총동원도 머지않았다는 의미다. 강태훈은 짧은 전보 하나로 김천열에게 앞으로 그 밑으로 새로 편성된 사단과 군단이 속속 배치될 것임을 알렸다.

“그렇게 알려주지 않아도 이번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잘 알고 있는데…….”

한숨을 쉬며 열차에 오른다.

느긋하게 쉴 시간 따윈 없다. 태사와 황제 앞에 도착하면 늘어놓아야 할 말을 구상해본다.

카라코룸에 도착하면 자신을 위해 준비된 참모들이 있을 테고, 그 참모들의 도움도 받겠지만, 그 전에 홀로 명상하듯 짜 본다.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다. 완전히.

김천열은 늘 이단이 전장에서 이질적인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물론 착검 돌격과 백병전은 현대전에도 남아 있다. 그러나 이단은…… 종종 고대나 중세의 영웅, 용장들에 비유되곤 한다.

근대 이후에도 남은 옛 전쟁의 흔적.

그래서 김천열은 이단이 전술적인 의미는 있어도 전략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긴 어렵다고 보았다. 기갑사가 나타난 이후로도 그랬다.

전략폭격의 시초, 평양 공습은 30년 전의 일이고, 제대로 된 폭격기로 지역 단위, 국가 단위 전략폭격을 논의한 지는 20년 가까이 되어 간다.

아무리 기갑사가 잘났다 해도 마모된 부품을 보충해 줄 후방의 공장이 모조리 날아갔다면 전장에서 계속 싸울 수 있을까?

아무리 이단이 뛰어나다고 해도 주린 배를 안고 계속 싸울 수 있을까?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칸발리크 사태 때부터 어렴풋이 느끼긴 했다.

물론 그것도 자연재해…… 그러니까 태풍이나 지진이 강타해 무너진 적의 요새를 공략한다는 감각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런데 이렇게 군대를 동원한 전면 침공이, 그것도 적의 심장부를 향한 기습 공격이 가능할 줄이야.

-이젠 전후방의 구분이 없어지는 건가.

-혹은 거리를 상정한 전략 입안은 과거의 유물이 되는가.

실제로 카라코룸에 가서 살펴보기 전엔 확실하지 않겠지만, 자신이 배우고 익힌 전쟁은 잊어야 할 거라고, 김천열은 각오했다.

***

“끝내 교두보를 내어주고 만 겁니까…….”

상황은 각오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공수부대의 개념이 도입된 이래, 그 작전의 희생은 어마어마하리라는 예측은 이미 있었다. 대공포도 대공포지만 낙하산이 어디 높은 건물 모서리에 걸리는 것만으로도 그 군인은 죽는다.

추락해서 바닥의 핏자국이 되거나, 아슬아슬하게 어디 매달려도 좋은 표적이 되어 공중에서 대롱대롱 썩어가는 시체가 된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표적이 쏟아진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폭격이 쏟아져, 대공포가 무력화된다면?

“황궁은 내줬고, 그 주변에 적 공수부대가 집결하면서 작은 거점들이 형성됐다. 몰아붙여서 합류 전에 섬멸한 곳도 있지만, 상당수가 합류에 성공해서 튼튼한 교두보 확보에 이르고 말았지.”

태사는 초인적인 정신력인지 아니면 이 상황에 질려버린 것인지 담담한 어조로 김천열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카라코룸 시가지를 그린 작전지도, 그 위에 덧칠한 멕시카군이 장악한 지역, 거기에 대응하는 다이온군의 움직임을 보면서 김천열은 미간을 찌푸렸다.

“보통 이런 경우, 까다롭긴 해도 ‘보급이 끊긴 적을 시가지 안으로 몰아넣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태사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김천열이 흐려버린 말이 뭔지 안다는 듯 끄덕였다. 다른 참모들을 돌아본다. 그들 모두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

“내 입으로 하기에 황당한 말이긴 해도 적은 하늘에 열린 구멍을 통해 보급을 받을 수 있다.”

“즉, 이 상황에서 시민들을 소개(疏開)하고 카라코룸 시가를 봉쇄해 적의 고사를 노리는 작전은 쓸 수 없습니다.”

참모 하나의 재빠른 말에 김천열은 동의했다.

“그렇다. 이곳이 연방의 신수도라는 정치적 배려를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현 상황에서 더 물러날 순 없다.”

물러나봤자 멕시카군은 카라코룸을 완전히 장악하고 머리 위에서 보급을 계속 받으며 점령지를 확대해 나갈 것이다.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공중보급의 효율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적이 기괴한 침공방법을 쓰긴 했지만, 나머지 전투는 여전히 우리가 아는 그것이다.”

항공기의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여전히 항만, 도로, 철도를 이용한 보급의 효율성을 따라잡진 못했다.

하늘에서 낙하산에 보급품을 매달아 투하하는 방식은 필요한 곳에 전달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수송기를 매번 비행장에 착륙시킨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소모되는 연료, 수송기 한 대에 실을 수 있는 화물의 양, 화물의 적재와 하역에 드는 시간, 그에 따라 한 번에 비행장을 이용할 수 있는 수송기의 수…….

“적이 비행장을 확보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이다. 어떤 식으로든 적의 보급 사정이 개선되는 일은 막아야만 한다. 제군도 알다시피 카라코룸 주변 모든 비행장에서의 교전은 진행 중이다.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방어에 성공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겐 지켜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김천열은 작전지도의 특징적인, 원형 구조물을 가리켰다. 실제로 밖에서 보면 탑이나 피라미드처럼 높게 솟은 그것은 발전소다.

카라코룸 시민들에게 온수와 전기를 풍족하게 공급한다는, 시레문 카간의 야심작.

“아직은 추운 계절이다. 적은 발전소를 파괴하거나 장악해서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반면에 우리가 시민의 안전을 지키고 나아가 카라코룸의 도시 기능을 유지하려면 발전소 방어는 비행장 방어와 함께 이번 작전의 주요 목표라 하겠다.”

김천열과 참모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미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답은 ‘파상공세’ 뿐이군.”

“유감스럽지만 그렇습니다, 합하. 희생을 각오해야 할 때입니다.”

병사들을, 사람들을 고기 분쇄기로 밀어넣는다. 그런 무식한 방법으로 고기 분쇄기를 밀어낸다.

그 과정에서 사람뿐만 아니라 주변 시설도 상당히 손상되겠지만, 적이 비행장과 발전소로 튀어나오는 걸 수동적으로 방어하는 것보다는 낫다.

무엇보다도 이번 전투는 적의 교두보를 최대한 빠르게 걷어내는 데 승패가 달렸다.

“문제는 지상에서 적을 일소하더라도, 하늘의 저것을 어쩌냐는 거지.”

“일단 카라코룸 주변의 모든 공군기지, 항공 전력을 총동원해서 대응하겠습니다.”

들어오는 족족 깨부수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

순간 리안은 ‘전력이 충분히 집중된다면 역으로 우리가 저 구멍을 통해 적의 본토를 타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곧 마음속에서 기각한다.

도대체 저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아군을 들이밀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위험성도 위험성이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만약 다이온군이 맥시카군의 교두보를 걷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건 다이온군의 강력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 하늘의 문을 통해 대양 건너편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려주는 것이다.

같은 문제가 여기서 멕시카를 공격할 때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격을 시도했을 때, 여기서 멕시카군이 개죽음을 당하듯 다이온군이 아즈텍 대륙에서 개죽음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

-너무 앞서나간 가정인가.

고개를 털듯 리안은 작전도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김천열과 참모들은 즉각 행동에 돌입했다. 어쨌든 그들은 제국 전체에서 선발된, 유능한 장교들이었다.

***

세련에서 일어난 쿠데타 이후, ‘서남방면군’의 지휘를 응천행정장관 앞으로 일원화한다는 명령이 내려왔었다.

중장 계급까지 박탈된 건 아니기에, 견하는 다이온군의 장교 신분으로 강회, 형초, 파촉 특구와 대예, 보우슈엥 두 왕국을 돌며 각 군대를 다이온군으로 통합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물론 대장 계급의 상급자까지 있었지만, 응천행정장관의 ‘요청’에 응해 ‘다이온 서남방면군’으로 통합시키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동명에서 떨어져나왔음에도 여전한 견하의 위세, 그리고 세련의 급변 사태에 따른 위기감이 일을 수월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보우슈엥에 체류하다 문득 마카오에서 에스파냐와 접촉해 정보를 얻어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카라코룸에서 일이 터졌다.

소식을 듣자마자 견하는 응천으로 귀환했다.

서남방면군 전체에 준비태세를 명령하자마자, 대장 계급장이 내려왔다.

“김천열 대장은 원수가 됐겠군.”

김천열이 카라코룸으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대충 돌아가는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일단 지휘관으로서의 실력이 입증된 김천열이 사태에 대응한다.

견하는 대장으로 높여 계급에 따른 지휘권 마찰 문제를 없앤다. 서남방면군은 대기를 명 받았지만, 사태가 심각해지면 역시 북상해서 아군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서남방면군까지 동원한다는 건, 한족 치안이나 세련과의 국경 문제도 무시할 만큼 상황이 심각해졌다는 뜻이지.”

그 정도로 심각해지지 않길 바라면서, 견하는 응천의 집무실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매일.

초조감으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카라코룸의 상황은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만약 칸발리크와 비슷하다면, 그곳에 리안이 고립된 걸까? 지휘소는 왜 동명이나 카라코룸으로 옮기지 않는 거지?

왜 나를 부르지 않는 걸까?

기다린다.

당장이라도 자기 휘하의 군을 출동해 북상하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기다린다.

어쨌든, 리안의 권위와 권력은 절대적이다.

서남방면군을 움직이는 것은 정치감독청을 움직여 제국정보사령부를 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 정도의 도전은 할 수 없다.

하고 싶지 않다.

그가 지키고 싶은 것이니까.

리안의 권위도, 권력도, 명예도, 이상도, 그녀 본인도…….

그렇게 기다리고만 있는데, 결국 응천행정장관 겸 서남방면군 사령관 주견하에게도 명령이 내려왔다.

-즉각 북상하여 칸발리크 방위군을 도울 것!

견하가 향할 곳은 카라코룸이 아니라 칸발리크였다.

***

칸발리크 시민들은 카라코룸의 소식을 들은 후로는 불안한 눈길로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조금 다르다곤 해도 몇 해 전에 칸발리크에서 일어났던 일을 연상시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하늘에 누군가 핏빛 물감을 떨어뜨린 듯, 그렇게 붉은색이 번져나가기 시작했을 때, 반쯤은 체념한 것처럼 상황을 받아들였다.

물론 감정의 나머지 절반은 공포였지만.

온 사방이 이가 붕괴하는 인간의 비명으로 채워졌던 그 날의 악몽.

악몽을 현실에서 마주했다고 생각했는지 도시의 절반은 미쳐버렸다. 그러나 절반은…… 마치 원수를 갚겠다는 듯, 이날을 대비해왔다는 듯 하늘에서 출현한 적에게 맹렬한 대공포화를 퍼부었다.

칸발리크는 혁세주 출현 사태 이후 도시의 기능을 회복하기보다 방공망을 구축하는 데 복구 역량을 집중시켜 왔다.

덕분에 칸발리크는 세계에서 가장 촘촘한 방공망을 갖춘 도시가 되었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멕시카군의 침공도 저지하는 듯 보였다.

하늘의 구멍이 갑자기, 북쪽 지평선까지 길게, 길게, 아래로 찢어지기 전까지는.

지평선까지 그어진 그 검붉은 틈새에서, 전차를 비롯한 멕시카 지상군이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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