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국으로 가는 길(8)
“뭐 우리는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바란다며 대놓고 ‘솔직한 마음’을 이런 기사에 싣는 미치광이는 별로 없지.”
신문 기사의 번역을 팔랑이며, 리안은 냉소했다.
“잘…… 안 되고 있나요?”
효윤의 물음에 리안은 의자 목 받침에 뒤통수를 기댔다가, 루우 쪽을 보며 말했다.
“폐하껜 송구한 일이지만 쉽지 않을 거 같아.”
“수교조차도?”
이번엔 리안의 시선이 효윤 쪽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최악을 대비해줘.”
멕시카와의 전쟁. 그 말이 떠오르자 효윤은 침을 삼켰다.
“악몽에 나올 정도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지. 지금도 희망은 버리지 않았어. 하지만 각오는 미리 다지자고.”
고비마다 최악을 각오해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리안은 없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에 큰 부담이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멕시카에 평화의 의지가 없다는 거야?”
“모르겠어. 이런 식으로 언론에 이야기하는 걸 보면 단순히 협상을 유리하게 끌어가려는 시도인 것 같으면서도, 우리의 진지한 메시지에는 응하지를 않아.”
“전에 견하랑 잠깐 이야기 나눈 바로는…… 일본공화국이 일부러 우리와 멕시카 사이의 대화를 차단했을 가능성도 있다던데요.”
“일본공화국의 기괴한 외교 방식 말이지. 다이온도 멕시카도 일본만 의존하고 일본을 경유한 외교만이 이루어지도록…… 나도 외무성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야. 그래서 다른 중재자를 찾았는데,”
에스파냐를 중재자로 해서 멕시카와의 수교 의사를 타진한다. 그러나 여기도 영 신통치 않았다.
“에스파냐는 멕시카에 굴복해 살아남았으면서, 다이온이 멕시카와 수교하는 상황을 그리 달갑게 여기진 않는 것 같아.”
“대체 왜…… 동아시아든 어디든 ‘겉으로나마’ 평화 체제가 확립되면, 어쨌든 안정성은 조금이라도 보장되는 게 아닌가요.”
“뭐 그쪽 꿍꿍이야 깊이 알 수 없겠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균형’이 깨진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어.”
브리튼, 신성 제국, 로마 제국, 멕시카를 둘러싼 외교. 그 사이에서 에스파냐가 잡는 균형.
그 균형이, 고려가 멕시카와 평화를 이루면 깨진다?
고개를 숙인 채 생각하던 효윤이 이윽고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원래는 동명엔 잠시 머무르다 극북으로 가려고 했는데, 응천에도 잠깐 들러야겠어요. 가서 견하 의견을 좀 들어보고 싶어요.”
전보나 서신으로 교환할 수 있는 의견에는 한계가 있다. 효윤은 직접 몇 시간이고 견하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3년간, 극북을 돌면서 그녀에게도 국방의 한 축을 살필 수 있는 역량이 생긴 것일까.
리안은 짧게 끄덕여 허락했다.
***
“수상쩍긴 하지.”
한때 소녀 태사를 호위하던 소년과 소녀는, 이제 같은 중장 계급이 되어 같은 풍경을 내려다본다.
견하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으면서도 하얀 정복을 벗지 않았다. 반면에 효윤은 정복 상의를 왼쪽 어깨에 대충 걸치고, 민소매 차림으로 양 무릎에 팔꿈치를 올려둔 느슨한 자세를 취했다. 극북의 추위에 익숙해진 효윤에겐 남쪽 지방의 더위는 중장의 체면을 ‘따위’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말끝은 또렷하고, 눈은 날카롭게 빛난다.
“수상쩍다? 에스파냐가?”
“에스파냐도 그렇지만, 네가 나열한 나라들을 한번 보자고.”
에스파냐. 신성 제국, 브리튼, 멕시카, 로마 제국.
“멕시카의 최고지도자 쿠에츠팔린을 취재한 기사는 나도 읽었어.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더라고.”
“어떤 점인데?”
“의도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로마 제국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있어.”
처음에는 3년 전에 이탈리아를 침공, ‘평화를 깨뜨린’ 로마 제국에 대한 언론의 반발심이 아닐까 추측했다. 황제수권법을 통해 민주주의를 철폐한 로마 제국을 ‘자유 세계’의 일원으로 취급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
“쿠에츠팔린도 로마 제국에 대한 언급은 피하지.”
견하가 딱 여기까지 말하자마자, 효윤의 생각도 같은 곳에 도달했다.
“두 나라 사이에 밀약이 있을 수도 있겠군.”
“증거가 없다 뿐이지, 둘 사이의 관계는 3년 전부터 의심스러웠어. 토칸이 로마 제국에 망명한 건 확실하고, 멕시카가 내전에서 보인 파멸인 기술, 이탈리아 사태에서 로마 제국이 보인 파멸인 기술…… 어쩌면 신수덕은 로마 제국에 있을지도 몰라.”
신수덕의 이름이 나오자 효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어쩌면 대서양을 오가면서 멀쩡하게 살아있을지도 모르겠네. 아니 그보다도…….”
로마 제국과 그 황제 벨리사리우스는 고려를 동맹으로 생각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기만이었을까?”
“외교에는 의외의 솔직함과 예상 가능한 기만이 있기 마련이지.”
“그렇다면, 에스파냐가 멕시카와 우리의 수교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건…….”
“그게 이루어지면 에스파냐의 역할이 줄어들어. 로마 제국과 멕시카는 에스파냐가 아니라 우리를 사이에 두고 다른 열강들과 대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 나라의 국력만으로도 대세는 정해진 거나 다를 바 없으니까.”
내전에서 회복하는 속도가 빠르다. 아니, 내전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긴 했어도 원래 세계 1위의 강대국이었다. 그런 멕시카가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고려-다이온과 협력한다면 국력 회복은 순식간일 터.
지금이야 멕시카의 ‘겸손’도 내전 피해가 회복되지 않은 데서 나오는 것이지, 거리낄 게 없어진 멕시카가 과연 세계를 향해 ‘겸손’한 태도를 유지할까?
“그럼 대 멕시카 외교 문제가 일본과 에스파냐의 그런 인식에서 비롯된 거다? 아니…… 그런 인식이라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일 거야.”
“뭐 그 나라들 생각은 그렇겠지만, 과연 멕시카도 그럴까, 하는 점도 계산에 넣어야 해.”
복잡하다. 효윤은 견하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살을 찌푸렸다.
“멕시카도?”
“멕시카가 정말로 우리와의 수교를 바란다면 일본이나 에스파냐 따위가 방해한다고 가만히 있을까?”
“……바라지 않는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몰라. 하지만 당장은 바라지 않는 게 확실해.”
최악을 각오하라, 라는 리안의 말은 옳다.
“그래서 이렇게 여기서?”
“아, 그래. 극북 요새화를 시찰하시던 최효윤 중장이 보시기엔 어떠신지?”
두 사람은 응천이 아니라, 동남쪽으로 더 나아간 곳에 잇는 도시, 임안의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그 바닷가에 건설되는 요새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세계대전 때도 연합군은 이곳을 통해 상륙해서, 남쪽에서 응천을 포위했어.”
“그럼 상륙을 허용하면 안 될 곳이겠네.”
그렇게 말한 효윤의 시선은 서북쪽으로, 다시 서쪽으로, 그렇게 왼쪽으로 빙 돌아 남쪽으로 향했다.
“원철을 더 닦달할 수는 없을까?”
“최 중장이 보시기에도, 철도망이 부실하지?”
“내가 극북에서 신경 쓴 것도 요새 그 자체가 아니야. 요새에서 쏠 포탄의 공급이지. 포탄으로 대응할 수 없다면 얼마나 거대한 포를 배치한들, 두꺼운 벽을 쌓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저 군사 애호가들이 보기 좋은 관광지에 지나지 않게 된다.
“수많은 기만이 고려와 다이온을 둘러싸고 있지만, 외교적 해법을 계속 모색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어.”
“철도망 건설에 필요한 시간을 번다…….”
“저들이 평화의 이름으로 우리를 ‘기만’한다 해도, 기만에도 시간은 들어가. 우리는 그만큼 시간을 버는 셈이야.”
“……일본 선제 점령을 주장하는 것도 그래서야?”
“내전 이후 발탁된 장교 중에는 급진적인 이론가들이 많더라고.”
“일본을 방파제로 쓸 수 있다면 멕시카와의 전쟁이 상당히 유리해지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문제는…… 하면서 효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견하 네 말대로, 멕시카가 우리와의 평화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게 어떤 ‘초조감’ 때문이라면 어떨까?”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견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효윤의 추가 설명을 바라는 얼굴이었다.
“우리에게는 전쟁을 늦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마찬가지 원리로 저들에게도 ‘시간’이 문제라면? 아니, 마찬가지가 아니지. 정반대지. 멕시카는 조금이라도 전쟁의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고 판단했다면?”
“멕시카가 자기네 회복 속도보다 우리의 성장이 더 빠르다고 예상한다는 건가?”
“국토나 자원은 몰라도 인구는 우리가 훨씬 많아. 멕시카가 대공황과 내전으로 비틀대는 동안 우리는 계속 성장만 해 왔다고.”
“우리와 멕시카 사이의 격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내전의 실전 감각이 가시지 않은 육군, 보존한 해군으로 승부를 보려 한다…….”
시간을 벌고 싶었건만, 시간이 고려의 손짓을 외면한다?
그렇다면 더더욱.
“카라코룸에 일원화한 정부가 절실해.”
효윤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동의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동의할 수 없었다. 리안에게서 ‘그 사실’을 듣고서 어떻게 동의하겠는가. 하지만 촉박한 시간 동안 다이온의 총력을 기울여 전쟁에 대비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전쟁에 완벽히 대비되어 있다는 사실만이, 침략을 꿈꾸는 자들을 좌절시킬 수 있으니까.
이탈리아 사태는 모두에게 그런 교훈을 주지 않았던가.
살아남는 데 급급했던 소년과 소녀는, 그 경험이 키운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 세계대전이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고.
***
-연방에서 황국으로!
비밀리에 ‘별장’으로 이동하면서, 황제와 태사는 그런 구호를 외치는 시위를 먼발치서 볼 수 있었다.
별장에 오자마자 리안은 루우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오랜만에 친구와 술이라도 마실 생각으로 마련한 자리건만, 이런 화제를 꺼낼 수밖에 없다니.
“뭘? 카라코룸 천도? 아니면 황국 선언?”
“둘 다.”
루우는 양 발바닥을 마주 댄 채 굳이 바닥에 앉았다. 그러고선 허리를 앞뒤로 까딱이며 생각에 잠겼다.
많이 자랐지만, 여전히 애 같은 면이 있구나 싶어 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얗게 드러난 어깨와 허벅지는 그 시절 그대로였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것 같지만, 태사는 어떻게 생각해?”
“나?”
“통합 정부의 태사가 될 생각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