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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80화 (480/541)

신진(4)

안세규가 던진 화두에 류성일은 희미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안 총재는 마치 태사 자리에 야심이 없다는 듯 말하는군.”

“저라고 왜 야심이 없겠습니까. 다만 저는 젊고, 의장께서는 연세가 있으시니 양보해드리는 거죠.”

“그럼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군. 나라고 연임의 욕망이 없겠는가?”

“언젠가는 내려오시겠죠. 그렇지만 은퇴해서 정계의 원로가 되시더라도, ‘전임 최고회의의장’과 ‘전임 태사’의 무게감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데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구먼.”

류성일의 얼굴에 웃음이 깊어졌다. 그와 함께 깊어지는 주름에 잔뜩 교활함이 서렸다고, 세규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안 총재가 바로 다음 태사로 나서지 않고, 굳이 여기 와서 나를 부추기는 이유는 뭔가?”

“제가 태사가 되려면 한 가지 선례가 필요합니다. ‘미승휴의 인척이 아닌 자’를 태사로 선출한 경험 말이죠.”

“그 조건에는 안 총재도 해당할 텐데?”

“하지만 불리한 측면이 의장님에 비해선 크지 않습니까. 의장님은 제국입헌당 ‘원로’의 거두이시면서, 미승휴 세대, 그러니까 세계대전 세대를 상징하는 분이시죠.”

“결국엔 그저 징검다리로 쓰겠다는 것 아닌가?”

“제 뒤에 태사가 될 누군가도 저를 징검다리로 쓸 겁니다. 그게 앞으로 무궁히 이어져 갈 제국의 정치 아니겠습니까?”

미승휴처럼 종신제 태사가 군림하던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다.

“우리는 서로의 ‘알리고 싶지 않은 부분’을 너무 잘 알고 있지.”

“그렇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소한 불화’도 있었죠.”

“그 불화를 3년 만에 해소하고 다시 동맹을 맺자는 게로군. 하필이면 왜 지금인가?”

“미리안은 풍군 작전을 성공시킨 공로로 마침내 제 백부를 뛰어넘는 인기를 누리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 또 다른 공로를 세우려 한다.

고려와 몽골의 통합. 단일 의회, 단일 정부. 고려인들은 얼마나 열광할 것인가.

“내년 선거에서 미리안을 꺾으려면 보통 수단으로는 안 됩니다.”

“보통 수단이라…….”

“그리고 풍군 작전의 ‘실제 주역’은 지금 실각한 상태죠.”

주견하. 그 건방진 애송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더니 결국 미리안이 직접 쫓아내고야 말았다.

일각에선 연극이 아니냐는 말도 나왔지만, 당장 주견하가 실권을 잃은 것은 확실했다.

“그래, ‘보통 수단’으로는 안 되겠군.”

“결심이 서셨는지요.”

“음, 안 총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우리가 차례로 태사 자리를 거치고 나면 그간의 다툼은 의미가 없을 걸세. 안 총재 말대로 두 사람의 ‘전임 태사’로 다음 태사의 취임식에 나란히 참석하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또 다른 ‘전임 태사’는 불편해하겠지만 말입니다.”

류성일은 껄껄 웃으며 안세규와 담소를 몇 마디 더 나눴다. 류성일과 안세규를 보며 불쾌한 표정을 짓는 ‘전임 태사 미리안’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유쾌했다.

안세규가 떠나고 나서, 류성일의 유쾌한 웃음은 조금씩 비웃음으로 변했다.

“‘보통’이 아닌 수단…….”

비상한 수단을 써서 미승휴를 죽였다. 그 조카의 목숨까지도 빼앗으려 했다.

한 번 더 사용한다 해서 달라질 건 없잖은가?

7년 전에 끊지 못했던 숨통, 인제 와서 끊는다면 어떤가.

때마침 그때 죽다 살아나는 바람에 귀찮을 정도로 커버린 애송이도 없어졌겠다,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미리안의 압도적 인기, 그걸 꺾고 승리할 가장 빠른 길은 미리안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미리안이 죽는다면 동정 여론이 크게 일어나리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동정 여론은 제국입헌당의 표로 몰려들 거고, 그렇게 ‘제국입헌당의 유력한 정치인’ 류성일은 애도를 표하며 자연스럽게 태사가 된다.

마지막 승자는 미승휴도, 허동주도 아닌 바로 나, 류성일이다!

상상은 쾌감이 된다.

“마침 비상한 수단으로 쓰기 적절한 첩보도 있다.”

3년 전, 이탈리아 사태에 관한 첩보와 함께 들어온 정보.

그 정보는 태사부와 제국정보사령부를 떠돌다, 류성일의 손까지 들어왔다.

“신수덕 이 자는 어딜 갔나 했는데 벨리사리우스 밑에 있을 줄이야.”

이 작자도 재미있는 자다.

“귀국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겠지.”

류성일은 신수덕을 안다. 그자는 귀국 자체에 목적을 둘 사람이 아니다. 귀국해서…… 복수하겠다고 미쳐 날뛸 인간이다.

“미끼를 던져볼까.”

***

미끼를 던진 건 류성일뿐만이 아니었다.

안세규도 류성일을 향해 미끼를 던졌다.

생각 이상으로 쉽게, 그 늙은이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조금 부추겼다고 콧김 뿜어가며 달려드는 꼴이란.”

한때는 군의 ‘지성’, 온화한 개혁주의자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류성일도 ‘더 늙기 전에 한 번쯤 태사를’이라는 유혹에 정신 못 차리고 넘어왔다.

권력을 향한 욕망은 지성마저 가리고 추잡한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가.

언젠가는 자신도 늙어서 후배들에게 저렇게 이용당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니 섬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당장의 일은 아니다.

당장의 일이 아니라면 미리 걱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류성일이 어떤 광대춤을 출지 지켜본다.”

류성일이 일으킨 풍파와 함께 추락할 제국입헌당을 구경하는 것도 즐거울 테지만, 류성일의 음모를 ‘고발’했을 때 그 표정을 보는 건 더 재미있겠지.

류성일은 제거되고, 류성일이 남긴 상처로 인해 제국입헌당도 선거에서 패배하리라.

저런 추태를 보이는 제국입헌당에 다이온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다고, 고려국민당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메시지만 대중에 전하면 된다.

류성일이 없어진다면 자신의 약점을 폭로할 증인도 하나 사라지는 셈이다.

“자, 적당히 큰 사고를 쳐줬으면 좋겠소, 노인장.”

***

붉은 것은 세계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피투성이 몸도 붉디붉다.

물론 여기서 보이는 몸뚱어리는 환상이고, 자신의 진짜 몸은 다른 곳에 잘 있으리라는 걸, 루우는 안다.

아니, 환상이라기보다는 이 몸이 그렇게 될 ‘가능성’ 중 하나라고 해야 할까.

붉은 꿈에 접하는 건 참 오랜만이다.

“불쾌감 때문에 다시 오고 싶진 않았는데.”

걷는다.

그녀가 이 붉은 꿈에서 만나야 할 사람을 찾아서.

만나서, 직접 물어야 할 것들이 수없이 많았다.

리안을 구하기 위해,

견하를 구하기 위해,

세상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이번엔 쿠빌라이의 자손인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든다.

처음에는 붉은 언덕 위에 한 사내가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인지하자마자 붉은 세상은 싹 사라지고, 광막한 어둠이 펼쳐졌다.

아니, 어둠이 아니라…… 루우와 저 사내 말고는 ‘없는’ 공간이다.

뚜렷하게 서로만을 인식할 수 있는 공간.

“사람과 용의 경계에 불안하게 서 있군. 혹은 사람과 신종의 경계. 아니, 신종 쪽으로 넘어지려 하는가.”

그 말을 듣고 다시금 루우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언젠가 땀투성이, 속옷 차림으로 견하 앞에 선 적이 있었다. 그것도 얼마나 오래전의 일인지.

그때 옆구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비늘의 흔적, 그걸 보고 견하는 자신의 정체를 추리해냈을 것이다.

지금은 그 비늘이 몸 곳곳에 돋아나 있다. 살을 뚫고.

이마를, 관자놀이를, 뒤통수를 뚫고 마구잡이로 돋아난 뿔 아래로 피가 흐른다.

그것은 보기에 따라선 가시면류관 같기도 하다.

피투성이가 된 원인은 바로 이것들이다.

“나는 감정이 꽤 마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너는 가엾군.”

“가문의 힘을 강화해보겠답시고 무수히 반복한 이종교배와 실험의 결과물이라서? 그냥 이건 업보야, 마르코 폴로. 동정의 여지 따윈 없지.”

“쿠빌라이가 그런 업보를 물려준 기억은 없다.”

“아니지. 위험한 게 있다면 위험을 경고하는 게 아니라 위험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게 은폐했어야지. 괜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조상님의 업보는 충분해.”

“경고하지 않았을 경우 세상이 맞이할 결말을 보여줄까?”

“……끔찍했나 보군.”

“특별히 더 끔찍하진 않았다.”

루우는 바닥…… 이라고 생각되는 곳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척 지친 듯한 기분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내가 이렇게 뒤틀린 꼴로 결말을 맞이한 세상도 있나?”

“물론. 자기 몸을 실험 대상 삼아 모두를 구하려다, 고통 속에서 죽어간 세상이 있다.”

“그럼 내가 뭣 때문에 당신을 만나러 온 건지도 알겠네.”

“안다고도 할 수 있고, 관측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지.”

“시간 개념에 대한 설명은 됐어. 내가 필요로 하는 조언은 그런 게 아니야.”

“네 주변 사람들 모두가 행복해질 가능성을 알려달라고 해도 나는 알려줄 수가 없다.”

단호한 대답에, 루우는 오랜만에 좌절을 느꼈다.

그 좌절을 확인하려고 질문한다.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아서?”

“그렇게는 말할 수 없다. 내가 여기서 신처럼 관측한다고 해서 신인 건 아니다. 인간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인간이었기에 명확한 한계가 있지. 나는 모든 세계를 관측했다고 말할 수 없고, 무엇인가가 절대로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라고 덧붙이며 마르코 폴로라는 존재는 손짓했다.

풍경은 다시 한번 바뀌어, 그들은 초원 위에 서 있게 되었다.

루우는 금방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렸다. 시기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몽골 초원이다.

유목민의 초원에는 참 안 어울리는, 성곽 도시가 저 너머에 보인다.

루우가 아는 저 도시엔 지금 성곽 주위로 현대 건물이 들어차 있지만, 여기는 그 대신 보루와 대명(大明)이라 적힌 깃발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일반적으로 성벽 밖에 저런 시설물을 설치할 필요는 없다.

즉 저 시설물은 도시를 공략하려는 자들의 것이다. 대명…… 명나라의 깃발이라고 한다면…….

“칸발리크 공략이 좌절되자,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은 직접 카라코룸을 공략해 몽골의 본거지를 끝장내겠다는 대범한 전략을 세웠다.”

“낭키아스와 키타이를 상실했던 시절이군.”

주원장이 이끄는 20만 대군의 카라코룸 포위전. 이보다 전의 칸발리크 전투와 이 포위전에서의 승리로 몽골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멸망의 문턱까지 갔던 것이, 세계대전과 더불어 한족을 경계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어떤 세계에서는 칸발리크가 함락되고 정말로 여기가 최후의 보루가 되기도 했다.”

“그건 세계대전 때랑 비슷한 상황이네. 그나마 우리 세계 쪽 사정이 나았구나.”

루우가 아는 역사에 따르면 주원장은 몽골의 허를 찔러 카라코룸을 공격했다.

눈앞에 칸발리크를 두고도 병력을 그렇게 멀리 우회시키는 전략은,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긴 했다.

설마 몽골군 주력이 집결한 칸발리크를 눈앞에 두고, 보급이 원활하지 않을 초원으로 병력을 밀어 넣으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렇기에 카라코룸은 방어전을 치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이 카라코룸을 함락시키면 북쪽과 남쪽에서 칸발리크를 협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몽골군의 군마 공급에도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그렇나 그렇게 되진 않았다.

카라코룸은 어린아이 한 사람까지 결사 항전의 영웅이 되어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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