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의 마지막 조각(5)
여러 의견이 바쁘게 오갔지만 결국 동명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대책을 고심해 둔 후에는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그렇게 바라트에서 들려올 소식을 기다린 끝에, 세련의 대사가 태사부를 찾았다.
“……이전처럼 업무를 지속하라는 신정부의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신정부’라는 단어가 이미 아슬란이 패배하고 쿠데타 세력이 승리했음을 알렸다. 리안은 씁쓸한 기분을 뒤로 하고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대사가 서류를 내민다. 아니 그렇게 거창한 이름을 붙일 것도 없었다. 격식을 갖추기 위한 표지를 넘기면 그 안에 든 것은 종이 한 장이었으니까.
‘혁명정부는 이전 정부가 귀국과 맺은 우호 관계를 지속하길 바랍니다’라는 내용 짧은 내용이 담겼을 뿐이다.
대사에게 앞으로도 상황을 지켜보며 협력해 나가자는 다짐과 위로를 전하고 내보낸다. 그 직후 델리의 고려 대사관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도시의 교전이 잦아들었고, 신정부 측에서 대사관 업무를 정상화해줄 것을 요청했답니다.”
조유관의 보고를 들으며 리안의 고개는 끄덕이는 것도, 가로젓는 것도 아닌 미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국가이성의 관점에서 보면 아슬란 개인의 비극은 다이온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세련 신정부와의 관계가 이전과 같다면, 다이온이 아슬란과의 의리를 지켜 세련 신정부와 관계를 끊는다든가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국경에서 별다른 소동을 일으키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양국의 관계 구축에 미리안과 아슬란, 두 개인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사실이다. 각자의 이익을 두고 다소 언성을 높여가며 격론을 벌였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노인의 눈에는 분명 애국심이 불타고 있었다.
애국자 대 애국자로서, 개인적인 안타까움이 남을 수밖에.
“신정부의 책임자는 누구지?”
새 주석은 누구냐고 묻지 않은 건, 신정부의 우두머리가 곧장 주석을 자처하진 않을 것 같아서였다.
“혁명정신재건위원회 위원장…… 하르샤라고 합니다.”
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직함이었다. 혁명정신재건위원회…… 요컨대 이번 쿠데타는 혁명정신을 ‘재건’한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건가.
“신정부는 아슬란 주석이 혁명정신을 훼손시켰다고 보는 건가.”
“아슬란 주석은 민주주의 개혁을 서두르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지난 회담에서 저한테 묻기도 했었죠. 고려는 어떻게 다당제 민주주의를 운용하는 거냐고…….”
그때는 외교적 수사, 혹은 국내 과시용에 그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난 3년간 꽤 치밀한 준비를 해 왔던 모양이다.
물론 아슬란이 제시한 다당제 민주주의는 제한적이다.
아슬란의 다당제는 좌우익, 무굴 황실의 지지자부터 보수주의 정당까지 모두 참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혁명의 이상이라는 최종적 목표에 동의하는 좌익 정당들의 참여만을 인정하며, 내전을 거치면서 실각했던 동지들, 다른 노선의 좌익 정당을 복권하는 작업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출발은 좋다고 평하고 싶었다. 아슬란이 이끄는 공산당만이 유일무이한 진리다, 라는 식의 사고에서는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수십 년을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는 확대되지 않을까, 하고 전망했었다.
“일당독재의 붕괴를 꺼리는 무리들인가.”
“저들로서는 아슬란 주석이 갑자기 미쳐서 자기네 권력을 다 뜯어내 나눠주려는 것으로 보이겠죠.”
리안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것뿐만은 아닐 거예요.”
내전의 시대, 누명을 쓰고 죽은 혁명가들도 많다고 들었다.
다음 세대도 아니고 바로 그 당사자 세대가 그런 사람들을 복권한다? 그렇다면 아슬란부터가 법의 심판을 각오했다는 의미이다.
왜 동지들에게 누명을 씌웠는가. 왜 동지를 모함했는가. 왜 그런 악랄한 숙청을 벌였는가.
아슬란 개인이야 지위와 명예 모두를 잃을 각오를 했다고 해도, 지금 권력을 쥔 자들도 동의할까? 아슬란의 위세에 눌려 동의하는 척했어도 위기감을 느낀 자는 많을 것이다.
“숙청된 이들 중에는 정말로 혁명을 팔아먹은 이들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무리는 숙청을 주도한 사람들 중엔 없을까요?”
“확신하긴 어렵겠습니다.”
“맞아요. 혁명의 이름으로 동지를 팔아먹고 한 자리 차지한 인간들이 적지 않겠죠.”
악인은 물질적인 풍요를 잃는 것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의외로 명예를 잃는 것을 그 이상으로 두려워한다.
그래서 도덕성이 공격받을 때, 악인은 뻔뻔할 정도로 미친 듯이 화를 낸다.
일말의 양심이 자아낸 부끄러움일까. 그것을 뭐라고 해석하든, 놈들은 극단에 몰렸을 것이다.
이대로 명예도 지위도 잃고 추락할 것인가.
아니면 두렵긴 해도 아슬란과 목숨을 걸고 싸워 볼 것인가.
결과적으로 델리를 제압하긴 했지만, 혁명정신을 재건한다고 떠들고는 있지만…….
이 정권은 바라트의 가장 어두운 부분이 집권한 것이다.
“미래가 밝을 수가 없겠군…….”
어떤 정권이든 밝은 부분이 있고 어두운 부분이 있다. 리안의 정권도 ‘과연 허동주가 반역을 일으킬 의도는 있었는가’부터 ‘내전 과정에서 부정한 자산 축적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의혹에 끝없이 부딪혀 왔다.
그러나 미리안 정권의 빛, 다이온 연방이나 동군연합의 확립, 다당제 민주주의와 개혁 등이 어둠과 얼추 균형을 맞춰왔기에 지금까지 그녀의 정권을 유지될 수 있었다.
세련의 쿠데타 세력에 대한 리안의 추측이 옳다면, 세련은 지금 빛과 어둠의 균형이 완전히 깨져버린 셈이다.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비도덕적 행태를 어떻게든 성과로 덮어야 하는데, 잘 되진 않을 것이다.
“아슬란의 개혁은 그 사람 개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세련이라는 체제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 개혁이 좌절된 시점에서 세련의 운명은 정해졌다는 말씀이십니까?”
“정권의 생명이야 반대파를 숙청하고 민중의 불만을 찍어누르는 걸로 어떻게든 연명해나가겠죠. 하지만 비열한 방식으로 운용되는 정권은 반드시 ‘실제 국력’을 잡아먹는다는 게 문제예요.”
애초에 민중이나 나라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집권한 자들이 아니다. 철저히 개인의 욕망을 수호하려고 나타난 자들이다.
그런 그들을 억제하고 있던 게 바로 아슬란 정권인데, 이제 쿠데타로 없애버렸으니, 무제한적 부패가 시작되는 것이다.
경제도 그렇겠지만 이들이 가장 먼저 잡아먹는 것은 바로 군으로 가야 하는 예산.
전쟁을 총지휘하며 현실 감각을 키운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아슬란이 사라졌으니, 대충 서류로만 강대국의 군대라 꾸며두고 병사들의 봉급부터 먹어 들어갈 것이다.
간부들 봉급은 위험하니까 안 건들고, 대신 무기류를 잠식해가겠지. 신형 무기 개발 사업은 예산만 어마어마하게 투입하고 실상은 전혀 진전이 없을 것이다. 그 예산은 부패한 자들끼리 나눠 먹어야 하니까. 개인화기부터 중화기에 이르기까지 참 꼼꼼하게도 건드리리라.
병사들이 먹을 밥, 병사들의 군장, 생활용품…… 그런 것까지 건들고 나면, 과연 공산당 군대에 남는 게 뭐가 있을까?
“균형이 생각보다 일찍 깨지겠군요. 일단 대사관을 통해서 구금된 아슬란 주석의 안전을 보장해달라는 요청을 해두세요.”
이것은 아슬란에 대한 개인적인 의리이기도 하지만, 세련의 혼란을 바라지 않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쿠데타 세력은 어쩌면 아슬란을 죽이는 게 반대파의 구심점을 없앨 방법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이후 쿠데타에 반대하는 세력이 반격을 시도한다 해도 구심점을 갖추지 못한다면 내전에서 손쉽게 승리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리안은 아슬란을 이미 ‘인질’로 잡은 이상 살려두는 편이 유용하다고 보았다. 인질의 안전을 걱정한 나머지 반대파의 봉기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승패와 관계없이, 바라트-세련은 빠른 안정을 찾아야 한다.
안 그래도 복잡해지는 국제정세 속에서 태평양에 이어 인도양 문제까지 신경 쓸 여유가 고려와 다이온에는 없었다.
“……동군연합의 통합, 서둘러야겠어요.”
***
아슬란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리안은 영영 들을 수 없었다.
죽였는지 살려뒀는지, 세련의 신정부는 공식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이후 벌어진 사건들을 통해 추측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세련을 구성하는 각국, 그러니까 버마, 카불, 사마르칸드, 호레즘, 후라산, 페르시아는 종주국에 그런 난리가 났는데도 딱히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본국, 바라트에서 산발적인 반란이 몇 차례 일어났고, 진압당했다. 그 진압 과정이 무척 잔혹하고 야만적이었다는 것 정도만 대사관을 통해 동명에 전해졌다.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이 아슬란의 운명에 대해 미리안이 내린 결론이었다.
이를 감지한 것은 미리안뿐만이 아니었는지, 로마 제국의 벨리사리우스 황제도 36년 말까지 북쪽으로는 동유럽 우방들을,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우방들을 순방했다.
가는 곳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폴리로 귀환해서까지 벨리사리우스는 이 나라들과 굳건한 ‘군사 동맹’임을 선언했다.
상호방위조약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누군가 이들 동맹을 친다면 로마 제국이 침범당한 것과 똑같이 대응할 것이며, 반대로 로마 제국이 공격당한다면 동맹의 모두가 ‘연합’해 대응하리라는 선언이었다.
그렇게 서유럽에 엄포를 놓고 나서, 세련이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확신한 벨리사리우스는 아라비아를 향한 군사작전을 개시했다.
성탄절을 지나 1937년에 막 접어들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아라비아 멸망전에는 에티오피아군도 일부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에피오피아가 항만과 공군기지를 로마 제국에 제공하여, 침공은 아라비아 북부 국경에서뿐만 아니라 서남부 해안에서도 이루어졌다.
정복도 아니고 해방도 성전도 아닌, 말 그대로 ‘멸망’을 목적으로 한다고 천명한 전쟁이었다.
그렇기에 로마와 에티오피아 동맹군은 대민작전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공세를 진행.
아라비아의 자원도 알 바 아니라는 듯,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도시 자체를 소멸시키며 전진했다.
절멸 전쟁, 혹은 소멸 전쟁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의 참상이 아라비아 반도 전역을 뒤덮었다.
브리튼, 신성 제국, 칼마르의 동맹뿐만 아니라 마자파히트에서도 로마 제국의 이러한 작태를 맹렬히 비난.
그러나 실질적인 도움을 아라비아에 줄 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
종교도 문화도 어차피 절멸시킬 것들이라 아랑곳하지 않고 공세를 진행하니, 작전 완료까지 걸린 시간은 보름 남짓.
대황궁 앞 광장에서, 황제는 시민들을 향해 선포했다.
-제국은 마침내 이슬람을 극복하였노라!
천년 하고도 삼백여 년에 걸친 투쟁에서 드디어 승리했다는 환호가, 그때까지도 반신반의하던 시민까지 모두 황제 숭배의 광기로 몰아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