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의 마지막 조각(1)
“내가 부족해서 주 장관에게 무거운 짐을 맡기고 가는 것 같소.”
이제 ‘전임’ 응천 행정장관으로서 동명으로 돌아가는 송인섭은, 무슨 말을 할까 하다 그렇게 겸양을 표했다.
일어난 일만 놓고 보자면 주견하는 분명 정치감독‘청장’에서 특별행정‘장관’으로, 직급이 올랐다.
그러나 그 복잡한 과정을 놓고 마냥 그렇게 바라보긴 어렵다.
그래서 주견하의 응천 행정장관 취임을 축하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또 그렇다고 해서 동명 정계에서 밀려난 일을 ‘위로’하자니, 마치 약 올리는 것 같아 그것도 그만두었다.
애초에 동명 정계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위로든 축하든 던진다는 것 자체가 오지랖이다.
무슨 말을 꺼내든 치명적인 실수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송인섭은 제법 지혜로운 대응을 짜낸 셈이다.
주견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오히려 제가 송 장관님 덕분에 편하게 일하게 되었죠.”
주견하의 말은 송인섭에 대한 예의이면서, 동시에 진심이기도 했다.
어쨌든 송인섭은 주견하가 동명에 가 있는 동안 그가 제시한 방침을 그럭저럭 잘 이행해왔던 것이다.
때론 엄격함을 넘어 가혹하게, 또 때로는 의외의 관대함으로 상대를 감복시키면서, 개혁 정책을 ‘유지’시켜 왔다.
혼란한 정국 속에서 어떤 정책을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해보면, 송인섭은 행정관료로서 보통 이상의 일을 해냈다고 할 수 있다.
얼마간 송인섭에게서 업무를 인계받으면서 견하는 확실히 느꼈다.
“……이건 주 장관에게 윗사람 행세하려는 게 아니라, 먼저 행정관료가 되어 본 사람으로서 한마디 하는 조언 같은 건데……”
그래서 견하는 기꺼이 선배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송인섭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행정관료로서의 경험은 처음이지 않소?”
“군이나 경찰 업무는 해왔지만…… 이런 민간 행정은 처음이긴 하죠.”
“아직 좀 이른 이야기 같기도 하오만, 이 일은 한 번 익혀두면 두고두고 도움이 될 거요.”
“그렇습니까?”
“군과 경찰 쪽에만 국한될 사람 같진 않거든, 주 장관은.”
견하는 눈을 가늘게 뜨려다 배시시 웃었다.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주 장관이 크게 될 인물이라 보오.”
“스물 몇 살짜리가 정치감독청장, 응천 행정장관까지 해 먹었으면 이미 크게 된 것 아닙니까?”
“아니, 그 이상 말이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미묘한 침묵이 흐른다.
먼저 침묵을 깬 쪽은 송인섭이었다.
“아첨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소. 그렇소, 아첨이오. 나는 항상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그 대비를 해야 한다고 보오. 그리고 여차하면 날 살려줄 사람이 바로 주 장관이오.”
“지나친 생각이십니다. 당장 저는 동명에서 쫓겨난 몸 아닙니까? 장관님이야말로 동명으로 다시 불려가시는 입장이고요.”
결국 견하의 입에서 솔직한 말이 나왔다. 송인섭은 고개를 저었다.
“일각에서는 그렇게들 말하는 모양이오만, 그건 결국 호사가들 입에서 나오는 말 아니오?”
“호사가들이 딱히 거짓을 말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만.”
“정말로 주 장관이 합하의 총애를 잃었다면 동명 어딘가에 계속 유폐되어 있거나, ‘할 일 없는’ 곳으로 발령이 나지 않았겠소? 여기 응천처럼 ‘할 일이 넘쳐나는 곳’으로 보내시진 않았을 거 같은데.”
견하에게도 리안의 행보는 다소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제삼자의 의견을 계속 듣기로 한다.
어쩌면 몇 걸음 떨어져서 보는 관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니까.
“내가 보기에 합하께서는 동명의 날카로워진 분위기를 다소 누그러뜨리고, 주 장관이 민간 행정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응천으로 보내신 것 같은데, 내 추측이 맞소?”
견하는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솔직히 그도 잘 몰랐다. 그저 의미심장해 보이는 웃음으로 허세를 부릴 뿐이다.
“민간 행정 경험, 말씀하신 대로 열심히 익혀보겠습니다.”
견하의 대답은 대화의 중단을 의미했다. 송인섭은 이 정도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게 해석하는 인사들도 있나.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다. 자신이 동명을 떠났다 해서 누군가 함부로 수작을 부릴 가능성도 줄고, 동명에 남겨두고 온 부하들도 안전해질 테니.
견하는 정보사와의 대립을 극한으로 몰고 가, 결국은 리안과 루우가 행동에 나서게 만들었다.
리안은 견하를 정치감독청장 자리에서 해임해 일단 그가 책임을 지도록 했다. 그로써 견하를 향한 공격은 갑자기 기세를 잃게 되고, 그 틈을 타 황제와 태사의 연합 전선이 결성되었다.
누가 어떻게 대응하기도 전에 리안은 동군연합의 완전한 통합을 밀어붙였다.
몽골 정계에서 다소 잡음이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리안은 훌륭하게 돌파하며 정책 추진을 멈추지 않는다.
주견하를 물러나게 하고 미리안이 직접 철퇴를 휘두르면서 모두가 그 권위와 권력을 통감한다.
그러다 문득, 완전히 실각했다고 여겨진 주견하를 다시 응천 행정장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혼란스러울 수밖에.
이것을 어찌 해석할 것인지의 문제가 정계 한복판으로 떠오른다.
응천은 동명에서 멀다. 변방이다. 역대 한족 왕조와 낭키아스 울루스의 수도였다고는 해도 이제는 ‘다이온의 지방 대도시’다. 동명과 같은 기반을 마련하긴 어렵다.
따라서 이는 공신을 가혹하게 숙청할 수 없었던 미리안이 주견하를 ‘유폐’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응천 행정장관은 ‘할 일’이 아주 많다. 송인섭의 말처럼.
견하는 눈앞의 사람들을 둘러본다.
고려인 및 몽골인 관료들이다.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행정구역 개편 이후 실시된 ‘한족 자치’의 결과로 한족 도시자들이 선출되긴 했지만, 오늘 이 자리에 그들은 오지 못한다.
각 도를 벗어난, 낭키아스 전체를 아우르는 정책은 도지사가 간섭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또 ‘한족 자치’가 이루어진다 해도 본토에서 파견된 고려인, 몽골인 관료가 이를 ‘감독’한다. 이들은 ‘부지사’로 도지사를 보좌하는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실상은 두 지배 민족의 한족 지배가 잘 이루어지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태사의 직접 명령을 받는 응천 행정장관과 긴밀한 논의를 나누는 쪽은, 도지사가 아니라 부지사들일 수밖에 없다.
도지사는 결국 부지사들의 ‘통보’를 받게 된다.
-송인섭이 지금까지 잘해주긴 했지만…….
구 낭키아스의 영토는 다이온 개혁의 최전선에 서 있다. 바로 그렇기에 송인섭은 한족 유지들을 어르고 달래느라 바빴고, 심지어 견하까지 내려와서 총칼을 들이대야 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연히 일이 많으면 주어지는 권한도 많다. 말이 ‘행정장관’이지 실상은 낭키아스 총독과 다를 바가 없다.
일단 응천 행정장관은 응천이라는 도시의 ‘시장’을 겸한다.
또한 지금처럼 부지사들을 소집해 도지사들에게 어떤 정책을 ‘권고’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행정장관과 도지사가 직속 상하 관계는 아니다. 그러나 행정장관은 ‘태사부의 직속’이기는 하다. 그런 사람의 ‘권고’를 말 그대로 권고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도지사는 없다.
또 응천 행정장관은 비상시, 군정이 펼쳐지고 있는 강회 특구와 형초 특구에 파병을 요청할 수 있다. 물론 군정 사령관 중에 행정장관의 ‘요청’을 거부할 수 있는 이 역시 없다.
이토록 막강하기에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고 만다.
과연 주견하의 응천 파견을 유폐라고 볼 수 있는가?
-나도 누나의 의도가 짐작이 안 되는걸.
그러나 그 의도를 추리하기에 앞서, 견하는 눈앞의 회의부터 해결해야 했다.
-내 말이 통할까?
전임자인 송인섭은 견하에게 업무를 인계하는 동안, 여러 번 자리를 마련해 관료들과 얼굴을 익히도록 했다.
그러나 관료들이 송인섭에게 복종하는 만큼 견하에게도 복종할지는 미지수다.
주견하는 말 그대로 혈혈단신.
자기 사람들은 전부 동명에 두고 왔으니까.
사실상 부관이던 유지나도 정치감독청 감찰국장의 업무를 해야 하기에, 이제는 청장이 아닌 견하를 따라나설 순 없었다.
비교적 행동이 자유로운 한재연 역시 동명에 두고 왔다. 그는 상관처럼 해임된 천손민족협회 출신들을 다독이는 임무를 맡았다.
-내가 이 사람들을 누를 수 있는 건…….
공포.
방해하는 자와는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싸우길 망설이지 않았던 과거뿐이다.
물론 억누르지 않고 좋게 좋게 협력해나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내가 부임한 이후, 우리 ‘낭키아스 민족 정책 시행지역’의 과제는 두 가지입니다.”
그럴싸한 서두도 없이, 견하는 본론부터 던졌다.
그것이 듣는 이에게는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한다는 걸 견하는 안다.
속내야 어찌 되었든 부지사들은 긴장하며 견하의 말을 듣는다.
“첫째는, 들어서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곧 임시 통합 연방정부가 구성될 겁니다. 각 도는 그간 ‘동아시아 협력회의’에 정기 보고를 해왔고 다이온 연방 구성국 그 어디에도 책임을 지지 않았죠. 그게 이제 달라질 겁니다. 업무의 혼란과 공백을 최소화하게끔 연방정부 구성 전까지 준비를 확실히 마쳐두십시오.”
리안이나 루우의 의도는 차치하고서라도, 견하는 응천 행정장관으로서 동명의 정책을 지방에서 확실히 뒷받침할 생각이었다.
“둘째는 ‘낭키아스 민족 교육’의 현황 점검입니다.”
견하가 먼저 언급한 ‘낭키아스 민족 정책 시행지역’이라는 말은 이와 관련이 있다.
리안의 구상대로 한족은 두 개의 민족, 즉 키타이 민족과 낭키아스 민족으로 나뉠 것이다.
그 정책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어쨌든 구 키타이 지역에서는 ‘키타이 민족 교육’의, 구 낭키아스 지역에서는 ‘낭키아스 민족 교육’의 첫 삽을 떴다.
응천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이 ‘낭키아스 민족 정책 시행지역’이라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봉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키타이 민족 정책 시행지역’이라 불린다.
지역별 문화 차이, 방언 차이였던 것이 아예 ‘타민족의 차이’로 완전히 대체되는 것.
한족의 고려화 또는 몽골화 정책보다 현실성 있다고 채택되어 본토의 상당한 지원을 받는 정책이었다.
화북과 화남, 두 한족을 완전히 가르는 것이 이 정책의 최종 목표다.
“관습적으로 이들 민족을 ‘한족’이라 부르는 걸 용인해왔소만, 오늘부터는 아닙니다.”
피지배 민족을 분할하려면, 일단 이들을 다스리는 지배 민족의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우리의 머릿속에 ‘하나 된 한족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부터 완전히 지워버려야 합니다!”
애초에 그런 민족은 탄생한 적도 없었다는 것처럼, 다이온인 모두가 인식을 바꿔야 한다.
‘차이’의 강조는 그 후의 일이다.
“‘낭키아스어’ 연구, ‘낭키아스 민족 기원’ 연구에 대해서 본국에서는 막대한 지원을 하고 있는데, 각 도에서는 이 예산이 제대로 집행되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늦어도 내년에는 각 도 교육과정에 반영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