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국으로 가는 길(11)
“주견하라는 행정부 관리가 입법부를 능멸했다, 그 부분에 대해 태사부에 항의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저 또한 옳은 말이다. 미리안은 형식적인 사과로 어물쩍 넘어갈 수도 있고, 사안의 중대함을 강조하며 묵살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제국최고회의가 더 뭔가를 할 방도가 없다.
태사에게 정치감독청장의 해임을 요구할 것인가? 청장 탄핵을 추진할 것인가? 탄핵이 된다 해도 태사가 아니라 그 위, 황제께서 거부권을 발동하면 뭘 어떻게 할 텐가? 왕서라와 주견하가 고교 시절부터 친한 사이임은 온 나라가 다 아는 일인데?
“형식적인 절차에 그친다고 해도 항의하지 않을 수는 없잖소. 그런 형식과 체면마저 지키지 못한다면 당과 최고회의가 존재할 이유 자체가 없소이다.”
“하지만,”
마침내 세규는 침묵을 깼다. 당 지도부 모두가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주견하 청장의 배후에 미리안 태사가 있다면, 의도된 행동일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 반반이다.
주견하의 독단일 가능성이 반이라면, 미리안이 배후 조종 중일 가능성 역시 반.
그리고 미리안의 의도대로 주견하가 행동하고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다. 아무 대책도 없이 주견하를 방목해 놓고 있진 않겠지.
“주견하 청장이 지적한 문제, 그리고 발의한 법안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니, 저들은 명분을 쥐고 있습니다. 그 명분으로 민심까지도 얻을 겁니다.”
고려 및 몽골 자본의 한족 농업 투자.
이들은 내버려 두면 높은 수익을 거두려고 한족 소작농을 쥐어짤 것이다. 각종 세금의 실질적 부담을 소작농에게 떠넘기고, 그 결과 ‘값싼’ 농작물을 생산해내겠지.
그렇게 되면 한족 농민의 생활만 망가지는 게 아니다.
그 값싼 농작물이 결국 어디로 가겠는가?
“외국으로 수출될 수도 있겠지만, 아마 상당한 양이 본국으로 수입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가격 경쟁을 해야 하는 본국 농민들이 피해를 보겠군요.”
“고려보다 기반이 훨씬 빈약한 몽골의 농민들은 말할 것도 없죠.”
기후라는 악조건도 그렇지만, 몽골의 농업 전통이라고 할만한 것은 중세 다이온 이후에나 시작된 것이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중세 다이온은 한족 농민을 북방으로 이주시켜 어떻게든 몽골 본토에서 식량 공급처를 확보하려 했고, 당연히 그 시행착오 중에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그보다 이전 시대인 흉노니 돌궐이니 하는 집단 역시, 한족 노예를 동원한 농업을 ‘시도해봤을’ 뿐이다.
“농민의 빈민화, 빈민의 도시 유입, 이 과정을 막기 위해 미리안 행정부가 지난 세월 분투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시레문 치세 이래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증가한 카라코룸의 ‘조드 빈민’ 문제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견하 문제를 섣불리 항의했다간, 태사 쪽에선 우리를 ‘국내 농민은 신경도 안 쓰는’ 집단으로 몰고 갈 수도 있습니다.”
“즉, 이번 일이 태사가 파 둔 함정이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가능성을 무시할 순 없죠.”
말 그대로 가능성이지만, 가능성이기에 더욱 그렇다.
“의사당에서 주견하의 호통을 들은 제국입헌당 의원도 그 ‘연극’의 참여자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의원은 ‘원로’에 속하는 반면, 주견하는 이른바 ‘신진’의 거두다.
1933년 총선거에서 제국최고회의에 진출한 신진 의원은 소수였지만 어쨌든 모두 살아남았고, 신진 당원들은 무시할 수 없는 숫자로 불어났다.
그리고 내년, 1937년 총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이 선거에서 제국입헌당은 물론 29년, 33년에 이은 세 번째 승리를 목표로 할 것이다.
하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좀 더 복잡하다. 주견하 개인, 혹은 주견하 배후의 미리안은 원로파가 아니라 ‘신진’이 제국최고회의에 대거 진출하길 바라리라.
당연히 그 목표를 달성하려면 원로들은 어떻게든 당의 중심부에서 밀려나야 한다.
“원로파가 어떻게 되는지는 오늘 있었던 반론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우리는 그 상황을 보면서, 1937년을 대비해야겠죠.”
1937년 총선거의 승리를 노리는 건 제국입헌당뿐만이 아니다.
고려국민당은 이번 총선거만큼은 의석을 지킨다는 수세적 입장이 아니라, 반드시 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태사를 선출한다는 공세적 입장을 취했다.
당연히, 고려국민당은 안세규를 태사로 추대할 생각이고.
다가올 총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3년을 견뎠다. 첫 총선거가 있었던 때부터 따지면 7년이나 되는 긴 시간이다.
미리안이 다이온 연방, 동군연합의 성립이라는 업적을 세우며 승승장구하는 그 기세를 피하려고 버틴 3년.
기다림은 충분하지 않은가?
이제는 승리를 거둘 때다.
“그러니 괜한 말썽에 휘말리지 맙시다. 우리는 다이온의 안정기라는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정당…… 그런 모습을 대중에 각인시켜야만 합니다. 그것만이 정권교체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치면서도, 세규는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리라 직감했다.
다이온 농민의 생활 안정이라는 명분 말고도, 또 다른 명분을 저들은 쥐고 있으니까.
-군수산업.
특히 최근 3년 간은 해군 쪽의 투자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전함, 순양함은 물론이거니와 항공모함까지 건조 중이다.
어떤 나라와의 전쟁을 상정한 해군 증강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멕시카 자주국.
태평양을 건너올 그들을 막아낼 때는, 상륙을 허용하는 것보다는 바다에서 어떻게든 차단하는 것이 희생을 최소화할 유일한 방안이다.
그런 의미에서 충분한 해군을 갖추지 못한 나라는 비참하다. 전장을 뜻대로 결정할 수 없고, 적이 결정하는 대로 자국의 영토에서 자국민을 희생시키며 싸워야 하니까.
즉 ‘비참한 지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많은 자본 투자가 필요한데, 그걸 본국도 아닌 다른 지역의 농업 투자로 돌린다? 정권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입장에서 봐도 반역임에 틀림없다.
미리안은 ‘국가적 위기’라는 명분으로, 이런 상황에서 굳이 정권을 교체해야 하는가? 지금껏 위기를 돌파해 온 자의 지도력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라는 식으로 연임을 시도할 것이다.
그걸 막아내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1937년에도 미리안이 총선거에서 승리한다면, 그녀의 나이는 28세. 더는 어리다고 할 수 없는 나이가 된다. 4년이 지나면 32세. 집권 기간은 12년이 넘어간다.
이쯤 되면 그녀를 이길 방법은 사실상 사라진다.
그러니 다가올 총선거가 마지막 기회다.
세규의 그런 초조감과는 별개로, 주견하를 뒤흔들 움직임은 미리안 정부 내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
요즘, 격노할 일이 많아졌다고 견하는 느꼈다.
“정보사에서 왜? 이유는?”
“천손민족협회 잔당과의 내통 혐의인데요…….”
감찰국장 유지나가 말꼬리를 흐리는 건 견하의 눈치를 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거침없이 제국정보사령부의 입구를 통과한 견하의 표정은…… 당장 두 집단의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으니까.
“끌려간 애들은 천손민족협회 소년부에 속했었나?”
“……네.”
출신이야 부적절할지 모르지만, 견하의 밑에서 6, 7년을 일한 부하들이다. 그런 부하들을 잡아가 놓고 통보도 하지 않았다.
체포를 면한 다른 부하들의 보고를 받고 항의하니 그제야 이유를 통보했다.
“구종환 이 작자가 드디어 미쳤군.”
중장 계급장이 견하의 걸음을 따라 번뜩인다. 마주친 영관급 이하 군인들은 경례를 올리다가 견하의 얼굴을 보고는 복도 벽에 바싹 붙어섰다.
심상치 않은 공기를 그들도 느꼈는지, 견하가 지나가자 바쁘게 어디론가 뛰어간다.
견하는 검을 소환했다.
제국정보사령관 구종환의 집무실 문을 그대로 으깨버린다. 문틀이 달린 벽 일부마저 무너질 정도였다.
“……없군.”
서류를 잔뜩 들고 근처에 서 있던 대령에게 검을 겨눈다.
“이 쥐새끼 어디 갔어.”
“사, 사령관께선 회의실에……”
“안내해.”
등을 찌를 듯이 들이대는 칼날을 피해 대령은 견하 앞을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회의실에 견하가 얼굴을 드러내자 사소한 웅성거림조차 사라졌다.
“이 새끼들 봐라? 내가 왜 왔는지 알고는 있나 보네?”
견하는 비웃으며 구종환 중장이 앉은 자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구종환 중장이 일어난다.
“주견하 ‘중장’ 아닌가. 식사는-”
청장이라는 직책이 아니라 군 계급을 불러 동급 사이에 지켜야 할 예의를 말하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견하는 그대로 발을 들어 구종환의 배를 밀어쳤다.
꼴사납게 나가떨어진 구종환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그 부하들은 눈에도 안 들어온다는 듯, 견하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물었다.
“우리 애들 어딨어.”
“……이 미친 새끼가…….”
“미친 새끼는 너야. 너 야별초 어떻게 됐는지 못 들었어? 우리 애들 머리카락 하나라도 떨어뜨리면 네 손발톱 스무 개는 무사할 것 같아?”
비척비척 일어나는 구종환의 얼굴에는, 자기보다 훨씬 어린놈에게 맞았다는 굴욕감과 동시에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아직도 지가 태사 각하의 총애를 받는 줄 아네.”
구종환은 그 말로 견하를 동요시켜 볼 심산이었는지 모르지만, 견하는 들어야 할 대답이 안 돌아오면 다음 행동에 자동으로 착수하는 기계였다.
여기서 구종환이 말했어야 할 정답은 죄송합니다, 였다.
견하는 유지나를 보며 턱짓했다.
유지나가 권총을 꺼내 구종환의 머리를 겨냥했고, 견하를 따라온 부하들도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일반인은 총기를, 이단은 각자의 무기를.
당연히 회의실에 무장한 채 들어왔을 리가 없는 정보사 군인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너 이거 반역이야 이 새끼야.”
“누가 반역자인지는 내가 정한다고, 방송 못 들었어?”
견하는 피식 웃고는 구종환의 머리카락을 그대로 틀어잡고 몇 번 흔들었다. 청년이 중년을 능멸하는 그 광경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참 안타깝게 여길만한 모습이었다.
“오늘 정보사 문 닫는다. 항의하면,”
회의실에 엉거주춤 선 정보사 장교들을 죽 둘러보다 딱 한 마디 내뱉었다.
“죽여.”
견하는 구종환의 머리털을 붙잡고 회의실 입구를 향해 걸었다. 구종환의 발버둥이 견하의 걸음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
자기네 수장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납치되는 모습을 보면서 항의한 군인이 하나 있었다. 하나뿐인 이유는 그가 곧 정보사령부 복도의 피 얼룩이 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또 다른 피 얼룩이 되기를 바라진 않았다.
***
정치감독청장 주견하 중장이 제국정보사령부에 쳐들어가 장교 하나를 죽이고 제국정보사령관 구종환 중장을 납치했다는 소식에 동명시는 발칵 뒤집혔다.
누가 봐도 미친 자의 소행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떤 이는 주견하의 지난 행보를 봤을 때 치밀하게 계산된 일이라 주장했다.
또 어떤 이는 주견하의 오만함이 마침내 태사부의 눈치도 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둘 중 어느 쪽이 옳은지는 태사 미리안 본인도 알지 못했다.
그녀의 눈앞에 불려 나온 정치감독청장은 뻔뻔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까.
“좋아, 왜 그랬는지는 그렇다 치고. 구종환 중장은 어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