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3)
3년이면 많은 시간을 준 셈이다.
이제는 대예와 보우슈엥, 알티샤흐르와 탕구트에서 총선거를 치를 때가 왔다. 선거의 밑바탕이 될 정당 활동의 자유는 당연히 보장되어 있겠지.
어설프게 왕당파로 과반 의석을 채워 넣고 간판만 그럴싸한 위성 정당으로 주변을 장식한 그런 의회를 만든다면…… 강제로 다이온 직할령으로 병합할 수밖에.
세계 혁명 연합, 즉 세련과의 완충지대로 둔 티베트도 얼마나 개혁이 진척되었는지 감독해야 한다.
완충지대인 티베트에서의 공산 혁명은 시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티베트의 정세가 어지러워져 ‘자발적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그렇게 혁명 정부가 들어선 티베트에 세련이 ‘어쩔 수 없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따라서 티베트도 충분한 개혁으로 정치적 안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다섯 나라는 이렇게 갈무리하는 한편으로, ‘협력회의 관할 지역’의 모호한 지위도 이제 끝내야 한다.
“고려의 통치도, 몽골의 통치도 받지 않던 지역에 드디어 일원화된 정부의 통치가 행해질 수 있겠죠.”
리안의 말에 시반은 다소 불안한 눈길로 물었다.
“동아시아 협력회의를 한 번 거쳐, 몽골과 고려 정부의 간접적인 통치를 받던 번거로움이 없어지는 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두 나라의 입법부만 통합되진 않겠지요.”
사법부도, 행정부도 통합될 터.
특히 행정부의 통합은 피할 수 없는 질문과 맞닥뜨려야 한다.
“누가 다이온 전체의 타이시가 됩니까?”
시반의 질문은 저항이라면 저항이랄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저항은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리안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제가 다이온 연방 전체의 태사가 됩니다.”
“……그럼 저는 물러나야겠군요.”
시반의 약간 뜸 들인 반응에는 치욕스러움이 녹아 있다. 시반 타이시가 당의 선배 활동가들이 내세운 ‘얼굴’인 것도 사실이고, 그간 미리안의 괴뢰처럼 중요한 일마다 인가를 기다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면전에서 ‘당신 내려와야겠다’는 말을 들으면 눈빛이 다소 거칠어지는 게 당연하다.
“시반 타이시께서는 연방의회의 참의원 의장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만.”
마치 미리 배려해두었다는 듯이, 리안은 몽골 제국입헌당 인사들이 통합 다이온에서 맡을 역할을 늘어놓는다.
한편으론 신경을 곤두세워 도대체 어디에 배치되었는지 들으면서, 다른 한편으론 이를 간다.
이토록 무력해도 되는가.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고려가 몽골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징검다리 역할만 한 정권. 그 정권의 수장이라는 수치스러운 이름만 남기고 마는가.
“좋습니다. 저는 두 정부의 통합과 업무 인계를 준비하겠습니다.”
리안이 시반에게 형식적인 감사를 표하기 전에, 시반은 리안이 가장 들먹이고 싶지 않았을 화제를 꺼냈다.
“그런데 합하께서 선언하셨던 ‘독립 보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역외오국을 안심시키고, 무사히 다이온 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리안이 발표했던 ‘독립 보장 선언’.
완충지대인 티베트를 제외한 나라들은 반신반의하면서 연방의 가맹국, 황제 루우의 제후 지위를 받아들였다.
고려의 일방적 패권을 꿈꾸던 사람들에겐 미리안이 마치 나라의 미래를 가로막은 것처럼 받아들여진 선언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고려와 몽골의 통합은 리안 본인이 했던 그 선언에 위배되지 않는가.
자, 미리안은 이제 뭐라고 대답할까.
아무리 그녀가 뻔뻔하다고 해도 ‘힘 앞에서 그런 약속은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내세우진 못한다.
힘의 논리도 ‘굴복한 약자에게 강자가 약속을 지키리라는 믿음’이 있을 때만 통하는 것이다. 힘의 논리에 작용하는 최소한의 신뢰가 무너지면 힘의 논리는 무력해진다.
미리안이 ‘힘은 약속을 마음껏 폐기할 수 있다’고 입을 함부로 놀리면 몽골의 여론이 거세게 반발할 것이다.
그러면 반대로 통합을 꿈꾸던 고려인들에겐 ‘괘씸한 몽골인들’에 대한 반발이 일어날 테고.
동군연합의 통합 과정에서 두 나라 국민 사이의 ‘유대’를 형성해야 하는데, 골만 깊어지는 사태를 리안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통합은 고려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몽골 국민의 자발적 열망에서 비롯되어야겠죠.”
“예?”
“서명운동을 진행해주십시오.”
미리안의 어조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다른 서류를 시반 앞으로 내밀었다. 「몽골-고려 합방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그렇게 적힌 표지를 시반은 멍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이토록 교묘하고 집요하게…… 고려인들은 몽골을 병합하려 해왔는가.
소름이 끼친다. 반발심은 증오심으로 변해간다.
“역외오국의 사정과 몽골-고려 간 관계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는 것은 제 몫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시반 타이시께선 양국 정부의 통합 준비뿐만 아니라,”
여기에 또 어떤 치욕스러운 요구를 덧붙이려는 것일까. 반항할 기력조차 빠져버린 멍한 눈길을 미리안에게 보낸다.
“카라코룸 천도도 준비해주십시오.”
***
“카라코룸 천도?”
데렘칭은 뒷골목을 헤매던 혁명가 시절 그대로, 비뚜름히 앉아 시반의 말을 들었다.
다만, 눈만은 크게 뜬 채.
데렘칭을 동요시킬 만큼 카라코룸 천도는 뜻밖의 소식이었다.
“그렇소. 참으로 교묘한 수작이지.”
시반이 이렇게까지 분노를 드러내는 일은 좀처럼 없다. 데렘칭은 충격으로 잠시 멈췄던 사고를 다시 돌려, 시반이 분노한 이유를 추정하기 시작했다.
“……동명이 연방의 수도가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진 않군.”
“저들도 동명을 수도로 삼으면 몽골 국민의 반발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알 테니 말이오.”
“어쨌든 몽골 영토 내에 있는 카라코룸을 수도로 삼으면, 실질이야 어쨌든 몽골 주도로 고려를 통합하는 모양새가 되니…….”
“그렇게 해서라도 몽골 국민의 반감을 줄일 속셈일 거요.”
“칸발리크는 반대로 고려 국민의 반감을 살 수 있으니, 대안으로 카라코룸을 골랐다……?”
“내전 당시 미리안이 입성해 개선식까지 연 곳이고, 그 후에는 고려의 류성일이 행정장관으로 있었소. 지금이야 차파르 동지가 행정장관이지만,”
“여전히 고려의 영향력이 강한 도시지요.”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다가, 동시에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차파르 행정장관에게도 의견을 물어봅시다.”
***
시반, 데렘칭, 차파르. 몽골 내전에서의 승리 이후 당을 이끄는 세 지도자로 자리 잡은 그들은 즉각 한 가지 사실에 동의했다.
-몽골과 고려의 통합을 막을 수 없듯, 몽골인이 주권자로서 다이온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 역시 막을 수 없다.
다이온 ‘안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면 오히려 몽골이 고려를 통합한 형세를 만들 수 있다.
당장 1년 뒤로 다가온 1937년의 선거도 있고, 거기서 승리하지 못해도 1941년, 1945년…… 선거는 계속 치러질 것이다.
적어도 내년 선거의 경우, 몽골 지역에서만큼은 제국입헌당의 몽골계가 상당한 의석을 확보하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다이온 연방이라는 체제 전체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몽골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실 인구도 고려에 비해 부족하기에, 몽골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다 해서 그게 연방의회에서의 압도적 우위로 연결되진 않는다.
새로 다이온의 도(道) 행정구역으로 편입될 한족 인구 다수 지역도 문제다.
몽골어나 고려어 구사 능력, 문화적 동화 정도, 민족 정체성 의식을 엄격히 심사해 ‘다이온인’으로 승인하고, 그들에게만 연방의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기로 했다.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한족의 정치 참여는 각 도의 자치로 국한된다.
화하, 형초, 파촉, 강회, 네 개의 한족 관리 특구에는 이마저도 보장되지 않는다.
발상 자체는 좋다.
언젠가는 한족을 키타이 민족과 낭키아스 민족으로 나눠, 인구 비례 문제 및 한족의 독립 열망을 꺾겠다는 생각도 나름 들어줄 만하다.
그러나 미리안이 구상하는 점진적 민족 공존이, 과연 시간이 지날수록 몽골과 고려, 연방을 구성하는 각국 비(非)한족에게 유리하게 돌아갈까?
지금은 도내 자치 수준으로 제한된 한족의 정치 참여는, 그 자치의 경험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정치의식의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결국, 그들은 몽골이나 고려의 기준에 맞춘 다이온인의 심사 철폐나, 연방의회로의 제한 없는 참여를 요구해 올 것이다.
그런 날이 와도 몽골인들의 정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족이 연방의회를 지배하는 날, 몽골의 정체성은 한족의 파도에 묻혀 사라지고 마는 게 아닐까.
-미리안의 정책만 믿고 있기엔 불안하다.
-우리만의 독자적인 민족 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제국입헌당의 이름 아래 종속된 지금 상태로는 곤란하다.
제국입헌당의 몽골계가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더라도, 전체 당의 대세에 따라 또 미리안을 태사로 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결론은 제국입헌당과 결별한다, 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볼로드의 탄압을 피해 고려 제국입헌당의 이름을 빌려 합작했을 뿐이니, 그 합작의 끝은 예정된 일이었다.
옛날 같으면 당 지도부의 의지에 따라 다시 ‘지하조직화’하는 것도 동지들은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지들은 이미 ‘여당’의 맛을 보고 말았다.
의회정치라는 수단이 있는데 혁명이라는 어려운 길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가? 이미 합법 정당인데? 이런 식의 사고가 동지들 사이를 파고든 지 오래다.
-몽골만의 독자적 정치세력보다는, 미리안의 눈에 들어서 후보로 나서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자들도 분명 있을 터.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당을 나누고, 제국입헌당과 선을 확실히 그어 우리만의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
몽골 지역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고려 지역에서는 제국입헌당의 승리를 방해해야 한다.
그러려면 고려 내에서 동맹을 찾아야 하고.
-안세규는 부적합하다.
그는 이미 풍군 작전 때부터, 대세는 거스르지 않는 길을 택해왔다.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간 몽골과 고려의 분리, 주권 존중을 이야기해왔지만 미리안과 정면에서 맞서려 들진 않겠지.
-류성일은 어떨까?
지난 3년, 제국최고회의 의장 자리를 지켜왔지만, 과연 그가 거기에 만족하고 있을까?
그 늙은이가 ‘더 늙기 전에 꼭 한번 태사 자리에 앉아봤으면……’하는 야심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검토해 볼 가치는 있다.
그렇게 몽골인의 새로운 정당을 향한 움직임은 활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미리안을 꺾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는 데는 따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질문 자체가 결론을 내포하고 있었으니까.
류성일은 갈림길에 섰다.
미리안이 던져 준 제국최고회의 의장 자리. 어쨌든 입법부의 수장으로 의전 서열도 상당히 높다. 황제 앞에서는 태사와 나란히 설 정도다.
그러나 여전히 권력은 미리안에게 집중되어 있다. 정부 수반의 힘이 강한 거야 모든 나라가 다 그런 셈이지만, 류성일에겐 그 사실이 마치 ‘거기 만족하고 감히 여길 넘보진 말아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도전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