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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75화 (475/541)

황국으로 가는 길(12)

견하는 손목시계를 흘끔 확인하곤 대답했다.

“지금쯤이면 우리 쪽 애들과 교환하고 있겠죠.”

“포로 교환이라도 하는 거야?”

“전쟁을 걸어왔으니 응할 수밖에요.”

“그렇다고 정보사령관을 개처럼 끌고 가!”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두 사람 사이에 거의 오간 일 없는 노성이, 리안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직후 태사의 집무실 공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리안도, 견하도 입을 열지 않는다.

견하의 침묵은 무언의 항의다.

여기서 말로 직접 항의하고 싶진 않았다.

그랬다간 구종환이 끌려가기 직전에 했던 말, 마치 견하가 이미 ‘리안의 총애를 잃었다’는 양 지껄인 말의 진실을 물어야 하니까.

리안이 견하를 상대로 뭔가 했다면 굳이 진실을 들추기보단 모르는 척 넘어가고 싶었다.

리안은 리안대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 상황은 그녀가 의도한 바이기는 했다.

다만 견하가 장교 한 명을 살해할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뿐.

견하는 이성을 잃은 걸까?

아니면 그 살인 행각마저도 어떤 의도가 있는 걸까.

혹은 리안의 의도를 눈치채고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일까?

어느 쪽이 되었든…… 리안은 결심을 행동으로 옮겨야만 했다.

“덮고 넘어갈 순 없어.”

견하도 끝까지 질문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구종환의 행각은 누나의 명령이었나요?”

“정부 내 천손민족협회 관련자들의 조사를 명한 건 사실이야.”

자기가 뱉은 말이었지만 궁색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리안은 좀 더 나은 대답은 없었을까 곧바로 후회했다.

구실은 그랬지만, 결국 그 배후의 견하를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다는 명확한 의도가 있었으니까.

“그럼 제 행동은 항명이 되겠네요.”

“항명 수준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지. 사람을, 그것도 제국 군인이 죽었어. 사고도 아니고 네 입에서 나온 명령 때문에. 너는 구종환을 반역자라고 했지만, 네가 한 행동이야말로……”

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반역에 해당해.”

견하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루우가 말한 대로 정말, 견하에게선 감정이 사라져 가는 걸까? 3년 동안 그 증세가 더욱 심해진 걸까?

둥지 속 작은 새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그의 품, 그 품 안에서 느끼는 그의 따스한 어깨와 가슴팍 너머에는 감정 따위 이미 남아있지 않은 걸까.

문득, 그의 왼쪽 어깨를 쓰다듬을 때마다 느껴지던 이질감을 떠올린다.

리안도 얼굴에서 고통과 번민을 감췄다.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도록 해.”

리안의 턱짓에 견하는 경례 한 번 올리고 집무실에서 나갔다.

항의도, 질문도 없었다. 자신이 물러난 뒤에 정치감독청이 어떻게 될지, 천손민족협회 출신들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문이 부드럽게 닫히는 소리만이 태사 집무실의 고요를 깼다. 리안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견하와는 관저에서 부부처럼 함께 산 지도 몇 년이나 됐다.

그는 오늘 어디로 갈까? 퇴근한 리안과 불편한 얼굴을 마주하진 않을 것 같았다.

정치감독청사의 자기 집무실로 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철저한 남자니까. 아마 ‘별장’ 중 하나로 내려가지 않을까 싶었다.

리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견하의 마음에 어떤 좌절의 폭풍이 부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괴롭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황제를 만나고, 정치감독청을 직접 장악한다…….”

되뇌면서, 주먹을 부르쥐었다.

하고 싶지 않았던 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도 자기 손으로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그게 하필이면 오늘이었을 뿐이다.

***

동명의 정국은 웬만큼 노련한 정객이라도 혼란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루나 이틀도 아니고 수 시간 만에 격렬하게 요동칠 정도였기에, 사람들은 행동에 나서기보다는 집 안에 틀어박혀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주견하가 정치감독청장에서 해임됐다!

이 소식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미리안을 중심으로 한 권력 중추부, 이른바 ‘신진’이라 불리는 세력의 내분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주견하의 빈자리를 노리는 움직임, 동시에 태사 미리안의 독주를 멈추고 ‘원로’들이 권력을 재분배하려는 움직임이 즉각 일어났지만, 곧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직접 제국최고회의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최고회의를 소집하셨다?

뭔가 해보기도 전에 전해진 소식에, 한창 주견하가 제안한 법안을 폐기할 준비 중이었던 의원들도 관망하는 자세로 돌아섰다.

루우가 대회의장 안으로 들어서자 모든 의원이 숨을 삼켰다. 한때는 그녀를 경호원으로 부렸던 세규조차도.

이제껏 없던 화려함이 황제의 걸음을 따라, 회의장의 높은 천장까지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곤복도 아니고, 몽골에서 입는 예복도 아니었다.

온통 금빛.

금빛만이 가득한 화려한 옷차림을, 루우는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의원들이 황제께 예를 표하고 황제가 개회를 선언하는 절차가 지나가고 난 후, 단상에 선 루우의 말이 이어졌다.

“짐은 고려와 몽골이 일가(一家)로 거듭나지 못함을 한탄하노라.”

안세규처럼 예민한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황제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황제이자 카간인 짐의 의무는 나라의 중심을 굳게 지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지난 3년간 짐은 마치 두 집을 따로 둔 가장인 양 두 나라의 수도를 오가며 지냈노라. 이는 짐의 신민이 서로 낯을 가리게 하고, 진심으로 하나 됨을 가로막았다. 또한 국체를 혼란스럽게 하고 번잡한 예식으로 비용의 낭비가 극심하니 그 또한 군주로서 취할 바가 아니었다.”

세규는 의자 팔걸이를 부술 듯 움켜잡았다.

-미리안……!

미리안과 안세규 사이, 아무리 권력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가 되더라도 최후까지 지켜야 할 합의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그 길로 들어서는가!

안세규가 이를 갈건 말건, 루우의 옥음은 계속 흘러나왔다. 누가 감히 옥음을 그치게 할 수 있으랴.

“짐의 몸에는 고려 태조 신성황제의 피뿐만 아니라, 몽골 태조 성무황제 칭기스 카간의 피 또한 흐른다. 짐이 이 몸으로 직접 나타내듯이 두 황실이 한 가족이 된 지 어느덧 500년이 넘었노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나라 신민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듯하다.”

세규는 이어질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루우의 입에서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왔다면, 황제와 태사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고 어떤 결론이 내려졌는지는 뻔했다.

지금도 밖에선 카라코룸 천도와 황제의 친정(親政)을 바라는 시위가 한창이다. 민심까지 등에 업은 이 흐름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일원화한 국가에서 황제의 권위는 권력을 넘볼 테고, 그 권력은 그대로 태사의 독재를 지원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저 민심조차 황제와 태사의 합작품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세규의 가슴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독재자라 해도 민중의 총의를 뛰어넘을 수는 없으니까.

언젠가 리안은 자신에게 물었다.

민중이 민주주의의 자살을 결의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그때 자신은 무어라 대답했더라?

“두 나라 민족은 본래부터 남이었던 것은 아니다. 두 황실이 성립하기 전, 수천 년 전부터 두 민족은 본래 하나의 뿌리에서 돋아난 두 줄기였노라.”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먼 옛날 고구려 이전 조선을 건국한 선인(仙人) 왕검의 전승과 몽골의 게세르칸 전승은 놀랍도록 닮았다. 이를 통해 왕검과 게세르칸의 전승이 두 나라에서 전해 내려오는 동안 이름만 달라졌을 뿐 본래 같은 일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노라. 마땅히 두 나라와 두 민족은 황실만 하나로 합칠 것이 아니라 국체도 합쳐야 할 것이다.”

세규는 자신의 발밑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더 거대한 계획이 꿈틀대고 있음을 느꼈다.

정치, 권력, 그런 것들만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건국 신화, 역사 연구도 저런 거짓말까지 날조할 정도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증거도 없고 증명도 불가능한, 비슷하다는 이유로 끼워 맞춘 가짜 역사.

저 이야기는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을까.

-알타이 민족 문제 연구소…….

주견하의 측근인 한재연이 소장으로 있다고 들었다. 한재연은 정치감독청에서 사상국 국장도 겸하는 자인데, 내전 전에는 천손민족협회에도 발을 담갔었다고 한다.

-꽤 촉망받는 젊은이였다지.

그런 인간이 황제의 사상적 기반을 닦았다? 일이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걸까.

미리안이 주견하를 해임했다는 소식은 그저 하나의 연극에 지나지 않는 걸까?

주견하의 측근들은 그대로 정치감독청에 남아 황제를 중심으로 한 독재 체제를 떠받든다면…… 아니, 황제와 미리안이 그저 모습만 조금 다른 허동주에 지나지 않는다면?

리안은 허동주와 똑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그걸 자신의 ‘적절한 선’에서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오만한 착각에 빠지고 만 것일까?

“……따라서 첫 단계로 먼저 두 어좌를 하나로 합치고, 두 번째 단계로 국체를 하나로 합쳐, 마지막 세 번째 단계인 민족의 결합, 고려 민족이니 몽골 민족이니 하는 구분을 뛰어넘는 알타이 민족으로 거듭나야만 할 것이다.”

알타이 민족. 대체 얼마 만에 들어보는 말인가.

천손민족협회도 반역으로 몰아 주살하고, 알타이 자유 공화국도 역적으로 규정해 분쇄했으면서, 그들이 내세우던 사상이 필요하니 거리낌 없이 써먹고 있다.

“이는 짐의 사사로운 바람이 아니라 다이온 억조창생의 바람이며, 바람이어야만 한다. 제국최고회의는 속히 관련 논의를 시작하여 주기를 바라노라.”

연설을 마치고 퇴장하는 황제의 모습을 보며, 세규는 그녀가 더는 어리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다.

촉각을 곤두세워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내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막아야 한다.

주견하, 혹은 그 주변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 아마도 천손민족협회에 의해, 리안의 정책은 좌절과 폭주의 이중주를 연주하고야 말 것이다.

그때 고려가 받을 청구서에는 얼마나 큰 대가가 적혀 있을까.

미리안은 물러나야만 한다.

.다음 총선거는 고려국민당이 이겨야만 한다.

세규의 머릿속은 미승휴 정권에 탄압당하던 시절 이상으로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리안의 예상대로 견하는 태사의 관저로 돌아가지 않았다. 자신의 집무실에도 들르지 않고 그대로 ‘별장’으로 향했다.

별장으로 향하다 문득 생각난 듯이 기사에게 차를 돌리라고 했다.

그가 향한 곳은 정치감독청 방첩국이 관리하는 안가였다. 이곳이라면 리안의 눈에도, 정보사령부의 눈에도 띄지 않을 것이다.

머리를 식히고 다음 일을 생각하기엔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견하는 안가의 서재로 들어서자마자 제복 외투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버리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지나는 견하의 외투를 들어 적당히 정리하고는,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상관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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