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의 마지막 조각(3)
최종결전의 준비.
황제 벨리사리우스의 그 말을 듣곤, 에반겔로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말하는 최종결전은 도대체 무엇이며, 또 그 준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그런 의문쯤이야 알고 있다는 듯, 벨리사리우스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세상은 크게 다섯 개의 세력권으로 나뉘었소.”
콘스탄티누폴리를 중심으로 루스계 공국들을 비롯한 동유럽을 아우르는 로마 제국.
이합집산을 반복하고는 있지만 어쨌든 민주주의라는 대의에는 대체적으로 동의한 서유럽.
내전을 거쳐 파시즘 군사 독재로 거듭난 멕시카.
페르시아에서 바라트, 버마까지 남아시아를 주름잡은 세계혁명연합.
고려와 몽골의 황통을 하나로 합쳐, 마침내 동아시아를 지배하게 된 다이온.
이 다섯 세력에 속하지 않은 나라들도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다섯 세력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순 없으리라.
벨리사리우스의 말처럼 세계는 다섯으로 나뉘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 오랜 분쟁과 몰락을 지나 마침내, 세계는 다섯으로 뭉쳤다고 볼 수도 있지.”
“다섯으로 뭉쳤다면……”
에반겔로스는 그 말이 결국 어디를 가리키는가를 눈치채고, 간신히 입 밖으로 새어 나왔던 경악을 목구멍 안으로 눌러 담았다.
“다섯이 하나가 될 수도 있지 않겠소?”
세계정복.
몇 번인가 일어났던 정복자들이 꿈꾸던 것.
식민지를 개척하는 정치인들이 겉으로는 망상으로 치부하면서도, 내심 언젠가는 우리 제국이…… 라고 바랐던 것.
그러나 인류의 역사에서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것.
벨리사리우스는 그것이 문턱에 와 있다고 말하는가.
에반겔로스의 얼굴을 보며 황제는 실소를 터트렸다.
“적어도 멕시카의 쿠에츠팔린은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 것 같소.”
“……폐하께선, 어떠십니까?”
삼 년 만에야 에반겔로스의 마음에 후회 비슷한 것이 몰려왔다. 자신은 권좌를 지키기 위해 괴물에게 나라를 팔아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가늠하기 어렵소.”
살짝 안도하려던 그 순간, 이어지는 황제의 말은 에반겔로스의 불안을 다시금 부채질했다.
“인류가 언젠가는 하나의 국가에 도달하든지, 아니면 국가라는 틀의 상위에 인류라는 새롭고 하나 된 틀을 형성하게 될 거라는 이상은 있소만, 멕시카의 방법으로 그 지점에 도달할 수는 없을 거라 보오.”
멕시카의 최고지도자 쿠에츠팔린을 비판하는 듯한 말이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조금 다르다. ‘그 방법’으로는 안 된다…… 벨리사리우스의 비판은 ‘수단’을 겨냥하고 있다.
“다른 방법으로는 가능하시다는 말씀이십니까?”
“글쎄. 짐은 결과적으로 인간이 하나의 집단이 된다 해도, 그것조차 ‘더 큰 도약’을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오.”
황제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벨리사리우스는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했지만, 에반겔로스는 자신이야말로 폐하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외치고 싶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위치해 있든, 결과를 보려면 준비해야 하오.”
“어떤 준비입니까?”
“아무리 창대한 목표여도 그 준비는 세속적이지. 세력권의 틈새를 메우는 일 말이오.”
세력권의 틈새. 에반겔로스는 충격에서 벗어나 황제의 은유를 이해하려는, 그 생각의 급격한 전환 때문에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다.
“프로이센과 마자르 말입니까.”
두 나라를 신성 제국의 동쪽 전선에 앞세우면 각각 게르마니아와 알레마니아의 분리 독립 운동과 연계해 적들의 역량을 감소시킬 수 있다.
적들.
에반겔로스는 자신이 무심코 떠올린 개념에 몸서리쳤다.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에서 적이라는 말은 함부로 내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순한 적대감, 반감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적대국, 적성국…… 가상적국이라는 이라는 말도 입에 담을 때는 조심스러워야 한다. 정치에 있어 적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다.
전쟁.
자신도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받아들인 건 아닌가 싶어, 수상은 벨리사리우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가올 운명이 저 남자의 입과 두뇌에 달렸으니, 듣지 않을 순 없다.
“두 나라뿐만이 아니지. 루스계 공국들과의 연계도 강화할 것이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실 웃는듯하던 벨리사리우스의 말과 표정 모두 돌변했다.
보랏빛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린다.
“칼리프의 생존을 더는 허락할 수 없겠군.”
“아라비아 칼리프국을 멸망시키시겠다는 겁니까?”
“수상도 메소포타미아 국경 방비에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았소?”
복잡하게 얽힌 로마의 안보 문제 중 하나를 해결한다.
전후 로마 제국은 아라비아 칼리프국을 완전히 봉쇄하기 위해, 육상국경뿐만 아니라 아라비아 반도를 둘러싼 홍해,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해역까지 함대를 배치했다.
아라비아 칼리프국을 멸하고 반도를 완전히 정복한다면 그런 봉쇄에 들어가는 부담은 확실히 덜 수 있다. 로마처럼 이슬람 세력과 적대하는 에티오피아와의 결속도 더욱 굳건해지리라.
물론 아라비아 반도는 말이 반도지 상당히 넓고, 또 사막이 많아 치안 유지에 어려움이 있겠지만, 현 상태에서 들어가는 비용에 비할 바는 아니다.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에티오피아군을 동원해 치안 유지에 쓸 수도 있다. 에티오피아 입장에서도 언제 바다 밖으로 튀어나올지 모를 이슬람 세력 때문에 불안에 떠느니, 그 영토 안으로 직접 들어가 치안을 관리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군의 유지비까지 로마 제국이 제공한다면야 더할 나위 없고.
무엇보다도 아라비아 반도를 직접 군사적으로 확보하면, 페르시아 만 전체에서 공산권을 겨냥할 수 있게 된다. 바라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최단 거리 군항도 확보된다.
“물론 아라비아 칼리프국을 지표에서 쓸어버리면, 동남부 국경 방위비는 어마어마하게 줄 겁니다. 절약한 군비를 다른 곳에, 당장 국내에 투자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국경의 강화에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허나……”
“허나?”
“이탈리아의 수복 이후 서유럽은 보복의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아니, 칼을 가는 건 신성 제국뿐이라 하더라도 브리튼이든 칼마르든 어떻게 하면 우리를 견제할까 거기에 골몰할 텐데, 과연 우리의 아라비아 정복을 바라보고만 있겠습니까?”
에반겔로스의 지적은 옳았다.
이탈리아를 확보해 서쪽을 향해 불쑥 위협을 가한 것뿐만 아니라, 멕시카와 밀약을 맺었다는 것만으로도 서유럽 입장에서는 기겁할 일이다. 로마와 멕시카, 거대한 두 제국의 세력권 사이에서 협공당하는 꼴이 되니까.
어떤 나라나 자기네가 처할 최악의 정세쯤은 상상하는 법이다.
지금쯤이면 밀약도 더는 비밀이 아닐 터. 멕시카와 로마 사이에 감도는 ‘우호’의 바람은 저들도 느꼈을 테고, 첩보원을 통해 파고들면 확신의 단계에 이르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멕시카가 고려를 향해 총구를 들이대고, 우리가 아라비아 방향으로 돌아서는 바로 그 순간을 서유럽이 보고만 있겠습니까?”
에반겔로스의 물음은 반복된다. 그러나 그것은 물음이 아니라 만류다.
물론 에반겔로스가 무슨 대단한 평화주의자여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흔들지도 모를 격변을 꺼리는 것뿐이다.
하지만 에반겔로스의 불안과 달리 돌아오는 건 황제의 냉소였다.
“보고만 있지 않는다면 어쩌겠는가?”
이탈리아 사태 때만 해도 좋은 말로 에반겔로스를 달래던 그 황제가 아니었다.
아니, 이제 본색을 감추지 않는 건가.
“떨어진 이삭을 쪼아먹으러 멕시카로 몰려갔다가 쫓겨나고, 그 와중에 제 살길 찾아 옛 동맹을 배신하고, 또다시 아래에서 불만이 올라오니 대책도 없이 멕시카에 대한 적대감이나 선동하는 정권들이 무슨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굳어버린 수상의 얼굴을 보다가, 황제는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시시각각 바뀌는 표정과 어조는, 타인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의 행동이다.
“물론, 짐에겐 대책이 있소.”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수상이 말한 프로이센과 마자르, 나아가 보헤미아, 바르샤바,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에 루스 제공국 전부를 순방할 거요.”
루스계 공국…… 노브고로드, 민스크, 모스크바, 키예프.
에반겔로스는 황제가 언급한 나라들을 머릿속에서 지도 형태로 뭉쳐본다. 유럽 동쪽에 떠오르는 거대한 덩어리는 신성 제국과 브리튼의 동맹이라는 역사적 전환마저도 초라해 보이게 한다.
“동유럽 우방들을 순방하고 나선 아프리카 우방들을 순방할 생각이오.”
전통적인 우방이자 동아프리카의 패자인 에티오피아.
서아프리카의 말리와 송가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콩고와 앙골라.
남아프리카를 돌아 다시 동쪽 해안으로 돌아오면 무타파가 있다.
이들 나라들은 브리튼과 신성 제국, 에스파냐의 식민지 확대에 맞서 ‘살아남은’ 나라들이면서, ‘살아남기 위해’ 에티오피아 및 그 동맹인 로마와 손을 잡았다.
이 아프리카의 다섯 국가가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은 건 순전히 로마 제국의 압박 덕분이다.
다시 말해 서유럽은 언제든 이들을 침략할 기회만 노리고 있고, 그런 그들에게 로마는 밉살맞은 방해꾼일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벨리사리우스가 아프리카 국가들을 방문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서유럽에 던지는 메시지이다.
‘이 선을 넘어오면 전쟁이다’라는.
“우방을 넘어서 혈맹으로. 그렇게 세력권을 다져놓고, 세력권에 편입되지 않을 군소 세력은 무력으로 정복하고. 멕시카든 세련이든 우리에게 덤벼들기 전에 우리도 덩치를 불려야 하지 않겠소?”
‘세력권의 틈새를 메운다’는 황제의 말은 이미 상세한 계획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신성 제국이나 서유럽과 전면전을 벌이는 게 아니라 북이탈리아를 한 움큼 베어 문다.
아프리카나 동유럽으로 서유럽 강국의 이목을 분산시켜두고,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을 아라비아 반도를 정리한다.
즉, 벨리사리우스 황제의 기본 전략은 ‘점진’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은 충분하오, 라며 벨리사리우스는 말을 이어나갔다.
“신수덕과 쿠에츠팔린 사이에 어떤 수작이 오가든, 그 수작이 어떤 결과를 낳든, 일찍 나오지는 않을 거요.”
지난 세계대전은 1905년부터 1910년까지, 5년이 걸려서야 끝났다.
태평양에서든 대서양에서든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전쟁도 그만큼의 시간은 소모할 것이다.
아니, 신수덕이 제시한 ‘획기적인 방법’이 전쟁의 결말을 앞당겨온다 해도, 최소한 2년은 잡아야 한다는 게 벨리사리우스의 판단이다.
하나의 전투, 하나의 전역에서 아무리 ‘전략적으로도 유의미한’ 승리를 거둔다 해도, 전체 전쟁의 양상을 결정짓는 데에는 무수한 서류와 군화를 적시는 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년. 짧다고도 할 수 있지만 칠백이 넘는 낮과 밤의 시간이기도 하오. 짐은 그 기간 안에 임페리움을 확실히 국제정세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자리까지 올려놓을 것이오.”
황제의 다짐.
그 앞에서 에반겔로스는 ‘더 큰 도약’의 의미를 감히 묻지 못했다. 어렴풋이 그 이면의 광기를 느꼈어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이온과 멕시카 사이의 분쟁, 로마 제국의 확장, 거기서 촉발될…… 두 번째 세계대전까지. 그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인류를 한 단계 끌어올리리라는 벨리사리우스의 믿음을, 이 시점의 에반겔로스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