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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81화 (481/541)

신진(5)

칸발리크에서 올라온 구원군이 도착하자 남북으로 협공당하는 쪽은 오히려 주원장의 명나라 군대가 되었다.

그렇게 대패한 명나라는 이후 한동안 몽골 정복을 포기하고 만다.

마르코 폴로가 손을 들어 카라코룸 쪽을 가리켰다.

공성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주원장은 역시 낭키아스와 키타이를 정복하고, 100년 만에 한족 독립왕조를 창건한 인물다웠다. 그 또한 영웅이었다.

철도라고 해봤자 아직 원시적인 형태이던 그 당시의 기술력으로 저렇게 각종 공성 병기를 카라코룸까지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것은, 오로지 지휘관의 역량이 뛰어났기 때문이니까.

그렇게 불덩이가 날아들고, 우구데이 카간이 건설한 세계의 수도는 성곽의 파편과 사람의 파편이 흩날리는 지옥으로 전락했다.

문득 바로 옆으로 다가온 마르코 폴로가 물었다.

“이때 사람들이 무엇을 택할 수 있었을까.”

장렬한 죽음? 치욕스러운 항복?

“압도적인 승리의 가능성이 있다면, 아무리 위험한 것이라도 택하지 않았을까?”

루우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인간은 궁지에 몰리면 언제든 쿠빌라이 카간이나 마르코 폴로가 남긴 경고 따위는 무시할 존재다.

당장 리안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견하의 죽음을 피하려고 수단 방법을 안 가라지 않는가.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면 인간이 언젠가 위험한 문을 열어젖히고, 이 세상 또한 파멸로 치닫는 것은 필연인가?

상황 변화는 루우가 생각을 이어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익숙해질 정도로 많이 보진 않았지만,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하늘에 검붉은 문이 열리고, 괴물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광경.

“저건 제물을 이용한 방식이 아니었다.”

“……하긴 산 사람을 파멸인화 시킬 여유 따윈 없었을 테니. 그럼 대체 어떤 방식으로……?”

“두 가지 방법을 응용하는 거다. 이쪽이 아니라 저쪽에서 문을 열게 하는 한편으로, 이미 건너와 있던 ‘신종’을 이용했다.”

“여기에 내 직계 조상도 있었겠지.”

“영혼에 대한 갈망에 반응해 영혼을 지닌 자-신종이 세상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일은 가끔 있었지만, 작제건이 용의 혈통을 얻어보겠다고 일으킨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루우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 얼굴은 소녀의 모습을 한 가엾은 용, 왕건의 어머니, 몽부인과 무척 닮아 있었다.

“포획한 신종도 있고 신종의 혈통이 뒤섞인 자도 있다면 문을 여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 다소 억지스럽긴 하지만.”

억지스러운 탓일까. 괴물의 수는 칸발리크 사태에 비하면 많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파도처럼 몰려들었었는데.

하지만 공포를 심어주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그 공포는 군을 와해시키기에도 충분했고.

이후의 일은 뻔했다. 주원장은 군을 물려 수습하려 했고, 때마침 칸발리크에서 몰려온 몽골의 구원군에게 대패했다.

“몽골인들이 세계를 정복하며 저지른 학살 탓도 있겠지만, 이 카라코룸 전투도 한족이 몽골인을 악귀로 보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을 것 같군.”

정말로 악귀를 풀어버렸으니까.

“내게 이걸 보여준 이유가 있겠지? 여기에 내가 찾는 답…… 아니, 실마리라도 있나?”

“내가 보여준 건 당장의 위기에 대한 경고다.”

선고라도 내리는 듯한 어조로 마르코 폴로는 대답했다.

“한 번 억지로 열린 문은 경첩이 헐거워져 있기 마련이다, 루우 테무르.”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카라코룸이 언제든 다시……?”

“카라코룸뿐만이 아니다. 아즈텍 대륙 전체와 칸발리크, 로마도 마찬가지지.”

손가락을 들어, 루우의 심장 쪽을 가리켰다.

“이미 세상이 망가져 간다는 징조가 보이지 않나? 네가 나와 접촉한 곳도 마찬가지고.”

***

그 말을 끝으로 루우의 의식은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전에 발견한 부유하는 산, 그 안의 수백 년 묵은 절간이다.

어울리지 않게 최신 기계 장비들이 가득 들어차 있고, 연구원과 기술자들도 돌아다닌다.

승려들도 보이지만 이 절에 원래 있던 자들이 아니라 연구를 위해 밖에서 데려온 자들이다. 승려뿐만 아니라 크리스트교 각 종파의 사제나 유학자들도 와 있다.

이 모든 것은 황제 루우가 총력을 기울인 연구를 뒷받침하기 위함이다.

손을, 몸을 내려다본다. 이마부터 뒤통수까지 쓸어본다. 비늘도 뿔도 없다. 몸은 피투성이기는커녕 간단한 속옷 차림 사이로 반짝인다 싶을 정도로 깨끗하다.

그녀가 누워 있던 곳은 복잡한 기계 장치가 연결되어 있던 의자다. 주변에는 여러 종교의 기이한 문양과 기물이 설치되어 ‘의식의 도약’을 도왔다.

이러한 문양과 기물의 설치는 그냥 좋다고 아무렇게나 가져다 쓴 것이 아니다. 고려와 몽골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연구한 이단 기술의 정수를 이곳에 집약한 것이다.

시종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루우의 몸에 옷을 걸쳤다. 환자라도 된 것처럼 시종들이 입혀주는 대로 힘을 빼고 몸을 맡겼다.

그 상태로 입만 움직여 명했다.

“투글룩을 불러라.”

황제의 옥체를 함부로 보지 않으려고 투글룩은 무릎으로 기어들어 와 바닥에 이마를 댔다.

그런 투글룩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루우는 자신이 본 것들을 이야기했다.

“한 번 문이 열린 곳에 다시 열린 사례가 있나?”

“확인된 바로는 없습니다. 그런 곳이 있다면 신(臣)들이 그 부분을 반드시 중점적으로 연구했을 것입니다.”

투글룩의 말과 마르코 폴로의 말 모두가 옳다고 가정한다면,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두 번째로 열리면 다음은 없다는 뜻이군.

세계는 그걸로 끝. 모든 인간의 살점은 녹아내려 뒤섞였다가 역겨운 괴물로 재탄생한다. 영혼에 대한 희미한 갈망만 남은 채로.

그렇게 세계의 틈새를 혁세주와 함께 떠돌다 또 다른 ‘가능성’, 세계로 발을 들이밀겠지. 거기서도 이단을 만들고 파멸인을 출몰시키고, 사람들을 유혹해 멸망으로 이끌어 간다…….

영겁종말.

마르코 폴로가 직접 말해주진 않은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머릿속에 박혀 있다.

막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종말의 연쇄를 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부유하는 산, 경로 추정 결과는?”

“이 속도와 방향대로라면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는 카라코룸 상공을 통과할 것 같습니다. 경로와 속도의 변동이 커서 정확한 답을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대략 반년쯤 뒤에는 카라코룸 상공을 통과한다는 말인가.

투글룩의 말대로 이 ‘절을 얹은 부유하는 산’은 속도도 방향도 제멋대로다. 관측 기간이 짧은 탓도 있겠지만 아직은 규칙성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만큼 불안정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칸발리크에 접근했는데 지나치게 낮은 고도로 움직일 경우, 시가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또는 갑자기 높은 고도에서 추락해버릴 수도 있고.

그래서 루우는 ‘파괴’를 검토 중이다.

“파괴에 따를 피해 연구는 어떻게 되고 있나.”

이 산을 부수는 것 자체는 막대한 폭탄을 퍼부으면 끝날 일이다. 루우는 그렇게 부서진 산의 파편이나 잘못 떨어진 폭탄이 입힐 피해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하필이면 카라코룸을 향해 가고 있다.

마르코 폴로는 카라코룸에서 일어날 일을 경고했다.

리안은 카라코룸으로 천도하려 한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적으로 일어날 어떤 사건을 향해 모이고 있는 걸까.

투글룩은 루우의 질문에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하옵게도, 이 산과 절에 대한 언급은 현재까지 발견된 「쿠빌라이 문서」에서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연구원들이 문서를 전면 검토 중입니다만…….”

알았다고 손을 까딱인 후, 물러가게 했다.

일단은 태사에게 오늘 본 것을 알려야 한다.

그러고 나서 이 산의 파괴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

먼지, 혹은 썩은 나무토막처럼 바스라진 것이라 해도, 토칸의 시체는 유용했다.

사람의 형상은커녕 한 줌 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적절한 자극을 가하면 재미있는 변화를 일으켰다.

“보십시오, 약간의 이를 조작하고 적절한 기를 주입하면, 재생이라도 할 것처럼 반응을 일으킵니다.”

언뜻 보기엔 재 위에 곰팡이가 피어난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세한 촉수가 무수히 돋아나 꿈틀대고 있다.

“자극을 끊으면 어떻게 되지.”

신수덕의 질문에 연구원은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이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기의 주입을 끊자 촉수들도 바스락거리며 먼지로 돌아갔다.

“이론상으로는 그다지 새로운 건 아닙니다. 죽은 이단의 시체에서 종종 일어나곤 하는 현상이죠. 특히 인위적으로 양성한 이단의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신수덕은 모르지만 견하를 이단으로 만들었던 것이 바로 이런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시체가 손상된 경우에도 가능하진 않았을 텐데.”

“예. 그래서 더더욱 토칸의 사례가 특수한 것이지요.”

연구원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는 신수덕을 새로운 연구 성과를 보일 곳으로 안내했다.

“토칸은 실로 놀라운 이단이었습니다.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나 의식을 옮길 수 있는 ‘붉은 꿈’을, 토칸은 비교적 자유롭게 다뤘던 것 같습니다.”

주견하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타인의 의식을 불러오는 것도 가능했다고 말해줬겠지만, 이들은 그런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안다 해도 달라질 것도 없었고.

또 다른 ‘토칸의 시신 일부’를 이용한 실험이 신수덕의 눈앞에 펼쳐진다.

좀 더 복잡한 설비를 갖춘 곳이다.

이 실험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손에 꼽을 지경일 것이다.

그런 복잡한 ‘원리의 뒤틀림’이 일어나자마자, 시체 조각 주위로 손바닥만 한 ‘문’이 열린다.

시체에도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역시 인간은 영혼 없는 고깃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죽은 자가 어떤 존재였는지 증언할 수 있는 것은 썩어들어가는 육체뿐이다.

살짝 그런 감상에 젖은 신수덕의 귀에 연구원의 설명이 들어온다.

“본질적으로 ‘신종의 씨앗’이 성장해 문을 열고, 저 너머에서 파멸인을 전이시키는 것, 혁세주가 출현하는 것, 붉은 꿈으로 이단의 의식이 옮겨가는 것은 같은 현상입니다.”

즉, 의식만 옮기는 것이 아니라 붉은 꿈, 아니 붉은 세계로 육신을 옮기는 것도 가능하다.

“어딘가에서 ‘나가는 문’을 열 수 있다면, 붉은 세계를 통로로 삼아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 역시 가능하겠죠.”

“그 말은…… 군대를 이동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가능합니다. 물론,”

“인간의 육신이 붉은 세계를 관통하는 동안 멀쩡하게 유지될 수 있느냐 하는 거겠지. 이가 철저하게 붕괴해서, 아니 인간의 이가 그 붉은 세계에 ‘적응’하면서 파멸인화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간단한 추론이었다. 파멸인도 이쪽 세계로 들어오면서 ‘적응’을 거쳐 인간의 신체 기관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지 않던가. 그것의 기괴함은 둘째치고 말이다.

인간이 붉은 세계에 들어가면 그 과정의 역행이 일어나리라 생각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연구를 계속할 가치는 있겠군.”

“말씀하신 문제를 해결하면, 혁세주 소환의 의식을 응용해 목적지에서 ‘문을 여는 것’이 가능할 겁니다. 다만 거의 행성이나 위성 하나 정도 되는 혁세주나 가능했던 일을 사람의 손으로 이루긴 쉽지 않겠습니다만……”

“쉽지 않겠다만, 뭔가?”

“어디까지나 아직은 가설 단계인데, ‘한 번 열렸던 문’은 쉽게 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경우엔 출구가 한정된다는 군사 전략적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 그거면 충분하다. 계속 수고해주게.”

표정 변화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신수덕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공격 후보지로 가득 찼다.

-대양과 대륙을 건넌, 지리적 한계를 무시한 공격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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