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7)
허동주 세력은 밑바닥 병사들, 평민 출신들이 주류고, 미승휴 세력은 고위 장교들, 귀족 출신이 주류다…… 이런 식으로 칼같이 나눌 수는 없다.
그러나 두 세력의 갈등을 쉽게 설명하기엔 알맞은 구분법이긴 하다.
실제로 저쪽에선 허동주 세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전쟁을 틈타 운 좋게 신분 상승한 천것들’이라며 멸시하길 망설이지 않았다.
반대로 이쪽에선 미승휴 세력을 ‘우리가 흘린 피로 편하게 전쟁에서 이기고 권력을 유지한 무능한 종자들’이라며 경멸했다.
이런 갈등은 서로에 대한 평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의 충돌로도 드러났다.
특히 ‘태평천국 황실 처분’을 두고 벌어졌던 일들은, 그들이 결코 화합에 이를 수 없다는 확신을 주었다.
허동주 파벌은 민족의 원수가 생존하도록 ‘용서’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승휴 파벌은 어쨌든 전쟁이 끝나고 항복한 적과 ‘평시의 관계를 회복하는 걸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평민들을 비웃었다. 감정적이고 어리석다면서.
신수덕은 지금도 미승휴의 졸개들을 이해할 생각이 없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족에게 ‘도축’된 고려 사람들…… 그들을 지키고 그들의 죽음에 복수하려다 죽어간 전우들…… 그 피는 ‘고결한 척하는 자들’이 외교적 협상에 쓸 재료에 불과했단 말인가?
고려 민족을 절멸시키려던 자들이, 막상 불리해지니 문명이니 인권이니 하면서 살아남을 방도를 찾으려는 꼴은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자들과 비록 항복을 받아내어 치욕을 주는 자리라고는 해도, 어떻게 협상장에 마주 앉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식으로 살려둘 것인가’를 논의하는 협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하나, 벌레를 박멸하듯 눌러 죽여야 했다.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그런 벌레들을 보호하고자 민족의 영웅을 죽이다니.
얼굴 가죽을 한껏 끌어당겨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그들.
신수덕은 그들의 역겨움을 지난 30여 년 동안 충분히 느껴왔고, 그들이 또 어떤 역겨운 행각을 벌일지 예상할 수 있었다.
“우리가 미리안을 죽이면, 류성일은 그런 우리를 반역자로 몰아 죽인 후 권력을 장악할 속셈일 터.”
그렇기에 단번에 류성일의 수작을 꿰뚫어 보았다.
“따라서 우리의 전략은 미리안을 죽이면서 단숨에 고려와 다이온 정국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혹은,”
과연 여기 모인 사람들의 힘만으로 그게 가능할까.
“그게 어렵다면, 우리가 아니라 다른 이의 손을 빌리거나.”
순순히 이용당해주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농락하듯 이용해주겠다, 류성일.
신수덕은 턱짓했다. 그러자 부하들은 앞다퉈 신수덕의 방침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마치 쓸모를 입증하지 못하면 죽기라도 하는 듯.
***
“잠깐만, 한 사람씩.”
쏟아지는 말들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듯, 리안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실권이 태사인 미리안에게 있다고 해도 그녀는 황제의 신하다. 루우가 리안에게 할 말이 있다면 태사의 집무실로 찾아가는 게 아니라 태사가 어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황제 앞에 왔는데, 마침 리안이 여기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효윤도 어전으로 와서 세 사람이 모이게 됐다.
평소 같았으면 견하를 포함한 네 사람이 여기서 중요한 결정들을 논의했을 것이다……. 이렇게 셋이 모이니 견하를 쫓아냈다는 사실이 더 아프게 와 닿았다.
그러나 루우와 효윤이 들고 온 이야기는 리안이 그런 감상에 아주 잠깐 젖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선출 장교들이 그런 논의를 한다고…….”
일본에 대한 선제공격.
동명의 정치적 격변에 대한 이런저런 전망.
실각한 견하에 대한 그들의 충성.
그리고 실각했음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하는 견하…….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리안은 ‘어떤 가능성’을 떠올렸다.
리안은 그 가능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해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견하가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을까?”
“한다고 해도 친위쿠데타를 노리고 있겠죠. 언니 주변의 ‘모리배’…… 이 경우엔 제국정보사령부가 그 대상이 될 테고요.”
“잠깐,”
말을 끊은 사람은 황제였다.
“견하의 성격상 쿠데타를 기획하기보다는, 그저 자기가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 음모를 꾸미는 걸 방지하려는 게 아닐까.”
효윤은 끄덕였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견하라면 그렇겠지. 그런데 여기에 ‘신진’ 장교들이 얽히면 이야기가 달라져.”
본래 리안의 충성파 군인으로 양성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어느새 견하를 우두머리로 여기며 모여든다.
종종 있다. 자기가 지금 이익을 보장해 줄 인간 앞에 굽실대는 건지, 아니면 충성을 바치는 건지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이.
“이 자들이 견하를 구심점이라고 ‘주장’하며 뭔가 일을 저지르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해.”
“무슨 결단을?”
“견하를 더 멀리 내보내든지, 아니면 견하에게 모든 걸 알려주든지.”
효윤의 시선은 다시 리안에게 향했다.
“견하라면 앞뒤 사정을 설명해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견하가 스스로 물러나면 상황은 더 안정적으로 통제될 거고요.”
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견하의 마음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연인이 어떤 동기로 행동에 임하든, 그 행동까지 믿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견하가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리안이 취한 모든 조치를 이해하고 그대로 물러나 줄 것인가? 아니면 리안과 함께 방법을 찾아보려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리안이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가.
견하가 자기가 직접 해결하겠다며 권력을 장악해도 마르코 폴로가 보여 준 그 환상의 ‘조건’은 달성된다.
견하가 다이온의 새 수도 카라코룸에서 정계에 복귀하기만 해도 조건은 달성된다.
어떤 식으로든 그때 본 것과는 최대한 거리가 먼 현실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게다가 이 문제에는 견하 한 사람만 얽힌 게 아니다.
“신진 장교들을 견하와 접촉할 수 없도록 떼어놓을 필요가 있겠군.”
어쨌든 숙군 이후 리안의 권력 기반 중 하나이니만큼, 무작정 신진 장교들을 제거할 수도 없었다. 신진 장교들이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리안의 손아귀에 장악하는 것이 최선이다.
“언니!”
“장교들이 주제넘게 국가 외교의 향방을 논의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야. 견하는 응천의 행정장관으로 보낸다.”
리안은 효윤의 이의제기는 더 듣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루우에게 돌려버렸다.
“황제께서 하실 말씀은?”
“카라코룸 천도를 미뤘으면 한다는 거야. 모든 조짐이 좋지 않아.”
루우는 부유하는 산의 경로가 카라코룸을 향하는 것으로 예상되는 점, 마르코 폴로가 보여준 카라코룸에서 ‘문’이 열렸던 역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르코 폴로는 억지로 열렸던 문은 다시 열리기 쉽다고 했어. 그 말대로라면 뭔가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전까진 카라코룸 천도를 미뤄야 한다고 봐.”
“하긴, ‘내가 카라코룸에 있는 것’도 조건 중 하나일지도 모르니까…….”
리안은 거기서 어떤 생각에 도달했다.
아주 잠깐 숨을 멈췄지만 그건 찰나의 일이었다. 루우도 효윤도 리안의 이상을 눈치채지 못했다.
“몽골과의 통합은 하루 이틀 안에 끝날 일이 아니야. 카라코룸 천도는 그 후에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될 테니 아직 시간은 있어. 그 문제는 그동안 해결법을 생각해보자.”
***
하지만 통합 논의도 쉽게 풀리지 않았다.
시반을 대표로 한 몽골 제국입헌당 인사들이 대거 ‘당의 분리’를 선언, 새로 ‘다이온혁신당’을 창당했던 것이다.
고려식 발음으로는 ‘대원혁신당’이 되는 새로운 당의 소식은, 차근차근 몽골과의 통합을 준비하려던 리안에겐 적의 기습 같은 것이었다.
“내 눈앞에서는 얌전한 척하더니…….”
쿠릴타이가 임시 연방의회에서 참의원 지위를 누리게 해주겠다. 참의원 의장 자리도 시반에게 주겠다…… 리안이 보기엔 상당한 예우였지만, 시반과 그 동지들의 눈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임시’가 끝나고 나면, 그다음 연방의회에서는 지위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건가.”
이해는 가지만, 가만히 앉아 이해만 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리안은 즉각 대응을 마련했다.
당의 지도부를 소집하고, 그 자리에서 아직 시반의 행동에 동조하지 않은 몽골 측 인사들과 접촉하기로 결정.
리안의 직접 초대를 받은 이들이 동명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딱히 시반의 행동에 반대한다기보다는, 아직 거취를 정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려의 태사, 다이온 전체에서 봐도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이가 부르니 일단 동명으로 오긴 했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리안이 아니었다.
“짐이 그대들을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었음을 용서하시오. 카간이 노골적으로 어떤 당의 편을 들어준다는 게 지금 체제에서 좋게 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니.”
오찬 자리에서 리안을 기다리던 중, 갑자기 들어온 카간 루우를 보고 손님들은 모두 황송한 얼굴로 예를 표했다.
정갈한 음식들이 나와 눈과 코를 즐겁게 해주었지만, 몽골 정치인들은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
소탈한 태도로 식사를 계속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는 루우 때문이었다.
“짐이 여기까지 나왔으면 짐작들 했겠지만, 동군연합을 이루는 두 나라의 완전한 통합은 짐의 뜻이오. 타이시는 짐의 뜻을 받들려고 가장 앞장섰을 뿐이지.”
“그, 그럼 시반 총재가 다이온혁신당을 창설한 것은……”
“짐이 직접 칸발리크에 미리안 타이시와 방문했는데도 어째서인지 슬픈 오해가 생긴 것 같소.”
몽골 정치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루우 테무르는 꽤 돌려 말하긴 했지만, 시반의 행동을 꽤 불쾌하게 여기는 건 분명했다.
카간이 미리안과 함께 방문한 의도를, 시반 정도 되는 정치인이 모를 리 없었다. 못 알아들은 척하며 카간의 의사에 정면에서 반하기로 한 것이다.
카간-황제의 권력을 제한한 입헌군주제라는 방패를 이용해서.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소. 새로운 정당 활동을 시작한 이들을 짐이 함부로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허나 이런 오해가 더 커지는 걸 방지할 수는 있지 않겠소?”
오해를 예방한다. 루우 테무르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진의는 몽골 정치인들이 제국입헌당을 떠나지 않고 미리안에게 협력해달라고 회유하는 데 있었다.
“이제 막 창당해 이름도 생소한 정당에서, 과연 얼마만큼의 표를 얻을 수 있겠소. 차라리 제국입헌당의 이름으로 다이온혁신당의 후보와 경쟁하는 편이 낫지 않겠소?”
제국입헌당에서 후보로 올려줄 것이다. 그렇게 제국입헌당에 남으면 황실의 지원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루우 테무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야심이니 이상이니 따지기 전에, 그 모든 것이 의석이 있어야 가능한 일.
의석과 그에 따르는 권력이 있어야 야심도, 이상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의석이 없다면, 선거에서 확실히 이길 수 없다면 그 모든 것이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잘들 생각하시리라 믿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