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8)
“폐하의 협력에 감사드리지.”
“이걸로 급한 불은 껐지만, 완전한 수습이라 보긴 어려워.”
루우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다 이제 어쩔 거냐는 표정으로 리안을 바라봤다.
‘친구’의 눈 밑은 날이 갈수록 거무튀튀해지고 있었다.
피로, 압박감…… 그 모든 것이 지금 미리안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중이다.
황제가 직접 나서서 제국입헌당의 몽골계 정치인들을 회유한 건 이 때문이었다.
리안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태사 대신 ‘국민의 사랑을 받는’ 카간이 직접 나서도 그런가…….”
리안이 아무리 큰 공을 세웠다 해도 그것은 고려 국민들에게나 매력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몽골인들 입장에선 그녀가 루우를 도왔다는 사실 말고는 큰 지지를 보내기 어려웠다.
몽골 내전의 종결도 루우의 계승을 위해 신하 된 도리를 했을 뿐이라 여기는 자들이 많았다.
루우는 세계대전 당시의 지도자인 시레문의 딸이었으며, 소녀의 몸으로 당당하게 고려의 황제가 되었고, 황실의 분란을 잠재우고 위대했던 역사 속 ‘다이온’을 현재로 불러왔다.
그뿐이던가. 종말이나 다름없었던 칸발리크의 운명을 구하려고 분투한 사람도 바로 루우였다.
그런 루우가 지원하는 후보라면, 많은 유권자의 표가 그 후보에게 향할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 점은 시반이나 그 혁신당인지 뭔지 하는 자들도 대책을 세울 거야.”
“몽골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방법을 쓸까?”
“민족주의라는 건 생각 외로 섬세한 감성이니까. 알타이 민족 개념을 창작하고 그걸로 다이온 연방에 사람들이 흥분하도록 했지만, 그래도 몽골인과 고려인 사이의 차이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도 없지.”
물론 진심으로 두 민족이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고 믿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민족을 ‘피부에 와닿는 감각’으로 구분하려 한다.
생활 습관의 차이, 언어의 차이.
루우도 처음 고려에 와서는 적응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
“어쩌면 시반은 몽골인들의 ‘두려움’을 자극할지도 몰라.”
“고려인들이 겉으로는 ‘알타이 형제’ 운운해도, 결국 몽골인의 상전으로 서려고 들 것이다, 라는 두려움 말이지.”
“고려인인 태사가 대원 전체의 태사가 되는 것도 그렇지만, 아마 그 의혹에서는 나도 자유롭지 못할 거야.”
루우가 고려의 황제가 될 때 겪었던 것과 정확히 반대 방향에서 똑 닮은 상황이 펼쳐지리라.
“루우 테무르 공주님은, 이미 왕서라라는 이름의 고려인이 되어버린 건 아닌가, 하고 말이지.”
“대놓고 그런 의심을 부추기진 않겠지만, 폐하가 얼마나 고려에 더 오래 머무는지 따위의 선동을 시도할 순 있겠군.”
그리고 ‘다이온혁신당’은 몽골인에 의한 정부와 의회를 지켜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표를 얻는다.
곤란하다.
“몽골 지역에서까지 제국입헌당이 상당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합’은 어려워져.”
만약 1937년 총선거가 몽골 지역에서는 다이온혁신당, 고려 지역에서는 제국입헌당, 이렇게 지역색과 민족색을 확연하게 드러낸다면…… 그건 먼 훗날 분열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두 민족의 차이는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질 테고, 그로 인한 분열은 곧…… 다이온 연방의 붕괴.
다이온 연방의 붕괴는 동아시아 전체의 극심한 혼란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혼란은 피를 보고야 말 것이다.
연방이 끝내 붕괴하든지, 아니면 붕괴를 막으려던 인간들이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찍어누르고 억지로 통합을 이어가든지…….
특히 후자는, 마르코 폴로의 환상 속에서 세 발 까마귀 완장을 하고 카라코룸 시내를 장악했던 무리를 떠올리게 한다.
천손민족협회 출신들이 견하의 지지 기반이 된 걸까? 그 세상에서 견하는, 천손민족협회 출신들과 함께 권력의 한 축이 되고야 만 걸까? 그가 저지른 일들 때문에 수많은 이들의 증오를 받다가, 끝내 암살당하고 만 걸까?
견하를 응천으로 보내기로 한 결정은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태사, 몽골 내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다이온 직할령에 내려가 있는 몽골인 관료들에게도 손을 뻗어보는 게 어떨까.”
리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루우는 여전히 다이온혁신당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리안은 루우의 말을 되짚어보다 문득,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의 어떤 부분을 떠올렸다.
“몽골인들에게 ‘관리인’의 지위를 내린다…….”
“고려인의 하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한족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기대로 덮어버릴 수 있을 거야.”
자신도 몽골인이면서 루우는 태연한 얼굴로 무서운 이야기를 입에 담는다.
누군가 말했듯 고귀한 보르지긴은 제 민족에게서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민족에 대한 애정보다 통합된 제국의 통치자가 되는 게 루우의 마음을 더 사로잡는 건지…….
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리안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루우는 지금 그 의도를 재야 할 대상이 아니다. 루우는 친구들, 리안과 견하를 구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고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이 무슨 착란인지.
정신적으로 그만큼 몰려 있는 건가.
“……시반 무리를 직접 타격할 방안도 생각해봐야겠어.”
간신히, 리안은 루우의 말에 한마디를 더 보탤 수 있었다.
***
멕시카 자주국은 아즈텍 연방과의 역사적 연속성은 인정했지만, 그 체제만큼은 이어받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자신들은 아즈텍 연방보다 더욱 발전한 체제이며, 지난 내전은 그 역사적 발전에서 벌어지는 필연적 과정이라 선전했다.
국가 원수의 칭호도 아즈텍 연방이 쓰던 ‘통령’이 아니라 ‘최고지도자’를 썼다.
전자는 아즈텍 대륙의 모든 민족,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들어온 민족까지 모두를 포괄한 연방제를 상징했다.
그러나 후자는 연방제를 폐지하고, 중앙정부가 파견한 관리들이 전국토에 일률적인 통치를 펼치는 새로운 체제를 상징했다.
상징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실제 정책으로 이어졌다. 특히 다양한 유럽계 민족의 언어와 문화는 무시되었고, 철저히 ‘원주민화’ 시키기 위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언제 비(非) 멕시카계 원주민, 태평양 연안의 일본계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당장이 아니라는 그 사실에 안도하며, ‘형제’라 불리게 된 그 민족 대표들은 수도 쿠아우테목으로 모여들었다.
최고지도자 쿠에츠팔린은 연방 통령이 앉던 자리에서 그들을 찬찬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투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최고지도자는 또 어떤 투쟁을 시작하려는가. 수년간 아즈텍 대륙을 뒤덮은 내전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회복은커녕 군인들은 여전히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점령지를 배회하며, ‘적’을 색출하여 처분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 ‘처분’이 재산 몰수와 추방이라면 관대한 편이다. 처형도 관대하다면 관대하다고 볼 수 있다.
전후 복구 사업에 끌려가 ‘노예 노동’을 하는 처지가 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 비참함은 여기 ‘민족 대표 회의’에 모인 민족 대표들조차도 연민이 들 지경이었다.
이제는 좀…… 화해와 회복을 이야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말이 승자 측에서도 슬슬 나오고 있다.
유럽계 이주민과의 불균형. 그에 대한 불만은 대공황을 거치며 결국 내전으로 폭발했지만, 결코 용서 못 할 원한에 이를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내전은 저들이 아니라 이쪽에서 일으킨 것이니까.
내전을 거치면서 대공황 중에도 호의호식하던 자들은 대부분 몰락하고, 비대해진 군과 군수산업을 통해 일자리 문제도 상당히 해결되었다. 자연히 분노도 누그러졌다.
이젠 전시 경제를 정상으로 되돌릴 때가 아닌가.
그런데 쿠에츠팔린은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특별히 전쟁을 사랑해서 이 전시체제를 이어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는 대륙 단위로 통합된 문명권의 최종 결전이라는 불가피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지요.”
문명 최종 결전.
민족 대표들은 그 말을 처음 듣는 게 아니다. 쿠에츠팔린이 최고지도자로서 쿠아우테목에 입성한 이래, 내전의 종결을 기념한 연설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반복해 온 말이다.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궁극의 회의(懷疑)임과 동시에, 멕시카 자주국의 최종 승리, 그 한없이 밝은 미래에 대한 궁극적 믿음이다.
“우리 대륙에 유럽 각국이 서슴없이 개입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각에서 주장하는 균형을 통한 평화라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력 균형에서 비롯되는 평화는, 그 균형이 깨졌을 때 회복하려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서유럽 국가들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아즈텍 연방이 비틀거리자마자 온갖 핑계를 대며 그 남은 살을 뜯어 먹고자 달려들지 않았던가.
“브리튼, 에스파냐, 신성 제국, 로마 제국, 세계 혁명 연합, 다이온 연방, 우리 멕시카 자주국…… 남쪽으로는 잉카 공화국과 마푸체 공화국. 이런 식으로 세계가 일정한 구획들로 나뉘고, 그 구획들이 서로를 침범하지 않기로 한다…… 이런 구상이 지켜지기만 한다면 인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겠습니다만.”
하지만 구 아즈텍 연방이 흔들릴 때 그러했듯이, 멕시카가 흔들릴 때 다른 제국들이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보장은 진즉에 없어졌다. 멕시카가 ‘자주국’임을 자처하려면 타국의 막연한 선의에 기대선 안 된다.
“첫째로 생각할 것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해자 삼아, 우리의 실력을 기르며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멕시키가 국력을 기르는 동안 다이온이나 다른 강국들이 가만히 있어 줄까? 그들도 국력을 증강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멕시카가 아무리 열심히 국력을 키우더라도, 이미 앞서 나가 있는 다른 열강에 비해선 늘 모자랄 수밖에 없게 된다.
아즈텍 대륙은 분명 축복받았다고 할 정도로 비옥하며 자원도 풍족하지만, 그것이 다른 열강의 국력을 단번에 뛰어넘을 만한 요인은 아니라고, 쿠에츠팔린은 생각했다.
“따라서 둘째로, 우리는 ‘지금’ 유리한 요소에 주목해 ‘지금’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적들이 준비되기 전에, 적과 우리의 격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멕시카 자주국에는 군대도 있고 무기도 있다.
군대는 아직 내전의 감각을 망각하지 않았다. 전투 경험은 쌓인 그대로다.
병기는 또 어떤가. 내전을 치르며 고려와는 다른 방식으로 개량한 기갑사가 있다, 시체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파멸인도 있다.
멕시카인들은 이 파멸인을 그들이 믿었던 옛 신화에 나오는 악령, 치치미틀이라 부른다. 그렇게 ‘자기네 방식대로 이해할’ 정도로, 파멸인은 멕시카인들의 전쟁에서 익숙한 것이 되었다.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대서양 너머의 문제는 정리됐습니다. 시급한 것은 태평양의 문제입니다. 태평양 너머, 다이온이 초강대국으로 떠오르기 전에 싹을 자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두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이온과 전쟁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