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의 마지막 조각(6)
“여기서 유럽에 우발적 사고 하나, 그 지도자 중 누군가 ‘충동적 결단’을 한 번만 내리면, 그대로 세계대전 직행이야.”
황제 루우와 함께 카라코룸으로 온 리안은, 몇 번이고 했던 이야기를 그렇게 또 반복했다.
루우는 별다른 불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러는지 아니까.
저 행동은 곧 선포될 몽골과 고려 두 나라의 완전한 합병을 앞둔 긴장의 표현이었다.
또 왜 이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 자기 자신에게 변명하듯 들려주는 말이기도 했다.
리안의 얼굴은 전보다 더 초췌해져 있었다.
그러나 멍하니 기운 없는 표정은 아니다. 피로와 긴장, 압박감에 짓눌리긴 했어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정한 사람의 얼굴이다.
루우는 리안을 안고 다독여주었다. 두 사람 모두 오늘 일을 위해 예복 중 최상의 것을 골라 입었다.
황제는 손끝에 닿은 리안의 어깨가 살짝 떨림을 느꼈다.
“……먼저 나가 있을게.”
선포는 황제의 이름으로 이뤄진다. 태사 미리안은 신하 중 한 사람의 위치로 내려가 황제 앞에 예를 갖춰야 한다.
그래도 백관의 우두머리이니 그 역할이 가볍지 않다. 그러니 먼저 나가서 분위기를 잡는 것이다.
루우는 짧게 끄덕였다.
리안이 먼저 나가고 나서 잠시 뒤, 루우도 궁내부 직원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겼다.
정전(正殿) 앞에 도열한 백관이 자신에게 예를 갖추는 광경은, 이제 황제가 된 지 8년째에 접어드는 데도 늘 새로운 웅장함이 있었다.
아니면 오늘은 다른 때보다 특별한 날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늘어선 백관은 전근대와는 다른 이름으로 이 자리에 섰다.
리안이 칸발리크에서 시반에게 통보했던 대로, 기존 쿠릴타이 의원들은 참의원 의원으로, 제국최고회의 의원들은 민의원 의원으로 참석했다.
그 외에도 연방수도 카라코룸의 정부를 구성할 각료들은 몽골계 인사와 고려계 인사가 섞여, 두 나라 두 민족이 하나 됨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이 모든 과정 역시 사진과 영상으로 남는다. 오늘 의식은 선전 영상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한 편의 영화로 남을 수 있도록 리안이 특별히 신경 썼다고 들었다.
연설문, 황제의 조칙이라 불리는 것을 직접 읽는다.
모두가 옥음이라 칭송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이곳, 칸발리크에서도 동명에서도 멀리 떨어진 북방의 황궁에서 울려 퍼진다.
“……이에, 두 나라 두 백성, 두 조정을 하나로 통합하노라.”
리안이 앞으로 걸어 나온다.
루우가 고려의 황제로 즉위했던 날처럼, 만세를 외치기 위해서.
그러나 리안이 한껏 숨을 들이마시며 양팔을 들어 올리려던 바로 그 순간.
하늘이 어두워졌다.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먹구름이라도 끼는 것처럼 서서히 어두워지는 게 아니라, 방의 불을 꺼버린 것처럼 갑자기 어둠이 황궁을 뒤덮었다.
하늘을 올려다본 루우의 얼굴은, 오랜만에 공포로 굳었다.
부유하는 산이 어느새 이곳에 와 있었다.
“아직…… 시간이 있었을……?”
그렇기에 신중하게, 폭파해도 안전한 곳까지 날아갈 때를 기다리고 있었건만.
루우의 망연자실한 중얼거림에 답하듯, 부유하는 산은 균열을 일으키다 터져나갔다.
아니,
터져나간 파편들이 공중에서 정지했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자 그것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아니 터진다. 아니 돌아갔다.
기괴한 광경이었다.
파괴와 재생의 반복…… 이 아니다.
폭발한 시간과 그 이전의 시간이 반복된다.
이 지표면 위에서, 저 부유하는 산을 둘러싼 시간만이 어긋나 있다. 사람들의 눈은 시간의 어긋남을 저렇게 기묘하고도 우스꽝스러운 두 장면으로밖에 인식할 수 없다.
세상이, 망가졌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한다. 하지만 그 고민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어떤 우려 위에 덮어씌운 것이었다.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
세상의 잔혹함은 그런 그녀 앞에 바로 그 일을 불쑥 들이밀었다.
칼날이 유리를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런 소리에 가깝게 인식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소리조차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 자체의 붕괴를 인간의 오감으로 인식할 방법 따윈 없으니까.
그랬다. 「쿠빌라이 문서」는 부유하는 산이란 세상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척도라고 했다.
흩어진 산의 파편들이, 핏빛으로 물든 하늘의 빛을 받아 붉게 물들었다,
이제 파편들은 바다 위 난파선의 조각들처럼 가볍게 출렁이며 떠다닌다.
그 가운데, 기묘한 것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혁세주가 아니다.
쇳덩이.
지면에서 보기엔 작아 보이지만 아마 저 위치라면 꽤 거대할 것이다.
그것이 마치 열리지 않는 하늘을 억지로 비집고 나오는 것처럼 지속적인 떨림과 함께 점점 더 앞으로, 앞으로…….
“전부 외곽으로! 어서!”
리안의 외침에 경호원들이 참석자들을 밀어냈다. 아무래도 그녀는 하늘의 저것이 정전 앞 한가운데로 떨어지리라 예상한 것 같았다.
저것이 떨어질지, 아니면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순간 공격을 펼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회랑의 지붕 밑에라도 들어가 있는 편이 낫다.
루우는 예복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버렸다. 속옷은 아니었지만, 황제이기 전에 전사인 그녀는 움직이기 편하도록 어깨와 허리가 드러난 옷을 입고 있었다.
오랜만에 언월도를 소환한다.
황제전용기갑사 룡황이 황궁 뒤쪽에 준비되어 있긴 하지만 타러 갈 여유가 없다.
이윽고, 하늘의 쇳덩이는 추락했다.
굉음, 먼지, 바닥에 깔린 돌의 파편.
다행스럽게도 그 순간 모두 몸을 낮추며 웅크린 덕분에 부상자는 없었다. 루우와 이단 몇 명만이 똑바로 서서 주변으로 날아오는 돌 조각에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튕겨냈다.
“이건…….”
혼란스럽다는 듯 뱉은 말이었지만 루우는 단숨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사람의 살점과 기계가 뒤섞여 있었다.
기계는…… 자신도 지난 몇 년간 기갑사 탑승 훈련을 받으면서 익숙해진 구조물 아닌가. 고려의 것이 아니었고, 심하게 뒤틀려 있긴 했지만, 이것은 분명 기갑사와 그 안에 탑승한 이단이었다.
……이었던 것이다.
더 경악스러운 점은, 이게 한 명의 이단과 한 대의 기갑사가 아닌 것 같다는 사실이다.
거대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컸다.
최소한 세 명과 세 대다. 그것이 아이가 갖고 놀던 찰흙처럼 뭉쳐졌다.
사람이 찰흙처럼 보이려면 어떤 꼴이 되었겠는가.
다시, 유리를 칼날로 긁는, 오감을 벗어난 ‘감각’이 루우의 온몸을 찔렀다.
본능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지면을 기어 다니는 것들 따위의 의지로 그걸 피할 순 없다.
하늘에서, 유리창의 깨진 구멍 같은 곳을 통해 인간과 파멸인, 인간과 기갑사, 기갑사와…… 뭔가가 뒤섞인 것 같은 것들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
칸발리크 사태 이후, 인류는 갑작스러운 파멸인 및 혁세주 출현 대응책을 강구해왔다.
특히 칸발리크 사태를 직접 겪었던 다이온 연방은 주요 대도시마다 방공망을 극도로 강화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태에서 드러났듯, 이런 재해는 유형화할 수가 없었다.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를 통해 각국 대표단이 정보를 접하고 또 각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이 벨리사리우스의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공습경보가 울리는 카라코룸도 그랬다.
검붉은 하늘을 향해, 움직이는 모든 것을 겨냥하여 대공포화를 퍼붓는다.
그렇게 번 잠깐의 시간 동안 루우는 룡황에 탑승, 다시 군인들과 함께 떨어져 내리는 ‘그것’들을 상대하러 갔다.
리안은 각료들을 지휘하며 황궁 밖으로 대피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모인 각료들과 유력 정치인들은, 정견을 초월해 도시민의 대피와 괴물 퇴치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정치의식이 높아서라기보다는, 자신들도 살아야 하기에 그런 것에 더 가까웠다.
황제가 전선에 서고 제국 태사가 지휘하는 이 상황에서 홀로 몸을 뺐다간, 그걸로 정치생명은 끝장이거니와 육체적 생명도 위태롭다.
-신수덕 놈…… 이따위 수작을……!
류성일은 진심으로 이 사태에 우려와 분노를 느낀다는 듯한 얼굴로 태사가 소집한 회의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바르쥔 주먹은 신수덕을 향한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뭔가 수작을 부린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잘도 이런 짓을!
신수덕이 용납할 수 없는 짓도 태연히 저지르긴 했지만, 그건 내전과 원한이라는 특수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귀국’을 목적으로 일을 꾸민다면 이렇게까지 막 나가지는 못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물론 류성일의 예상은 합리적이다. 류성일처럼 안정적인 정권의 장악을 목적으로 한 인간이라면 적절한 선을 지키며 행동하는 것이 옳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다. 지극히 상식적인 격언. 그러나 ‘애초에 다스림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인간에겐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
그런 인간은 진리조차 코웃음 한 번 치고 불살라버린다.
신수덕의 안에서 고려 내전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고, 복수보다 귀국이 우선하지도 않는다.
신수덕을 ‘자신 같은 인간’이라고 판단한 것이 류성일의 패착이자, 그의 한계였다.
-나까지도 없앨 생각인가! 국내의 협력자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고!
류성일은 그걸 너무도 늦게 깨달았다.
이제는 민의원 의장으로 앉아서 분노로 몸을 떠는 류성일을, 고려국민당 총재 안세규는 곁눈질로 바라봤다.
-어디까지가 영감님 연기인지 모르겠군.
이 사태에는 분명 류성일이 개입했을 것이다. 이게 류성일의 소행이라는 증거를 어디에서 잡고, 또 언제 폭로할 것인지가 문제인데…….
안세규가 그런 계산을 굴리는 동안, 류성일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 참의원 의장이 된 시반의 눈이 심상찮게 번뜩인다.
-이것이 류성일의 ‘계획’인가? 그렇다면 우리 다이온혁신당은 어떤 시점에,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카라코룸 행정장관으로서 회의 자리를 제공한 차파르의 생각도 시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자기도 통제 불가능한 일을 벌여서 어쩌려는 건가. 일단 일은 벌여놓고 되는대로 내버려 두자는 주의면 동맹을 잘못 고른 게 아닌가?
이렇게 책략가들이 술책을 비수처럼 감추고 있는 자리에, 새로운 보고가 올라온다.
“이건 테러가 아닙니다!”
전쟁성 장관 강태훈의 보고였다.
“형체가 무너진 괴물들의 난동이 아닙니다. 괴물들이 제압되자마자 ‘후속부대’가 출현했습니다!”
“후속부대라니, 강 장관, 그 말은……?”
괴물의 ‘무리’가 아닌 ‘부대’.
“괴물의 뒤를 이어 출현한 건 정규군 부대입니다! 기갑사 부대가 하강해 카라코룸 황궁에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경찰 병력으로는 대응할 수 없습니다! 시가전입니다! 이건……”
“기갑사 부대라니? 대체 어디의?”
잠시 망설이던 강태훈은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이건 멕시카와의 전면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