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의 마지막 조각(4)
무엇 때문에 ‘민주주의를 잠시 유보한다’는 결정을 내렸던가.
바라트의 주석, 아니 이제는 세계혁명연합의 주석이 된 아슬란은 내전기를 회상한다.
-원래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무굴 제국이 무너진 직후, 델리의 정계에는 많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이념을 내세운 ‘정당들’이 있었다.
노선은 달랐지만, 어떻게 이상적인 노동자 인민의 나라를 만들어 나갈지에 대한 방법은 각각 다르게 제시했지만, 토론할 수 있었다.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멸살하는 지경까지 가진 않았었다.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자본가의 첩자로 몰아가진 않았었다.
각지에서 반(反)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 전까지, ‘다당제’로서 함께하던 시절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슬란은 그렇게 회상했다.
반란을 제압하고, 혁명정부를 궤도에 올려놓으려고 시작된 전쟁 속에서, 누군가가 반혁명 세력도 인민회의에 참여시키자는 말을 꺼내지만 않았더라면.
혁명이 한 해도 채우지 못하고 잠깐의 소란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혁명가들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워져 갔다.
아무리 다른 의견이라도 토론하고, 철저한 논리로 무장한 글로 승부를 가르던 낭만의 시절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반혁명 세력과의 타협…… 선대 주석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를 토론 대상조차 아니며, 그저 반역이라고 일갈했다.
내전 전에는 토론을 거쳐 동지를 논파하면, 동지는 그 자리에선 얼굴을 붉혔다가도 다음 회의에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출석했다.
그러나 이제 한 번 반혁명 세력과 결탁한 것으로 규정된 동지들은, 다시는 회의에 나타나지 않았다.
날카로운 논리가 아닌 탄환이 동지의 심장에 박혔으니까.
인민들이 읽는 신문에는 이제 서로의 학식과 열정을 드러내는 논문이 아니라, 반역자의 처형 소식이 실렸으니까.
동지였던 사람들을 몇 명이고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도, 이것은 혁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선대 주석은 되뇌었다.
그도 괴로워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슬란은 괴로웠다.
총서기…… 아슬란의 마지막 경쟁자였던 남자도 그러했을까?
아니, 아니지. 그 미친개는 즐거워했다.
떠돌이 몽상가이던 시절부터 친구였던 이를, 그 눈앞에서 가족을 먼저 죽이고 마침내 본인을 처형하면서 이죽거렸다.
-나는 그런 총서기와는 다른…… 달랐을까?
진심으로 동지들이 혁명을 배반했다고, 봉건 왕공들의 간첩이었다고 믿었을까?
결코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고백을, 아슬란은 자기 자신에게 들려준다.
그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고. 아무리 동지가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해도, 증거가 없어도, 아직 ‘찾지 못한 증거가 없을 뿐’, 이 심증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믿었노라고.
남 탓을 하자면 동지들 사이에 의심의 씨앗을 뿌린 무굴 파디샤(皇帝)를 원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혁명가인 척, 이론 공부도 철저하고 한 두 번 정도는 목숨 걸고 동지들을 지켜내는 연기도 하던…… 황제의 간첩들.
십 년 넘게 활동하며 존경받는 선배로 행세하던 간첩들도 얼마나 많았는가. 그 간첩들이 팔아넘긴 동지가 몇이며, 망쳐버린 계획이 몇 개이며, 파괴된 거점이 몇 곳일까.
동지들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의심과 감시가 미덕이 되어가던 습관.
아마도 그것이 무력하게 붕괴한 무굴 황실이 마지막으로 남긴 상처일 것이라고, 아슬란은 생각한다.
인민을 살리는 데는 참으로 무능했지만, 혁명의 발목을 잡는 데에는 참으로 유능했던 쓰레기들.
회상은 거기서 그쳤다.
-상처는 회복해야 한다.
동지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갈등했던 이들과 화해하고, 갇히거나 쫓겨난 이들은 해방되고, 그렇게 그 ‘짧지만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혁명 정당들의 ‘다당제 민주주의’로.
3년 전 아슬란은 자신보다 훨씬 어린 고려의 재상과 회담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내전이 끝났음에도 어떻게 다당제 민주주의가 가능했는지.
보수정당을 이끌면서도 어떻게 진보주의자들의 개혁을 받아들였는지.
고려가 할 수 있다면 바라트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혁명이 그들의 혁명보다 못하지 않으리라.
3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마침내 우리는 민주주의를 회복한다.
개인이 아닌, 주석도 아니고 의장도 아닌, 연합인민회의의 모두가 통치하는 집단 지도 체제.
이제는 백발의 주석이 되어버린 어제의 청년 혁명가는, 차에서 내리며 생각해 둔 개혁안을 몇 번이고 되짚어 본다.
선대 주석 같은 사람, 총서기 같은 놈, 자신 같은 인간의 출현 모두를 방지할 개혁안이 그의 품에 있었다.
비서에게 들고 오도록 해도 상관없었지만, 아슬란은 그것을 소중히 품에 안고 의사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순간, 아슬란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꽤 시간이 지나고서야, 따라오지 않는 비서와 멈춰 선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폭발음’을 들었다고 인식했다.
혁명의 수도, 델리에서 이런 소리를 들은 건 20년이 넘었는데.
그것은 그가 아직 주석을 겸하지 않던 시절, 즉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기만 했던 시절 들은 소리와 아주 흡사했다.
그러나 아슬란은 그런 소리가 델리에서 들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여전히 어딘가 공장에서 폭발 사고라도 난 것은 아닌가 짐작할 뿐이었다.
도시의 소방 체계가 처리할 일이었다. 만약 심각해지면 주석인 자신도 나서서 뭔가 해야겠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니리라 판단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폭발음이 끝나지 않고 이어지며, 그 사이로 날이 선 총성이 밀려 들어오고, 무한궤도가 땅을 구르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아슬란은 다시 멈춰 섰다.
-쿠데타!
걸음을 서둘렀지만 쿠데타 세력의 손이 더 빨랐다. 있어야 할 동지들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맞이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교전의 소리는 바로 등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농성조차 할 수 없는가!
쿠데타 세력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누군지 짐작도 안 된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자들이었다. 아슬란이 잠깐이나마 저항할 시간조차 벌 수 없도록 빠르게 다가와 곧장 목을 노린다.
이런 일을 망치곤 하는 흔한 망설임도 전혀 없다.
아슬란은 멍하니 서 있다가 자신에게 경례조차 하지 않는 병사들에게 양팔을 붙들렸다.
그가 3년을 준비한, 세계혁명연합의 민족과 노선을 초월한 민주주의 개혁안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뿌려졌다.
그들이 준비한 차에 오르기 직전, 병사의 우악스런 손길이 아슬란의 머리를 짓눌렀다.
그 짓눌린 머리로 아슬란은 떠올렸다.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폐위된 무굴 황제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하고.
***
1936년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려는 문턱에 섰다. 동군연합의 통합과 동시에 1937년 선거를 준비하던 리안은, 새벽을 흔드는 보고에 잠에서 깼다.
불평할 틈도 없었다. 이런 시간에 감히 자신을 깨운다는 것 자체가 ‘그래도 되는 일이 터졌다’는 의미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일단 각료 중 전쟁성과 외무성은 태사의 지시 없이도 소집되었다. 이 체제만큼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다른 각료들은 비상 대기를 명령해뒀고, 제국최고회의에는 아직 연락이 가지 않았다. 나중에 연락이 가더라도 의원들 중 최고회의의 국방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만 갈 것이다.
“세련의 쿠데타라니. 대사관은?”
1931년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 이후 동명에 설치된 바라트 대사관은, 지금은 세련 대사관이라 불린다. 이 도시에서 본국의 상황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곳이 바로 거기다 보니, 리안은 먼저 그것부터 물었다.
그 질문에는 조유관이 대답해야 했다.
“세련 대사도 혼란스러운 모양입니다. 당장은 합하의 소환에 응할 수도 없고, 상황 파악에 주력하겠다고…….”
“하긴 쿠데타 이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바쁘겠죠. 델리에 나가 있는 우리 대사는 어떻답니까?”
“짧은 전보만이 들어왔습니다. 직원과 가족들 모두 대사관 부지 내로 피신시켰다고 합니다. 소리로 교전이 이루어지고 있음은 확인하는데 정확히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모른다는 내용입니다.”
리안은 턱과 입술을 거칠게 쓸다가 강태훈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녀의 전쟁장관으로 오래 일한 강태훈은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준비한 대답을 내놓았다.
“각 특구뿐만 아니라 역외사국 주둔군의 경계 역시 강화했습니다. 아직 전군에 경계령을 내린 건 아니지만 준비는 해놓겠습니다.”
“티베트 쪽 상황, 수도 하싸에서 불온한 움직임은 없는지 특히 신경 써 주세요. 혹시라도 티베트 내에서 누가 혁명이라도 시도하지 않는지.”
“알겠습니다. 티베트-세련 간 국경 쪽에서도 계속 첩보를 입수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세련의 쿠데타가 대체 어떤 성격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티베트 내 좌익이 괜한 자극을 받아 혁명을 일으키면 곤란하다. 그 혁명 세력은 당연히 다이온보다는 세련과 함께 할 가능성이 크다.
혹은 쿠데타 결과 세련의 정권을 잡은 세력이 티베트 국경이나 다이온 국경에서 소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쿠데타 세력이 자기네 집권 직후 혼란을 외부와의 전쟁으로 해소하려 드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아슬란 주석이 정권을 지켜내도 비슷한 문제가 남는다. 이들이 쿠데타를 ‘외부의 혁명 분쇄 음모’로 오해한다면…… 전면전도 불사할 수 있다. 이렇게 혁명이 위협받았는데 언젠가 내야 할 결판, 지금 낸들 어떠랴 하면서.
“일본과 멕시카를 경계하기도 벅차다 생각했는데…….”
바라트-세련 쪽 국경 방비, 그들과의 전쟁 시나리오가 없는 건 아니다. 어떤 나라든 전쟁을 할 가능성이 없진 않으니까 만들어는 둔다.
그러나 예측되는 가능성이라는 게 있다. 전쟁에 있어 절대는 없다지만 그건 이론의 문제고, 실제로는 절대를 상정하지 않을 순 없다.
예산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해군 확대, 극북 및 낭키아스 동남부 요새화. 여기에 들어갈 돈도 빠듯한데 서남 국경까지 요새화할 돈이 넉넉할 리 없다.
게다가 이들 지역은 다이온-고려가 직접 개입하지 않고, 기존의 알티샤흐르군, 대예군이 방위를 주도하는 곳이다.
-어쩌면 구성국의 군대를 다이온군으로 통합하는 일에 박차를 가해야 할지도.
연방군으로의 통합은 군 통수권 박탈과 비슷한 모양새기에 ‘자치’를 해친다며 반발이 심하겠지만, 이런 위기 상황에선 어쩔 도리가 없다.
리안은 문득, 남쪽에 있는 ‘그녀가 활용할 수 있는’ 다른 패를 떠올렸다.
-견하…….
견하에게 서남부 국경 방위까지 맡겨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카라코룸에서 더 멀어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