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9)
내전 당시엔 여러 장군 중 하나였을 뿐이지만, 이제 초필로틀은 태평양방면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저 최고지도자 쿠에츠팔린에게 식견을 조금 드러냈을 뿐인데, 그게 어떤 가능성으로 비친 탓인지 전격 발탁되었다.
그에게도 전쟁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명령에 따라 육해공군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움직이는 대규모 군사 집단을 재편성 중이었다.
다만 준비하라니까 준비는 하면서도, 초필로틀은 한 가지 의구심을 지우지 못했다.
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 전쟁을 준비하란 말인가?
군인이 아무리 명령받은 대로 싸우는 존재라지만, 전략을 ‘준비’하려면 어떤 정치적 판단이 나오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애초에 초필로틀은 ‘철혈의 꽃’에 가담한 시점에서 정치적 판단과 무관한 사람이 아니기도 했고.
태평양 절반의 패권을 쥔 일본과의 전쟁인가? 그렇다면 그에 맞춘 해전과 상륙전 대비가 필요하다.
물론 최선을 다해 싸운다. 그러나 결정 하나에 수많은 부하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작전의 성공률은 얼마나 되지?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실패할 작전에 부하들을 밀어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공한다면, 그 작전이 전략적 승리의 초석이라는 의미라도 있다면 몇천몇만 명이 다진 고기가 되더라도 상관치 않고 떠민다.
그러나 그런 의미마저 없다면?
시작조차 해서는 안 되는 전쟁이라면?
일본이 멕시카의 공격을 받으면, 다이온 역시 참전하거나 일본에 막대한 지원을 하리라는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요컨대 일본을 멕시카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는 이상 그 전쟁은 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일본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그것으로 태평양에서의 우위는 확보된다. 일본과 태평양이라는 이중의 방패가 있는 셈인데 그 너머의 아시아 대륙을 치는 건 불필요하다.
그런데도 굳이 전쟁을 하려 든다면…… 초필로틀로서는 쿠에츠팔린의 판단 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혹시 우리가 영명한 지도자라 믿었던 인간이, 실은 자격 미달의 전쟁광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최고지도자가 이룬 모든 업적은 그저 우연히 가공할 병기를 손에 넣어서일 뿐이고, 그렇게 분수에 맞지도 않는 승리를 거머쥔 거라면?
-우리는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올려선 안 될 사람을 앉힌 게 아닐까?
그 의구심은 태평양 방면군의 재편성 과정을 최고지도자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까지 이어졌다.
“……하면 다이온의 심장부를 직접 타격할 수 있을 걸세.”
“예……, 예?”
쿠에츠팔린은 씩 웃었다. 가장 신뢰하는 사령관이 다른 데 정신을 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쿠에츠팔린은 자신이 제시한 작전이 워낙 파격적이라 초필로틀이 놀라서 넋을 잃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솔직히 신수덕이 우릴 이용하려는 수작임이 너무 뻔해서 그 점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자가 가져온 수단은 실로 획기적이야. 인류의 전쟁 양상 그 자체를 바꿀 거란 말이네.”
최고지도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던 초필로틀은 쿠에츠팔린 앞에 놓인 서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천천히 넘겨보는 초필로틀의 얼굴이 처음엔 당혹으로 일그러졌다가, 점차 경악과 함께 입꼬리가 처진다. 그렇게 피부가 늘어진 몰골은 단 몇 분 사이에 늙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각하, 이건……?”
말없이 웃기만 하는 최고지도자의 얼굴을 보며, 초필로틀은 자신이 둘로 쪼개진 듯한 감각을 느꼈다.
바로 몇 초 전에 자신은 여기 앉아 쿠에츠팔린이 과연 멕시카 자주국의 최고지도자, 이 대륙의 주인에 적합한지 의심하고 있었다.
아마 계속 생각을 이어나갔다면 ‘위험한 결론’…… 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이 작전 제안서, 그 외 기상천외한 기술제휴를 보고 몸을 떠는 자신이 있다.
패배의 예감이 초필로틀로 하여금 쿠에츠팔린을 의심하게 했다면, 승리의 예감은 그에게 ‘이 전쟁은 해볼 만하다’고 속삭인다.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이 알고 있던 걸 깨부수고 더 큰 앎으로 나아갈 기회가 온다.
그 순간 악마의 속삭임처럼, 실은 알고 있던 게 틀리지 않았다는, 틀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증거가 희미하게 반짝인다.
그리고 덜컥 믿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내가 했던 판단,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그렇게 판단을 수정할 마지막 기회는 지나간다.
“만약 ‘문’이 열린 시간을 조정할 수 있어서, 지속적으로 보급 물자를 보낼 수 있다면 대양 건너편에 손쉽게 교두보를 설치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기습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그 지점부터 전면적으로 한 국가를 공략해 나갈 수도 있습니다!”
자기보다 더 흥분해서 말을 쏟아내는 초필로틀을 웃으며 바라보던 쿠에츠팔린은 손을 들어 부하의 말을 막았다. 그제야 초필로틀은 퍼뜩 정신이 돌아온 듯 ‘죄송합니다’, 라며 말을 그쳤다.
물론 그 죄송하다는 말에는 감히 불온한 상상을 했던 초필로틀의 죄책감도 들어 있었지만, 쿠에츠팔린은 영영 그 사실을 알 수 없으리라.
“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몇 가지 있네. 이렇게 획기적인 무기가 있음에도 왜, 직접 하지 않느냐는 거지.”
“그야 로마 황제의 눈치를 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로마 제국은 우리와도 밀약을 맺었지만 다이온과의 동맹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요. 두 강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면서 유럽에서 세력을 불려 나갈 심산인데, 거기다 대고 식객인 신수덕이 훼방을 놓는다면 결코 무사하지 못하겠죠.”
“그럴까? 신수덕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벨리사리우스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로마 황제가 알고 있다는 말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네.”
“그럴 거라면 애초에 감춰두지, 우리에게 알려주진 않았을 겁니다…… 만, 동맹이라는 말만 믿어선 안 되겠죠. 저들이 동맹을 깨고 기습할 가능성 역시 생각해두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들이 동맹을 깰 가능성이 없을 경우인데, 이 기술, 우리더러 실험해보라는 것 같지 않나.”
“처음 ‘치치미틀’을 전장에 불러냈을 때, 우리 군은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시간과 자본은 충분히 제공하겠네. 괜히 획기적인 작전 한 번 쓰겠다고 우리만 피해를 보는 꼴이 될 순 없지. 충분한 안정성을 확보해보게.”
***
시반과 데렘칭, 차파르는 다른 곳에 있다면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주고받았고, 칸발리크에 있다면 하루에도 몇 번이고 회의를 열었다.
미리안의 대응은 기민하고 교활했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스무 살 때부터 지금까지 저렇게 오래 정권을 지키진 못했을 것이다.
“설마 카간을 움직일 줄이야.”
“그것도 아주 교묘한 방식이오. 의원이라는 작자들이 자기가 ‘카간의 높은 뜻을 받든다’고 떠들긴 하는데 카간 본인이 나서서 뭔가를 하진 않고 있소.”
“우리도 비슷한 방식을 쓰면 되지 않소? 어차피 카간께서 제국입헌당 지지를 드러내지 못하신다면 진위를 누가 가릴 수 있겠소?”
“아니, 그게 아마도 미리안의 노림수일 거요. 감히 폐하의 조칙을 날조했다며 우릴 몰아붙이겠지. 그때는 카간께서 직접 나서도 우리가 꾸민 공작을 밝히기 위함이니 명분에 문제가 없을 테고.”
깊은 한숨이 세 사내 사이를 오간다.
“민족주의 프로파간다는?”
“진즉에 저쪽에서 대응했소. 알타이 민족의 분열을 획책한다며 연일 비난이 쏟아지고 있지.”
말싸움.
명분 싸움.
누군가는 이를 공허하다 할 것이나, 이러한 명분 싸움이 결국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절대로 공허하지 않다.
명분은 그 자체로 실재다.
명분이냐 실리냐를 저울질하는 인간조차, 그런 저울질이 필요한 이유를 열심히 설명하려 드는 시점에 이미 자기만의 ‘명분’을 확보하려 드는 것이다.
인간만사, 명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미리안이 명분 싸움에서 철저히 우위를 점하면서, 다이온혁신당은 창당과 동시에 처참한 꼬락서니가 되었다.
황정회에 대한 승리를 자축하며 그 당사를 그대로 다이온혁신당의 당사로 썼으나, 지금 이곳은 을씨년스럽다는 표현마저 어울린다.
몽골 좌익 정당들의 연합체였을 때도 동지들이 많은 건 아니었는데, 이제는 그 절반도 안 되는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사 안을 어슬렁거린다.
당의 삼두(三頭)는 불도 제대로 켜지 않은 집무실 안에서 한숨만을 쏟아냈다.
그러다 문득, 데렘칭은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활동이 한창 불법일 때도 그러했듯이, 어둠 속에서 데렘칭의 눈은 형형히 빛났다.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
미리안의 목을 죌 올가미는 서서히 완성되고 있다.
류성일은 만족스레 웃었다.
지금은 당의 원로들을 불러다 앉혀놓고 기분 좋게 술잔을 돌리며 몽골과 고려의 완전 통합을 축하하고 있지만, 이 원로들조차 류성일의 속은 헤아리지 못하리라.
-그 콧대 높은 몽골인들도 결국 도움을 청해왔다.
-한족 유지 중 내게 탄원서를 보내온 이도 있다.
류성일은 한족 유지들의 처우를 개선해 줄 듯 달콤한 미끼를 내밀면서, 그들을 조금씩 자기 밑으로 조직화시켜 나갔다.
그들은 아마 자기네 노력이 고려의 유력 정치가에게 통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 류성일이 부리기 쉬운 졸개들이 되어가는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신수덕도 자기 선에서 뭔가를 해보겠다며 긍정적인 답신을 보냈다.
-내 기쁨은 그대들의 기쁨과는 다르다네.
호탕한 웃음소리로 술자리를 채우면서, 원로들을 마음껏,
멸시한다.
이 자리는 그저 류성일이 ‘태사의 정책을 얼마나 지지했는지’ 보여주기 위한 자리다.
태사를 충실히 뒷받침하며 오로지 고려의 영광에 기뻐하는 애국지사.
그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류성일의 모습이다.
온화한 얼굴, 굵직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정치가, 언론인, 학생, 시민 가리지 않고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서,
속에선 한 아이의 큰아버지를 죽이고, 이제 그 아이마저 어떻게 죽일까 하는 상상에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추악한 늙은이.
그것이 류성일의 본모습이다.
“역시 다음 태사는, 류 의장께서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로 중 하나가 취기가 잔뜩 올라 그런 아부를 한다.
“어허, 말씀은 고마우나, 저에게는 돌아가신 선대 태사 합하와의 의리가 있습니다. 그분의 조카는 저에게도 조카 같은 존재입니다. 저는 원로로서 조카가 걷는 길에 가시를 치워주는 역할이면 그걸로 족합니다.”
”크으, 역시! 어? 역시! 류 의장이십니다! 우리가 다 본받아야 해요! 어느 모로도 정도를 벗어나질 않으셔!“
류성일의 두뇌는 태사부의 움직임을 향해서도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위험할 수도 있었던 아부 역시 적절히 받아낸다.
-미리안은 잘 해내고 있다. 닥쳐오는 모든 공격을 사납게 제압하고, 목줄기를 물어뜯고 있지.
-허나 범이 용맹하다 한들 끝도 없이 달려드는 늑대를 언제까지고 당해낼까.
-달려드는 적들을 목을 물어뜯어 제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결국 궁지에 몰려 있다는 뜻이다.
-빈틈 한 번. 그 빈틈 한 번에 범은 목을 내어주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