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의 마지막 조각(7)
아즈텍 연방 시절 대사관 직원들 일부는 새 조국이 된 멕시카의 방침에 따라 본국으로 철수했다.
도저히 멕시카의 파시스트 정권을 위해 일할 수 없었던 이들, 혹은 정권 쪽에서 먼저 배척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망명을 택했다. 고려로 망명한 이들도 있고 유럽으로 간 이도 있다.
이후 고려-다이온과 멕시카 자주국 사이에는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진 적이 없기에, 당연히 동명과 칸발리크의 대사관 건물도 텅 빈 채였다.
어떻게든 대화를 시도하려는 모든 노력은 어떠한 답변도 받지 못했다.
멕시카가 어떤 식으로 국제 정세를 바라보고, 또 거기서 어떤 이득을 거두려는 것인지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남쪽의 잉카 공화국을 통한 간접적 접촉은 가능했지만, 그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었다.
멕시카가 고려에 대한 적대 관계를 청산할 생각이 없다면, 고려로서는 전쟁에 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멕시카의 생각이 바뀔 때까지 그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자제한다는 방침을 세워뒀었다.
긴장 국면은 이어지겠지만, 긴장이란 시간과 함께 누그러지는 법이므로.
허나 처음부터 오로지 전쟁을 일으켜 상대를 멸망시킬 생각뿐이었다면, 그 모든 가정은 무너진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루우는 탄식했다.
옛날 사람들은 운명의 가혹함에 대해 하늘을 원망했다는데, 루우에겐 원망할 곳이 없다.
하늘 위에 신은 없다는 걸, 신에 가장 가까운 짐승들은 그저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신비하게 반짝이는 별들 너머에는 인간을 멸하려는 악의가 꿈틀댄다는 걸 알기에.
몽골과 고려의 통합을 선언하는 중요한 행사를 망쳤고, 카라코룸으로 천도한다는 「화림 계획」의 앞날도 불투명해졌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일에 비하면 이 모두가 사소한 고민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 이곳저곳에 생기던 균열은 어느새 하나의 거대한 구멍이 되어버렸다.
그 검붉은 구멍 너머에서는 처음엔 기계와 살점이 뒤섞인 무언가가, 나중에는 반쯤 파멸인이 된 인간이, 마지막으로 멀쩡한 기갑사 부대와 공군이 쏟아졌다.
첫 공세…… 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폐기물의 추락 직후 룡황에 타러 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맨몸으로 싸울 뻔했다.
금빛 갑주가 비늘처럼 꿈틀대며 빛난다. 황제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고 장식을 주렁주렁 달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능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기갑사 룡황은 새로운 모델이 개발될 때마다 가장 먼저 개량됐으니까.
붉은색으로 일렁이는 하늘은 미쳐 날뛰는 듯하다. 그런 하늘을 보면서도 병사들이 미쳐버리지 않는 건, 지상의 태양처럼 빛나는 황제의 모습 덕분이다.
“윽-!”
다이온 병사가 반쯤 얼굴을 돌린 채 방아쇠를 당긴다.
얼굴의 절반이 녹아내리고, 그 자리에 긴 촉수가 돋아난 적병의 모습은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운 것이긴 했다. 인간의 시체는 아무리 처참해도 인간의 것이기에 ‘무뎌질’ 수 있지만, 파멸인은 그렇지 않았다.
인간인 듯하면서도 인간이 아닌 그 기묘한 감각이, 위액을 역류하게끔 한다.
아마도 인간의 깊숙한 곳 어딘가, 원리를 유지케 하는 무언가를 자극하는 것이겠지.
그걸 민감하게 느끼는 이단은 두통까지 겪곤 하지만, 이번엔 불행 중 다행으로 혁세주나 신종의 씨앗은 보이지 않았다.
즉, 이번 일은 혁세주 출현과는 조금 다르다.
사살하고, 베어낸 적의 옷차림은 분명 군복이다. 찢어지고 헤져 있어도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국기는…… 멕시카의 것입니다, 폐하!”
전투와 하늘의 이변에서 비롯된 공포. 그러나 그 자리에 황제가, 아름다운 그녀가 함께한다는 고양감. 금빛의 기갑사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듯 몸을 돌린다는 영광스러움.
그 모든 감정이 뒤섞인 병사의 표정을 보다가, 루우는 그가 가리키는 것을 향해 눈을 돌렸다.
뱀. 아즈텍 대륙 특유의 투박하고 굵은 선으로 표현된 문양. 우스운 듯하면서도 어딘가 음산한 그 느낌.
본래 아즈텍 연방이 쓰던 것과 비슷했지만, 멕시카 자주국의 국기는 거기에 ‘전쟁기’라는 인상을 추가한 것 같았다.
더 흉포하다.
하긴 흉포하니까 이런 공격을 가한 거겠지.
“어떻게 그런 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을 통로로 이용한 건가.”
파멸인과 혁세주에 관한 한 멕시카는 다이온의 기술력을 아득히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앞으로의 일이 암담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쟁은 시작됐고, 헤쳐 나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적은 마음껏 제국의 깊숙한 곳, 카라코룸까지 들어왔는데 다이온은 멕시카 본토를 타격할 방법이 없다.
적이 하늘의 구멍에서 얼마나 쏟아질지, 이 방어전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이 전쟁은 틀림없이, 길게 이어질 것이다.
긴 전쟁 속에서 이런 기술 격차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패배는 예정된 일이다.
황제는 기갑사 안에서 고개를 저었다. 벌써부터 패배를 생각할 순 없다.
“재정비한다.”
루우의 곁으로 기갑사들이 모인다. 일단 기갑사가 보병을 보호하는 방벽이 되어 주어야 한다.
전차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곳도 있지만, 아무래도 전차포는 백병전이 가능한 기갑사의 무기에 비해 이런 시가전에 부적합하다.
일반적인 제국이라면 황제는 후방의 ‘최고사령부’에서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우는 전선에 서기를 고집했다.
바로 얼마 전에 카라코룸을 연방의 수도로 선언했다. 이제 시민들과 황제는 똑같이 카라코룸에 집이 있는 사람들이다. 시민들이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해 싸우듯, 황제 역시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말로는 수도로 삼겠다고 했으면서 하루도 안 되어 예전 수도로 도망친다면 꼴이 말이 아니라고, 루우는 생각했다.
룡황에 맞도록 크기를 조절한 언월도를 앞으로 죽 내밀고, 전진한다.
반쯤 변이하다 만 멕시카 군인은 딱히 위협적이진 않았다. 아직 파멸인이 되지 않은 탓인지 촉수를 휘두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남은 인간의 몸뚱어리로 총을 쏘지도 못했다.
“멕시카에서 여기까지, 문을 통과하는 동안 변이가 된 건가.”
그렇다면 멕시카는 이 침공 작전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예상조차 하지 못한 채 진행했다는 의미가 된다. 파멸인을 카라코룸에 쏟아부을 생각이었다면 군복을 비롯한 장비가 아무리 싸다고 해도 그 비용을 감당했을 리가 없다.
처음 떨어져 내린 게 인간의 살점과 뒤섞인 기갑사로 추정되는 무언가…… 였다는 걸 생각하면 멕시카의 준비가 어설펐음은 더욱 명백해진다.
멀쩡하게 떨어져 내렸다면 선봉과 그 후속부대가 되었을 그 구성. 하지만 멕시카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일단 문을 열고 들이밀었다.
그 사실이 약간 위안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위안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제는 멀쩡한 것들이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폭격기가 하늘의 구멍을 통해 들어온다.
비행선이 그 육중한 몸을 드러낸다.
낙하산이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괴물도 아직 다 처리하지 못했는데, 제대로 된 군대의 전면 침공이라니.
폭탄이 공기를 찢는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대공포화가 하늘을 뒤덮었지만 완벽한 방어막을 만들진 못했다. 틈을 비집고 적 항공기의 기관포가 불을 뿜으며 다이온 지상군을, 새로운 수도를 지키기 위해 배치된 시설물들을 찢어발겼다.
눈앞에서 황궁의 전각이 무너진다. 보이지 않는 괴물이 베어 물기라도 한 것처럼 기와지붕이 없어지더니, 순식간에 불타오른다.
망연자실한 루우에게 태사의 사령부에서 무전이 왔다.
-황공하오나 폐하께선 황궁에서 물러나시길!
리안의 사령부는 황궁이 위험한 곳이라고 판단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사령부가 그렇게 판단했다는 것은, 적의 공격이 지금 황궁에 집중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문득, 루우는 지금 자신이 겪는 일이 30년도 더 전에, 그녀의 친척인 제2 제국 황실이 겪었던 일과 무척 유사하다는 걸 떠올렸다.
“그런가.”
씁쓸한 깨달음을 중얼거린다.
“카라코룸은 짐의 평양인가.”
태평천국의 평양 폭격이 세계대전의 동아시아 전선을 열었듯이, 멕시카의 카라코룸 폭격은 새로운 세계대전을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중얼거림은 사실을 확인할 뿐, 일어난 사건을 되돌리진 못했다.
***
김천열은 이번에도 진급의 기쁨을 누릴 수 없었다.
진급에서 누락된 게 아니다. 그는 결국 원수 계급장을 받았다. 대원수인 태사 합하 바로 아래다.
경력의 정점.
다른 쟁쟁한 정치가들에 밀리긴 했지만 여기까지 오면 다음 태사 후보로도 거론될만한 위치다.
미리안을 제치지 않는 이상, 제국 군인의 신분으로 더 올라갈 곳은 없다.
그러나 태사 합하나 황제 폐하가 직접 계급장을 달아주며 정식 의례를 치르지 않고 ‘알아서 달고 오라’며 통보를 받은 데서 이 진급이 어떤 의미인지는 명확했다.
“와서, 또다시 죽음과 함께 춤추란 말이군.”
물론 계급이 올라갈수록 전장에선 멀어진다.
원수쯤 되어서도 후방 사령부에 앉아서만 판단할 순 없기에 전선 시찰을 나가긴 해야겠지. 그러나 총으로 적의 뇌수를 흩어버리고 대검으로 적의 내장을 끄집어내야 하는 병사들만큼은 아니다.
그가 춰야 하는 죽음의 춤은 그런 병사들의 목숨을 휘젓는 춤.
발 한 번 잘못 디디면 수만 명의 목숨이 한순간에 사그라드는 그런 춤이다.
중압감에 토할 것 같다.
명령대로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군인이지만, 이 전쟁이라는 것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모든 전쟁이 낯설다. 사관학교에서 배웠던 것, 훈련받은 것, 소장 계급에 사단장이 될 때까지 쌓은 경험들 모두와 완전히 다르다.
내전도 낯설었다.
삼한반도 토벌전도, 몽골 내전도, 한족 반란 진압도, 풍군 작전도, 어느 것 하나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군에 남아 있는 건, 이게 잘하는 일이어서겠지.
김천열은 사단장이 될 무렵까지만 해도 자신이 명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전선의 어디 한 부분을 유지나 할 수 있으면 다행인, 그런 역할로만 준비된 자라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이 같긴 어려운 법이니.
쓴웃음이 나와야 할 대목이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 놓인 건 ‘진짜 전쟁’…… 물론 모든 전쟁은 진짜였지만 김천열의 평생 겪은 전쟁을 모조리 가짜로 만들어버릴 듯한 국가 간 전면전이었다.
정신을 칼처럼 벼린다.
황성방위군 사령관 자리를 내려놓고, 이제 전쟁을 지휘하러 카라코룸으로 간다. 아마도 고려와 몽골 본토, 극북 지역 모두의 지휘를 맡게 될 것이다.
원수급이 된 자신을 위해 준비된 열차가 있다. 그 열차에 막 오르려던 순간 이번에는 전쟁성 장관의 연락을 받았다.
-광군 동원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