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1)
리안은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몸을 한껏 웅크렸다.
그녀는 이 감각을 잘 안다.
고통이다.
육신의 아픔이 아니라, 마음이 얼어붙으면서 서서히 밀려오는 통증이다.
견하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견하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쫓아냈으니까.
정치감독청장 자리에서 해임당한 견하가 태사 관저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들어오길 바라는가?
정말 그렇다면 뻔뻔함의 극치라고, 자조한다.
들어오라고 명령할 수도 없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해석하든, ‘사적으로는 잘 지냅니다’ 식의 메시지를 대놓고 남겨선 안 된다.
위엄이 살지 않는다.
위엄, 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상황 통제에는 중요한 요소다.
공포, 인덕, 신뢰. 어디에서 비롯되었든 ‘위엄’이 있어야 명령이 원하는 곳까지 하달되고, 아랫사람들이 움직인다.
내쫓는 척만 했을 뿐 침실에서는 시시덕거리고 있다면, 누가 그런 자의 명령을 따르겠는가.
명령이 따라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인 귀찮은 무언가가 되어버리면, 상황은 리안이 원하는 대로 통제되지 않는다.
상황을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하는 것이 권력이라면, 상황이 통제되지 않음은 곧 권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지금 권력을 잃는다면 견하를 구할 수 없다.
견하를 억눌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견하를 살리는 일이 이런 일시적인 다툼이 아니라 영원한 결별이라면? 연인으로서 견하와 자신의 사이는 이미 끝난 거라면?
다시는 견하의 따스한 피부 위에 손가락 끝을 미끄러뜨리고, 그럴 때마다 웃음을 터트리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면? 그도 나도, 서로를 연인이라 부를 수 없게 된다면?
감수해야 하는가?
상상만으로도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고 뜯어내려는 것 같다. 그러나 그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은 기이할 정도로 명확하게 머릿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지금 뭘 하는 거지?”
갑작스럽게 밀려온 회의감.
지금 하는 모든 일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라는, 비이성적인 착각. 그냥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살면 되는데, 무엇 하러 연인과의 관계를 망치고 자신의 이상마저 내팽개치고 있는가.
애초에 꿈인지 환각인지도 모를 애매한 뭔가에 근거해 미쳐 날뛰고 있는 것뿐 아닌가?
차라리 완전히 이성을 잃어서 견하에게 뛰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하고, 상황을 이전으로 되돌리고, 마르코 폴로니 혁세주니 파멸인이니 하는 것들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채 살고 싶다.
그러나 머리는 그래선 안 된다고, 철저하게 최선을 찾아 나가는 사고로 명령을 내린다.
제발 ‘아니길 바라며’ 3년 동안 긁어모은 증거들은 자신이 정말로 마르코 폴로, 혹은 그가 남긴 의지와 접촉했음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었다.
애초에 게레센제가 죽기 직전 괴물로 변했던 것에 비하면 자신이 마르코 폴로를 만난 일은 조금도 신기하지 않잖은가.
사람들이 천재라고 칭송하는 자신의 판단력은, 이럴 때는 저주가 된다.
마음이 찢기는 고통은 비이성적 충동과 이성적 판단이 분열하는 데서 비롯됐다.
웅크려서, 언제 올지 모를 잠을 기다리는 수밖에.
욕지거리를 입 안에서 웅얼거리며 리안은 통증이 가라앉기를, 아니 아프다는 사실조차 잊고 의식이 끊어지기를 바랐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태사의 관저는 누가 문을 두드린다고 허락받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특히 이런 시간에는 더더욱.
전날 미리 전달된 공식적인 일정에 맞춰 리안이 누군가를 호출했을 때에야 감히 밖에서 태사의 허락을 구할 수 있다. 예외는 그 이름에 걸맞게 극히 드물다.
즉 지금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문 너머에 있을 사람은 리안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이다.
효윤은 전쟁성에서 장성의 숙소로 제공한 호텔로 들어갔고,
루우가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올 리는 없다.
그렇다면 견하…… 일까?
그가 돌아왔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그가 저 문 너머에 서 있을 가능성은 머릿속 한구석으로 치워버린다. 무슨 이야기를 하지? 그는 무슨 말을 할까?
아니 말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저 그의 몸을 부딪치듯 끌어안고, 그의 심장이 그녀로 인해 세게 뛰고 있음을 확인하자. 그거면 충분할 것이다.
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그녀보다 키가 큰 그의 얼굴을 보려고 들어 올린 시선 끝에…… 얼굴은 없었다.
그보다는 조금 낮은 곳에, 익숙한 머리카락이 보였다.
“루우…….”
자기도 모르게 황제나 폐하 대신, 그런 이름이 튀어나왔다.
루우는 빙긋 웃는다. 그녀는 원피스 잠옷을 걸치고 한 손에는 베개까지 들었다.
“이 나이에 혼자 잠들긴 무서워서…… 라고 하면 태사는 헛소리 말고 돌아가라고 할까?”
리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친구들’끼리 같이 잠든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루우와 단둘이 침상에 오르는 건 처음이다.
황제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예의를 따지기 전에 문전 박대할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리안이 루우를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당장은 누구라도 곁에 있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나는 벽 쪽에 누울 테니까, 폐하는 바깥쪽에 누워.”
“오, 침대 위에서 재워주는 건가.”
“그럼 바닥에서 재우겠어?”
리안은 성큼성큼 걸어가 벽을 보고 누웠다. 등 뒤에서 루우가 침대 위로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보다 나는 ‘황제’보다는 오랜만에 ‘루우’로 불러주는 게 좋은데. 봐, 그래서 ‘짐’이라는 1인칭도 안 쓰잖아?”
고개만 돌려서 루우 쪽을 흘끗 본다. 루우는 눕지 않고 침대에 다리를 올려 웅크려 앉은 자세로 리안을 보고 있었다.
발목만 장난스레 까딱인다.
평소에도 예쁘다고 생각은 해 왔지만, 이렇게 희미하게 드러나는 윤곽을 보고 있자니 참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예쁜 소녀는 어느새 미인이 되어 여기에 있다. 리안이 견하와 함께 한 7년의 세월은 루우도 함께한 7년의 세월이기에.
리안은 다시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위로하러 온 거야?”
“속이 말이 아닐 테니까.”
“……내버려 둬도 괜찮아.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가.”
“내가 위로받고 싶은 기분이기도 해서. 너를 위로하다 보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거든.”
말의 내용보다도 ‘너’라는 호칭이 리안의 마음을 건드렸다. 태사나 타이시라고 하지 않고 ‘너’라고…… 누구나 친구에게서 듣는 그 호칭이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리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리안은 아예 루우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제야 루우도 리안 옆에 누웠다. 베개를 리안 옆에 나란히 두고, 눈을 마주한다.
그렇게 한참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다, 리안이 먼저 물었다.
“잘한 걸까?”
평소 같았으면 루우는 ‘알 수 없는 일이지’라고 답했을 것이다. 결과는 나와봐야 안다고도 했겠지.
그러나 오늘 밤, 루우는 7년을 함께 한, 여전히 작은 체구의 소녀 같은 친구를, 그녀의 머리를 품에 끌어안았다.
소리 없는 울음이 가슴팍에 전해졌다.
루우는 그대로 리안의 머리칼을 쓸고 등을 다독였다.
“……울어. 마음껏.”
리안은 루우가 바라는 것을 가졌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 가진 것으로 인해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워하는 친구였다.
얼마나 등을 토닥였을까.
흐느끼던 숨소리가 점차 안정되자 루우는 리안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눈물범벅인 얼굴로, 새근거리며 잠들었다.
스물이 넘어서도 중학생 같더니, 여전히 소녀 같은 동안이다. 그런 얼굴로 울다 지쳐 잠든 걸 보니 가슴이 아렸다.
-이 얼굴은 주견하가 봐야 하는데.
이 얼굴을 보는 건 루우의 몫이 아니다.
견하 앞에서 이런 얼굴을 하는 것도 루우의 몫이 아니다.
그녀의 몫은……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뭔가 하는 것.
-그게 효과가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
“결국 그렇게 됐나.”
효윤은 견하의 해임 소식을 듣고 그렇게 중얼거렸을 뿐이다.
리안과 루우가 견하의 처우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이미 들은 이야기니 동요할 필요는 없었다.
견하를 찾아가려면 갈 수 있지만 그러진 않았다.
리안이 견하의 해임을 관철했다면, 중진인 자신이 견하와 만나는 건 좋지 않다. 이 상황이 견하의 계획 중 일부라면 자신이 찾아가봤자 방해만 하는 꼴이다.
그러나 그녀는 극북으로 돌아가지 않고, 황해 연안 요새화 현장도 둘러보지 않고 동명에 남았다.
-시키는 일만 해선 안 된다.
군인에게 명령은 절대적이라곤 하지만, 효윤은 군인이기 전에 리안의 최측근이었다. 혹은 친구, 혹은 가족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가족에 문제가 생겼다.
견하의 실각으로 인한 권력 공백. 정치의 격동.
정계나 민간의 문제는 루우와 리안이 어떻게든 풀어나가는 모양이다. 그것은 두 사람에게 맡겨두면 된다. 둘은 그 분야의 전문가고, 자신이 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의 격동이 군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에 대해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알아볼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에 나서기엔 조유관도 김천열도 배영훈도 강태훈도 적절치 않다.
이건 이른바 ‘신진’ 군인에 관한 문제니까.
‘신진’은 주견하를 따라 제국입헌당에 들어온 젊은 당원들, 그들 중에서 제국최고회의 의원이 된 자들만 일컫는 게 아니었다.
내전, 그 후 이어진 숙군 정책으로 장교의 수가 부족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병사들이 자기들 중 지휘관 소질이 있는 자를 선출하도록 했다.
이 ‘선출 장교’들은 일반적으로 전술적 능력 자체는 기존의 장교 이상이었다.
기존 장교들은 선출 장교들이 ‘병사들이 군 생활 편하게 하려고’ 인기 투표를 했다고 비난하지만, 이는 오만한 착각이다.
병사들은 고려 내전에서 몽골 내전, 한족 반란까지 겪는 동안 ‘누가 어떤 판단을 내려야 자신들을 살리는지’ 명확히 알게 되었다.
그들은 ‘희생 없는 전쟁은 없다’는 말이나 떠들며 ‘파상공세’만 되뇔 줄밖에 모르는 장교들을 불신했다. 이들은 병사들이 흘린 피만큼의 승리를 가져오지도 못한다.
이 장교들이 평소 살갑게 대해준다 해도 그 의식 속 병사와 장교 사이에 평민과 귀족의 벽만큼 넘을 수 없는 벽을 세워뒀다는 걸, 병사들은 다 알고 있다.
실제 전장에서 자신들을 살리는 건 막 사관학교를 졸업한 신임 장교가 아니라, 전술 행동이 제대로 머리에 박힌 고참병이라는 걸 병사들은 안다.
다만 이 선출 장교들의 ‘전략’적 역량은 재교육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사관학교로 보냈고, 그 재교육 과정의 결실이 마침내 상당한 규모의 장교진으로 보답받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엔 ‘미리안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양성한다’는 목적도 있었다. 내전 발발과 동시에 군 절반의 배신을 경험한 리안은, ‘리안의 은혜를 입은’ 장교진을 양성해야만 했다.
문제는 이 ‘신진’ 장교들에게서 보이는…… 심상치 않은 양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