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국으로 가는 길(9)
루우의 물음에 리안은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멍한 얼굴로 마주 바라보기만 했다.
루우는 원래 엉뚱한 이야기를 잘한다.
전에도 자신이 먼저 죽으면 황제 체제를 폐지하고 통령이 되라고 하질 않나.
될 대로 되라 싶어서 내뱉는 소리인지, 아니면 뭔가 생각한 바가 있어서 하는 소리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리안의 생각을 떠보려는 속내인지.
7년을 알았지만, 여전히 루우의 마음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엉뚱한 이야기…… 라고 입을 열려다, 리안은 루우의 표정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평소에는 그리 감정을 드러내는 얼굴은 아닌데, 오늘은 유독, 어딘가 슬픔에 잠겼다.
“통합 정부의 태사라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진 않잖아.”
정부를 통합한다는 것은 그 정부의 소재지가 될 연방 수도를 정한다는 말.
즉 견하가 주장하는 카라코룸으로의 천도에 대한 지지다.
그리고 그건…… 그간 리안이 세워 왔던 고려 제3 제국의 많은 원칙을 폐기하는 걸 의미한다.
또,
그때 마르코 폴로가 보여주었던 환상에…… 한 걸음 가까워지는 걸 의미하고.
“황제로서 근심하지 않을 수 없거든. 우리 모두가 7년 동안 그 고생을 했는데 외부의 침략자에게 무기력하게 넘겨줄 수는 없잖아?”
“그래서 카라코룸으로 가고, 연방제를 폐지하고 단일 국가로 가면, 견하는? 죽으라고?”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격해졌다.
분명 얼마 전에 그 환상이 그저 착란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건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불안감에 벌벌 떨고 있었을 뿐인가.
루우는 그런 리안의 모습에도 놀라지 않고, 여전히 슬픔을 담은 눈으로 바라봤다.
“혁세주, 파멸인, 이단…… 이런 것들과 관련된 꿈과 환상, 그저 허무맹랑한 것으로 여기고 넘어갈 수는 없어.”
리안은 대답하지 못하고 루우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때 태사가 본 환상대로라면, 우리는 그 환상에서 일어난 일들을 최대한 피하는 게 맞아.”
카라코룸에 리안과 견하가 함께 있어서는 안 된다.
카라코룸에 천손민족협회 출신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 와서는 안 된다.
전향했다지만…… 천손민족협회 출신들이 활개 치는 조직이 바로 견하의 정치감독청 아니던가.
“견하의 죽음을 피하려면, 혹은 피할 가능성을 높이려면 견하를 카라코룸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해. 정치감독청의 힘도 빼놓아야 하고.”
견하의 죽음을 피하고 싶은 만큼, 전쟁도 피하고 싶다.
전쟁 발발은 도저히 막을 수 없다면 피해만큼은 최소화하고 싶다.
“그러려면 태사가 제국의 중심을 잡아야 해. 단 하나의 중심, 단 하나의 태사가.”
“나도 알아!”
원래는 그냥 가볍게, 두 친구가 주전부리 좀 주워 먹고 술도 좀 먹는, 기분 전환을 위한 자리였다.
그래서 요리사도 부르지 않고 리안이 직접 요리 중이었는데…….
저렇게 좌절한 리안의 얼굴을, 루우는 처음 보았다.
소리는 질렀지만, 두 팔을, 두 손을 늘어뜨리고 그냥 우두커니 서서, 구부정한 등으로 바닥에 시선을 내리깐 태사의 모습은,
무척 초라했다.
견하도 저런 얼굴을 한 리안을 알고 있을까.
연인과 국가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아가 찢어지는 고통에 웅크려 앉은 리안을 알고 있을까.
루우도 이제는, 그 고통이 무엇인지 안다. 왜냐하면 황제도 견하를…… 아니, 이 생각은 하지 말자.
어쨌든 루우는 리안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숨소리가 고르게 변한 걸 듣고 나서야 루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태사도 그러려고 견하를 응천으로 보냈잖아.”
“……권력마저 빼앗으면 견하를 살릴 수 있다?”
“그 미래 환상이 정확히 어떤 조건에서 이루어지는지는 알 수 없어. 이렇게 한다고 견하가 죽음을 확실히 피하리라는 보장도 없지. 하지만 적어도 그 환상과 최대한 거리가 먼 상황을 만드는 데 희망을 걸어봐야 하지 않을까?”
미래를 보여주는 환상 속 카라코룸에서, 견하는 리안과 대등하게 보일 정도의 위세를 누리고 있었다.
카라코룸 거리 곳곳에는 세 발 까마귀 완장을 찬 인간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두 상황 모두에서 멀어지려면,
“견하의 실각…….”
“……그래.”
무거운 어조로, 황제는 태사의 결론을 확인해주었다.
“환상대로라면 견하가 천손민족협회 출신들을 복권해 준 거겠지. 그들이 견하의 권력 기반이니까. 그 기반으로 태사와 대립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간 게 아닐까.”
“정치감독청을 해체하거나 최소 무력화한다…….”
가슴 아픈 결론이다. 그녀들은 7년을 함께 한 연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동지의 몰락을 꾸미고 있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그를 살리려고.
살릴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리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야. 아니,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실행의 어려움을 말하는 거야.”
견하를 동정해서 준 지위와 권력이 아니다. 보상으로 준 것도 아니고, 연인이니까 선물로 준 것도 아니다.
견하는 이미 미리안 정권의 중핵이다.
미리안의 권력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다.
“권력 공백이 생겨.”
누가 견하의 빈자리를 대신할 것인가.
누가 견하가 누리던 권력을 가질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견하가 맡던 일을 누가 맡을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권력에는 역할이 부여되므로.
혹은 역할에 권력이 부여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견하가 ‘틀어막고 있던’ 것들이 어떤 식으로 터져 나올지 상상만으로도 암담하다.
고려국민당의 안세규는 물론이거니와 공산당과 사회민주당도 그 권력의 한 귀퉁이를 얻으려 날뛸 테지.
류성일을 비롯한 제국입헌당 내 원로들도 권력을 탈환한다며 한 자리 내어달라고 요구하면 골치 아프다.
한마디로 말해 견하의 실각은 그대로 리안의 실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짐이 나설게.”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리안의 눈이 조금 커졌다.
“짐의 어깨 위에 태사가 올라타면 돼. 마침 ‘황제의 직접 통치’를 원하는 목소리도 있잖아.”
아까 전 ‘연방에서 황국으로’라는 구호를 듣고 무슨 생각을 하나 했더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건가.
“짐의 권력은 그간 제국최고회의의 의향을 존중해주는 방향으로 작동해 왔어. 짐의 거부권에 얼마나 제약을 둘 것인가를 두고 논쟁도 있었고, 짐 스스로도 자제해 왔지.”
바로 여기에, 빈틈이 있다.
그런 논의는 황제권과 태사를 비롯한 선출 권력이 ‘대립’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두 권력이 적극적으로 협력한다면?
황제가 거의 무한한 지지를 태사에게 보낸다면?
황제가 어떤 법안, 어떤 정책을 거부하는 데에는 제약이 있지만,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데에는 제약이 없다.
그저 암묵적인, ‘황제는 정권에 대한 개입을 자제해야 한다’라는 관행이 있을 뿐.
그 관행을 깬다면 반발은 있겠지만, 강제력을 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짐이 태사를 무한히 신뢰하고, 태사의 뜻이 곧 황제의 뜻이다. 그러니 태사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야말로 황국의 이상을 구현하는 지름길이다…… 이런 발언을 몇 번 하는 것만으로도 태사의 권력에는 강력한 권위까지 실릴 거야.”
황제에 버금가는 절대 권력으로서의 태사.
“그 권력을 바탕으로 제국최고회의와 쿠릴타이를 통합해. 통합 과정에서 제국최고회의가 쿠릴타이와 대립하게 해. 태사는 그들이 권력 투쟁을 벌이는 동안 더욱 권력을 확대해.”
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루우의 말대로 한다면 다이온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는 최적의 상태가 될 것이다.
리안의 지도력 아래 모든 정책이 완벽하게 통제될 테니까.
그러나 그것은 리안이 피하고자 했던 ‘허동주의 길’이 아니던가.
동군연합, 연방 체제를 결성한 지 3년 만에, 고려가 몽골을 병합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가 3년간 내세웠던 모든 이상은 그저 고려 제국주의의 침탈을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뿐이랴.
리안이 정말로 피하고 싶었던 길,
‘백부 미승휴가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흉내에 불과하다고 해도 민주주의에 기반한, 다자의 균형과 공존을 통한 제3 제국의 ‘안정’…… 그것이 영영 멀어지게 된다.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황제에게서 나오게 되니까.
“당장 너와 내 시대만은 어떻게 넘긴다 해도, 우리의 후계 시대도 그 체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안타까운 질문이었다.
루우가 자식 없이 갑자기 죽기라도 한다면, 리안은 그녀의 사촌 동생인 바이다르를 황제의 자리에 올릴 것이다. 별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그러나 루우가 누리던 ‘황국’의 권위를 바이다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혹은 리안이 언젠가 물러났을 때, 리안과 루우가 구축한 체제가 지금처럼 작동할 수 있을까? 다이온 연방을, 혹은 대원황국(大元皇國)을, 신뢰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끈으로 묶인 그 체제를 후계자들이 유지할 수 있을까?
루우의 대답은 리안의 질문에서 도피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현 상황을 꿰뚫는 것이었다.
“우리는 미래를 위한 해결책이 아니라, 현재를 위한 해결책을 고를 수밖에 없어.”
어느새 그들은 1936년을 살고 있었으니까.
다시 멍하니 루우의 얼굴을 바라보다, 리안은 끄덕였다.
그 끄덕임은 마치 좌절 끝에 고개가 늘어진 것 같았다.
***
오랜만에 동명에 돌아온 견하는 제국최고회의에 출석, 그간의 성과를 보고했다.
……보고하는 자리였는데, 어느새 의원들을 향해 새로운 정책을 촉구하는 자리가 되어 버렸다.
“현재 다이온 연방이 추진 중인 개혁 정책의 목표는, 한족 농민의 정착을 통한 생활 안정, 그에 따른 ‘연방화’의 성공입니다.”
여기서 견하가 말하는 ‘연방화’란, 다이온 연방에 한족들이 얌전히 복종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다름 아닌 본국에서 이 정책의 취지를 해치려는 무리가 있다, 그런 첩보를 받았습니다. 그런 무리에게 놀아난 정치인들도 있다는, 참으로 안타까운 보고도 받았고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주 청장.”
자못 불쾌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견하를 향했다. 견하는 그 의원을 향해 고개를 돌려,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바라보았다.
파충류가 먹잇감을 물어뜯기 직전의 모습 같아, 의원은 뱉은 말을 어쩌지도 못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누군가는 이미 이 시점에 느꼈으리라.
주견하의 시선은 신수덕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과 꼭 닮았다고.
“우리는 한족 지주의 토지를 해체해, 한족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작업 중입니다. 그런데 한족 지주들이 붕괴한 그 틈을 이용해 자기네가 ‘지주’로 변신을 꾀하는 고려 자본, 몽골 자본이 있습니다.”
갑자기, 견하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이는 반역입니다!”
날카롭긴 했어도 극단적인 말은 자제해왔는데, 오늘 견하는 노성을 전혀 자제하지 않았다.
“첫째로는 한족 농민의 생활을 위협하여 다시금 다이온 연방 체제를 불안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반역입니다! 둘째로는 나라의 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사로운 이익만 추구하니 반역입니다. 셋째로는, 자본을 본국 바깥으로 ‘도피’시키기에 반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