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국으로 가는 길(5)
견하는 응천에 와 보는 게 처음이었다.
주원장의 명나라, 오삼계의 주나라, 태평천국의 수도였던 응천.
태평천국이 멸망하고 나서는 낭키아스 울루스가 그대로 이곳을 칸의 수도로 삼았고, 지금은 다이온이 남방 정책 중심도시로 취급하고 있다.
낭키아스와 키타이를 비롯한 군소 울루스는 3년 전에 루우가 동군연합의 군주가 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화남(華南)의 중심지는 응천’이라는 인식이 깊다.
비슷하게 송나라, 요나라의 수도였던 개봉은 화북의 중심지 취급을 받는다.
최소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인식을 고작 3년 만에 뿌리 뽑을 수도 없고, 새로운 다이온 체제에서도 그런 관습을 활용하는 쪽이 행정적으로도 편했다.
응천과 개봉에는 그간 축적한 문서, 두 도시를 중심으로 한 각 지역 기관의 체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담당해 온 관리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고려는 카라코룸에 그랬던 것처럼 행정장관을 배치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정부 아래 일원화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모든 일에는 중간 과정, 혹은 과도기가 필요한 법이다.
자신이 이렇게 응천에 내려와 개혁 진행 상황을 ‘감독’하는 것도 그 과정의 하나라고, 견하는 생각했다.
“오느라 고생 많으셨소, 주 청장.”
응천의 행정장관 송인섭이, 마치 국빈이라도 맞이하는 것처럼 열차에서 내리는 견하를 마중했다. 두 사람의 지위 차이는 ‘하게’를 써도 무방했지만, 송인섭은 시종일관 ‘하오’로 견하를 대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적절했다.
견하는 제국태사 전용 열차를 타고 내려왔으니까.
그것은 리안이 연인인 견하를 배려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정치감독청장의 직접 방문에 누구의 입김이 작용했는지 알리기 위함이기도 했다.
당연히 타고 와야 할 열차에 탔다는 듯한 견하의 태도도 ‘무언의 압박’으로 작용했다.
스물네 살짜리가 정치감독청 직원들의 의전을 받으며 열차에서 내린다.
다른 이였다면 ‘도련님이 건방지다’라고 생각했을 상황이지만, 주견하의 몸에 밴 태도는 도저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게 한다.
오만과 품격, 그 둘을 모두 갖추었음이 손짓 하나, 발걸음 하나에서도 드러난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봤다면 견하를 오래된 왕공 귀족의 후예쯤으로 추측했겠지만, 놀랍게도 이 청년의 배경은 사실 보잘것없다.
주견하가 이 지위까지 이른 것은 순전히 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7년여 동안 본인의 실력으로 달성한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국장급으로 태사부 말석에 이름을 올리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당당하게 청장급으로 각료의 한 사람이기에 더욱 그 앞에서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한걸음 뒤처져 있던 측근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견하는 송인섭의 인사에 답했다.
“행정장관께서 몸소 맞이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몸 둘 바를 모르는 건 오히려 이쪽이지. 그런 말을 삼키며 송인섭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응천행은 처음이라고 하시니 내, 안내하겠소. 가면서 일 이야기도 좀 드리고.”
***
“무난한 선택이었던 것 같군.”
행정장관 관저에서 만찬 전까지 휴식을 취하는 동안, 견하는 송인섭에 대해 그렇게 평했다.
송인섭을 응천 행정장관으로 보낸 리안의 선택이 무난했다는 말이다.
“사태를 획기적으로 진전시킬 특출난 인재는 아니지만, 자리를 채우고 안정적인 효과를 기대해볼 만한 사람이긴 했어.”
그런 견하의 혼잣말 같은 평가를 듣는 사람은, 그의 대학 동기이자 이번 응천행을 수행하는 원동인이었다.
“그럼, 딱히 송인섭 장관을 추궁할만한 문제는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대학 시절에야 반말을 썼지만, 어느새 그도 정치감독청의 관료가 되면서 상관인 견하를 향해 존댓말을 쓰게 되었다.
견하도 대학 동기의 그런 대접을 받는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아니지, 동명에서 보고받은 상황대로라면 ‘획기적인 진전’은 필요하거든.”
물론 나도 획기적인 진전이 필요하고, 라고 견하는 덧붙였다.
“원 국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어?”
처음 야별초를 해체하고 정치경찰실이 창설될 때만 해도, 조직으로서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국내외 유사 조직을 곁눈질하며 학습해 온 견하가 정치경찰실을 정치감독청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비로소 일종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기존의 감찰국에 더해, 풍군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방첩국이 더해지기 시작하더니, 최근에는 친위국과 사상국을 추가로 갖추었다.
견하는 측근 중 정식 군대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이익서를 방첩국장으로 임명했고, 오랫동안 감찰국 업무를 보조해 온 유지나를 감찰국장에 임명했다.
사상국의 국장으로는 ‘알타이 민족문제(AN) 연구소’의 소장이기도 한 한재연을 배치했다.
최종적으로 태사의 경호실을 흡수하고, 제국입헌당 의원들과 각료들의 호위 업무까지 담당하도록 만든 친위국에는 이 원동인을 국장으로 두었다. 그간 이익서와 한재연 밑에서 활동하며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카라코룸 천도 촉구 시위’의 배후에는 친위국장 원동인이 있다.
지나치게 한재연의 입김이 닿은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들었지만, 원동인의 출세욕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권한은 견하의 손에 있었다. 그것을 아는 원동인의 충성도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고 견하는 판단했다.
당장은, 유용하기도 하고.
그래서 견하는 이번 응천행에 원동인을 수행시켰다. 본국에서의 일은 유지나에게 맡겨야 했기에 데려올 수 없다는 점도 이 결정에 한몫했다.
자연히 정치감독청 직원 중 친위국이 이번 응천행에서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견하를 호위할 병력이기도 했지만, 여차하면…… 언제든 견하가 행사할 수 있는 무력이기도 했다.
견하가 감찰국장이던 시절에 감찰국 직원들이 그러했듯이.
즉, 원동인의 의견을 묻는 것은 곧 ‘친위국의 입장에서는 어떠한가’하고 묻는 것이었다.
잠깐 고심하더니, 원동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친위국의 영역을 벗어나는 답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질문을 던진 쪽은 나다. 그러니 대답은 기탄이 없어도 무방하다.”
“‘동아시아 평화회의 관리 영역’이라는 모호한 성격으로는 송인섭 장관이 아무리 뛰어나도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기존 몽골과 고려의 영토. 한족 관리 특구를 비롯한 군정 시행 지역. 이들을 제외한 화북에서 화남에 이르는, 황해 연안 지역은 동아시아 평화회의의 관리를 받는다.
그 평화회의를 주관하는 사람이 바로 고려 태사이기에, 사실상 고려의 직할령이나 다를 바 없다. 실제로 이 지역은 고려식 ‘도(道) 체제’로 개편 중이다.
분명 키타이나 낭키아스라는 번국이 설치되었던 시절과는 다르다. 그러나 여전히 평화회의를 한 번 거쳐서 고려의 의사가 닿는 만큼, 그 사이엔 ‘막’이 하나 있다.
그 막이 있는 이유는 다이온이 ‘동군연합’ 체제를 고수하기 때문이다. 동군연합뿐만 아니라 다른 가맹국의 주권까지 존중한다는 원칙도.
그러다 보니 어쨌든 이 지역은 ‘고려에도 몽골에도 속하지 않은’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즉, 원 국장은 다이온의 현 체제로는 어렵다고 말하는 건가.”
“외람됩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원동인은 말꼬리를 흐렸다.
아마도 순수하게 정책 분석만으로 나온 답은 아닐 것이다. 그가 주도하는 ‘카라코룸 천도 촉구 시위’, 그 배후에 있는 사상국장 한재연의 입김이 닿은 의견이라고 봐야겠지.
견하의 질문에 이때가 기회다 싶어 자기네 의견을 내세운 것일 터. 하지만 견하는 딱히 그런 행동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의 의향과도 맞아떨어지니까.
아무리 고려가 다이온 연방의 주도국이라 해도, ‘겨우’ 구성국 중 하나의 수장이라는 권력 형태는 불안정하다.
견하는 리안의 권력을 그렇게 판단했다.
동아시아 평화회의를 반드시 고려가, 반드시 그 태사인 미리안이 주도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견하는 ‘반드시 미리안이어여만 한다’는 조건을 만들어야 했다. 그게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이웃한 동군연합의, 어쨌든 법적으로는 대등한 또 하나의 태사’는 없어야 한다.
두 사람의 태사가 두 구성국에서 황제를 보필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태사가 다이온 전체의 국정을 주도해야만 한다.
쿠릴타이와 제국최고회의가 각기 자기 영역에서의 의결기구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된 의결기구가 다이온 전체를 무대로 삼아야 한다. 동아시아 평화회의 같은 어설픈 장난으로는 다이온의 미래를 감당할 수 없다.
더욱이 몽골 정부가 ‘고려의 통제에서 벗어난 주권 행사’를 시도한다고 보고 받은 이상 말이다.
“하지만 정치감독청도 일개 기관이다. 들어서 알겠지만 현 다이온 체제의 변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아니, 만만치 않은 정도가 아니지. 대중의 의사와는 별개로 제국최고회의는 반대 의견이 주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이온이라는 더 큰 체제보다는, 고려라는 체제에 안주하길 원하는 자들. 그들에게 있어 다이온은 그저 선거에서 인기를 얻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미리안의 업적에 기생하는 자들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친위국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일개 기관이 그런 제국최고회의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까?”
견하가 던진 질문은 정말 의견을 듣기 위함이면서도, 동시에 원동인의 총명함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측정하기 위함이었다. 원동인도 그것을 알기에 침을 한 번 삼킨다.
“각하께서 다른 곳도 아닌 친위국을 대동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친위국이 처음 창설될 때, 태사 합하의 경호실이 주축이 되긴 했지만, 감찰국의 군사 작전에서 능력을 드러냈던 이들이 대거 합류했습니다. 가히 정치감독청 최대최고의 무력이라 할만합니다. 즉, 친위국은 각하께서 무력 사용을 불사하실 때 동원됩니다.”
견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합하를 공산당입네 어쩌네 하는 인간들…… 합하께선 그들의 처분이 민주주의, 법치주의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하시지만 내 생각은 달라. 그런 중상은 근본에 개혁에 대한 반발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을 민주주의적으로, 법치주의적으로 다스리는 것은 다이온 대개혁에 대한 반대를 그렇게 존중해주겠다는 뜻이죠.”
“존중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친위국이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겠지?”
“우리의 이름대로 ‘정치’적 개혁 상황을 철저히 ‘감독’하겠습니다. 반발은 친위국의 ‘무력’으로 누르고요.”
정치감독청의 관할은, 전에 안세규가 지적한 대로 넓고 모호하다. 그리고 견하는 그 모호한 틈을 서슴없이 파고들어 무제한적 권한을 휘두를 생각이었다.
“절대로 관용을 베풀지 말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