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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76화 (476/541)

황국으로 가는 길(13)

“선배…….”

오랜만에 입에 담는 호칭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그의 귀에 닿지 않았는지, 아니면 들렸는데도 지금 그에겐 중요한 목소리가 아니었는지, 견하는 반응하지 않았다.

지나는 입술을 깨문다.

그녀도 7년을 함께 해왔다.

장난처럼, 놀리듯 호감을 표하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도 섞여 있었다.

지금도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미리안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또 그 마음의 방향을 억지로 틀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한숨처럼 들리게 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지나는 숨을 내뱉었다.

바로 그 순간 견하가 눈을 떴기에 지나는 꽤 놀랐다.

“……지금 상황은 선배 생각대로 돌아가는 중인가요? 아니면,”

견하가 대응할 엄두도 내지 못할 위기인가. 지나는 그렇게 묻는다.

“생각대로는 돌아가고 있어.”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였다.

“구종환이 나더러 ‘총애를 잃었다’고 말한 시점에 나를 대상으로 뭔가 안 좋게 돌아간다고 직감했지. 그래서 누군가에겐 본때를 보여줘야 했고, 또 누군가는 죽어야 했어.”

그래서 구종환을 납치했다. 육체적인 위해를 가하진 않았지만, 지금쯤 허옇게 질린 얼굴로 정보사가 체포한 견하의 부하들과 교환됐겠지.

“구종환한테는 ‘내가 착각한 건가?’ 하는 기분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거든. ‘주견하가 총애를 잃었다는 건 잘못된 정보인가, 섣부른 결론을 내린 건가’, 이렇게.”

“그래야 구종환이 풀려나도 정보사가 함부로 움직이지 않겠군요.”

“내가 해임되더라도 ‘태사 합하와 이미 이야기된 일’이라는 식의 의심을 사람들에게 심어줘야 하니까. 구종환이 남은 직원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고려국민당의 안세규 등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말이죠?”

지나의 총명함에 견하는 씩 웃었다. 과연, 감찰국장 자리를 물려준 자신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너무한 웃음이라고 지나는 생각했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견하는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합하께선 당장은 ‘내가 없는’ 상태를 바라시지, 정치감독청 자체가 형해화하는 걸 바라진 않으실 테니까. 나도 나름대로 ‘천손민족협회 출신’들을 지켜야 하고.”

그래서 견하는 정보사의 장교 하나를 죽였다.

“합하의 첫 구상은 아마 ‘천손민족협회 출신들’을 문제 삼아 나를 물러나게 하는 거였겠지. 하지만 나는 ‘해임이 이미 결정된 일’이라면 좀 더 빨라야 한다고 판단했어.”

“정보사 장교를 살해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는 거군요.”

지나는 새삼 지금의 자신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내전 전에는 분명 이런 건 조금도 흥미를 못 느끼는 어린 아가씨였을 텐데.

살인자라면 두려워하고 경멸했을 텐데.

그런데 지금 눈앞의 사내가 하는 말에 동조하고, 또 그 ‘살인’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는, 스물두 살의 자신이 있다.

7년 동안 자신은 썩어버린 걸까.

아니면 견하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단련된 걸까.

“그럼 이제 저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감찰국장은 천손민족협회 출신이 아니니까 자리를 유지할 거야. 누군가 정치감독청장으로 들어설 수도 있지만, 한동안은 태사부의 직접 관리를 받겠지. 동향만 보고해줘.”

“그럼 방첩국장도 친위국장도 별일은 없겠고…… 사상국장이 문제네요.”

“천손민족협회 출신 직원들이 체포당하는 일은 없겠지만 사직서는 내야 할 거야. 그 녀석들이 엉뚱한 생각 못 하게 이쪽으로 좀 모아줘. 우리 예산 중에 그 애들 생계유지 비용으로 얼마나 돌릴 수 있는지도 살펴봐 주고.”

괜히 절망해서 정말로 ‘반역’의 길로 빠져버리면 곤란하다. 반역이 아니더라도 동네 건달로 전락해버리기라도 하면 견하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복귀할 생각이시군요.”

자기 조직 사람들을 이렇게 챙긴다는 건, 그 인적 자원을 계속 유지할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견하는 곧 정계로 귀환하리라고 내다보는 게 아닐까.

“당장은 어렵겠지만 방법을 찾아봐야지. 우리 쪽 의원들하고도 이야기를 해봐야 하고.”

거기까지 말하고 나자, 기운을 되찾는 듯했던 견하의 얼굴에 다시금 피로와 침울함이 돌아왔다.

왜일까.

견하는 이마를 짚으며 돌이켜본다.

리안에게서 해임 통보를 받고 나서도 정계를 향한 견하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당연히 루우가 제국최고회의에 나가 한 연설의 내용도 안다.

자신의 공백에 괜한 무리가 날뛸 틈도 주지 않고, 리안과 루우는 ‘다이온 통합’을 밀어붙일 심산이다.

옛 키타이와 낭키아스 지역에서의 개혁은 잠깐 주춤하겠지만, ‘통합’이 완료되는 대로 다시 힘을 얻을 테니 걱정할 일은 아니다.

지나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걸로 리안의 권력이 좀 더 완전해진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지난 3년간 견하의 권력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비대해졌다.

극소수의 의견이지만 ‘차기 태사’ 운운하는 인간도 있을 정도니까.

물론 견하도 ‘내무성 장관’ 정도는 넘보고 있었지만, 태사 자리는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건 리안의 것이다, 라고 머릿속에 고정됐으니까.

그러니 한 번 정도는 그렇게 위세가 높아진 정치감독청장도, 총애를 한 몸에 받던 권신도 태사의 명령에 변명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권력의 공백. 리안은 당장 그 과제와 마주한다.

어설프게 처리할 수는 없을 테니, 리안은 정책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다.

견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서 권력을 넘보는 무리를 정면에서 꿰뚫으려면, 이제껏 없던 권위와 권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체제는 개편되고, 미지근한 개혁은 열기를 더하게 될 것이다.

동군연합을 이루는 두 나라의 일원화가 추진된다면, 칸발리크의 시반 타이시 정권이 대항할 방법은 없다. 시반이든 데렘칭이든 차파르든 리안에겐 상대도 되지 않는다.

지난 3년간 상당히 귀찮게 굴었지만, 견하가 ‘해임’의 형태로 모습을 감추고 리안이 직접 움직이는 것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견하나 되니까 ‘어울려 준’ 것이지, 리안은 격이 다르다.

그런데,

대체 뭘까. 목구멍에 생선 가시가 걸린 듯한 이 감각은.

그간 자신의 행동 원리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리안의 권력이 강화되는 길이니까 실각이 문제 될 일은 아니다.

오히려 견하 한 사람의 실각으로 대가를 치른다면 값싸다고도 할 수 있다.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희생이다

-나는 대체 뭘 아까워하는 거지.

권력?

-내가 7년간 확보한 그 알량한 조직과 권력을?

견하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이런 말을 들려줬다.

나는 리안의 권력 확대를 바란다. 다시 얻은 가족의 안전은 그로부터 확보될 것이다.

자신의 권력조차도 그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게 진심이라면, 계속 되뇔 필요가 있을까?

어딘가에서 ‘그와는 반대되는 생각’이 올라오려는 걸, 무의식중에 막아내고 있던 건 아닐까?

-잘난 듯 떠들어댔으면서, 정작 두 권력이 충돌하는 순간에는 망설이는 거냐, 주견하!

권력을 못 내놓겠다고? 못 내놓으면 어쩔 텐가?

반항할 텐가? 리안에게?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는가?

리안과 대립하겠는가?

-리안의 정적이 되고야 말겠는가?

덜컥 겁이 나 견하는 몸을 일으켰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해선 안 된다. 다른 걸 생각하자. 지나는…… 감찰국장은 어디 있지?

그러고 보니 아까 나간 것 같았다. 인사를 받아준 기억이 어렴풋하게만 남을 정도로 사색에 잠겨 있었나…….

침실로 들어가 누웠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견하는 계속, 잠들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

안가를 찾아온 재연은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었다.

상관의 기분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그는 딱히 탓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은 상관과 부하 관계가 아니기도 하고.

“해임됐어. 사상국장에서도, AN연구소 소장 자리에서도.”

“연구원과 자료들만 유지하면 돼.”

“그건 걱정하지 마. 황제께서 직접 지원하는 기관이고, 당장 이번 연설에 관련 자료를 제공한 곳도 알타이 민족 문제 연구소니까.”

학자의 양심은 알 바 아니었다. 거짓 역사라 해도 유용성만 입증한다면 얼마든지 써먹을 것이다. 견하도 재연도 그 점은 이미 오래전에 합의했기에, 연설 내용에 대한 평은 따로 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단계를 논의했다.

“‘고려’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 중이야.”

“설명해봐.”

“그간 편의상 ‘고구려’라고 통칭한 왕조를 둘로 나눠서, 광개토왕 시대부터는 ‘태왕 고려’라고 명칭을 고치기로 했어. 일단은 교과서부터.”

“광개토왕을 중시조로 한다는 의미군.”

“우리나라 국호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되새겨 볼 수도 있고 말이야.”

고구려가 광개토왕, 혹은 장수왕 시기 국호를 ‘고려’로 변경한 것은 역사 공부를 조금이라도 한 사람에겐 익숙한 사실이다.

태조 왕건은 고구려라는 국호를 변경해 고려를 국호로 삼은 게 아니라,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써 온 ‘고려’ 국호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뿐이다.

그러나 고려의 역사가들은 편의상 두 왕조를 구분해 전자를 ‘고구려’라고만 기록했고, 고려라는 이름은 지금의 이 나라를 지칭할 때만 사용했다.

그 습관이 현대까지 이어졌는데, AN연구소는 이번에 그걸 고치겠다는 것이다.

“발해도 마찬가지야. 대진이나 발해라는 국호를 쓰기도 했지만 ‘고려’라는 국호를 쓴 사실만 강조하기로 결정했어.”

“그럼 ‘북고려’ 같은 명칭으로 변경하는 건가?”

“맞아. ‘북조 고려’로도 부르고. 그래서 우리 태조가 통일하기 전까지는 ‘남고려’, ‘남조 고려’, ‘남북조’ 같은 용어도 쓰기로 했지.”

“그런 고려의 연속성 끝에는 마침내 우리 황제 폐하께서 계신다, 는 거군.”

“이게 균형이 중요한데, ‘통합 사업’을 방해하지 않으려면 고려의 고유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선 안 돼. 지금 이야기한 것들이,”

“폐하의 연설에도 언급된, 몽골 ‘게세르 칸’ 전승에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말이군.”

“막바지 작업이 한창이지.”

통합이 이루어지고 나면 몽골의 교과서도 그렇게 바뀔 것이다.

이제 문제는…….

“같이 해임된 애들은 원동인 주도로 모아두긴 했는데, 어쩔 거야?”

“‘통합’에 누가 반발할 거라고 생각해?”

“뭐, 일단은 안세규지.”

제국의 확장이 공화와 민주를 해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 아니, 그 믿음이 잘못된 건 아니다. 어느 정도는 그러니까.

“우리가 물러나는 바람에 괜히 침 질질 흘리는 노인네들도 그렇고.”

원로들. 제국최고회의 의장 자리를 내준 류성일은 조용한 편이지만 이면에서 뭘 꾸미는지는 알 수 없다.

“친위국이 건드려 놓은 키타이와 낭키아스 내에서도 반발 세력이 있지 않을까? 통합이 완료되고 나면 ‘탄압’이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못하진 않을 거라면서 말이야.”

일부 한족 기득권자에게 개혁은 탄압으로 여겨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통합으로 자리를 잃게 될 시반 정권도 빼놓을 수 없고.”

여기까지 듣고서, 견하는 끄덕였다. 재연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어느 쪽이 움직이든, 아니 하나만 움직이진 않겠지. 이들 사이에서 합종연횡이 펼쳐질 거야. 우리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을 거고. 반발이 어느 정도 수위를 넘어서면…… 친위국은 그 이름에 어울리는 행동에 나선다.”

싱글거리던 재연의 얼굴이 굳었다.

친위국의 이름에 어울리는 행동.

7년 전, 그때, 미리안 태사는 자기 행동을 뭐라고 칭했더라?

“친위혁명의 가능성을 배제하진 말자고. 만일에 대비만 해두는 거야. 일어나지 않길 바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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