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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67화 (467/541)

황국으로 가는 길(4)

어쩌면 리안은 그 예언 비슷한 것을 부정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고, 루우는 생각했다.

리안을 향한 연민에 루우는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손을 내밀어 슬며시 리안의 손을 잡는다.

“태사의 의식은 게레센제가 만든 공간 속에서도 분명 어딘가로 날아갔다가 돌아왔지. 그 순간 그 모습은 틀림없이 공간을 가르는 것이었어. 그걸 부정할 셈이야?”

황제가 잡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리안은 그때의 느낌을 떠올렸다. 마르코 폴로와 함께 있던 공간을 내리쳐, 다시금 견하가 있던 곳으로 돌아올 때의 느낌을.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효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지만, 견하에게 그때 보신 걸 그대로 얘기해주는 건……?”

“그랬다간 견하는 카라코룸 천도와 죽음 회피를 동시에 추진할걸. 그 과정에서 견하가 어떻게 튈지 알 수가 없어.”

이를테면…… 카라코룸에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청소’에 돌입한다든가.

견하 자신뿐만 아니라 루우와 리안을 포함한 제국 지도부 전체를 위협하는 모든 세력에 대해 이제껏 없었던 피바다를 만들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나이를 먹고 세력도 불린 견하가 다른 세력과의 충돌을 전혀 망설이지 않는다는 게, 요즘 리안의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견하가 걱정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려 제국, 다이온 연방의 안위도 걱정해야 한다.

주견하의 연인 미리안은 제국 태사라는 본분을 잊을 수 없으니까.

리안의 얼굴을 보던 루우도 말을 보탰다.

“무엇보다도, 주견하의 그런 움직임이 그 죽음을 가속한다면 알려주지 않느니만 못해.”

무한한 세계, 무한한 결말, 그 결말에 이르는 무한한 과정. 그것은 ‘무엇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의미다.

루우는 리안을 안심시키려는 듯 말을 이었다.

“우리는 3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어. 태사가 봤다는 환상처럼 카라코룸 천도가 이미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천손민족협회가 부활해서 카라코룸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도 않지. 주견하는 응천으로 보냈고. 그러니 우리는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다이온 연방을 안정적으로 다져나가면 돼.”

위로하려는 의도를 알았기에 리안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잠깐 머뭇거리고서야 리안은 물었다.

“칸발리크에서는, 어떻게 됐어?”

***

칸발리크에서 루우는 황궁에만 머물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던 곳이고, 그녀도 그곳에서 삶의 전반기를 보냈지만, 추억 이상으로 상처를 남긴 공간이기도 했으니까.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수년간 의식이 없었고, 아버지와 함께 황궁 상공에서 목숨을 잃었다.

황궁은 루우의 두 눈으로 그 핏빛 하늘을 보았던 곳이다.

칸발리크의 어좌는 숙부인 게레센제를 끌어내리고, 또 다른 숙부 울제이가 군홧발로 더럽힌 자리다.

태평천국에 함락되었던 세계대전까지 따지고 들면,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공간이 과연 ‘사람이 살 집’으로 적절한지 의문이다.

그래서 루우는 몽골 타이시 시반의 의례적 보고를 받는 등의 일을 처리하자마자 투글룩을 데리고 『쿠빌라이 문서』의 탐색에 나섰다.

동군연합이 완성된 후, 투글룩도 몽골 내전 때 흩어졌던 부하들과 연구 인력을 다시 결집시켰다.

기존 고려의 이단 연구 기관과 투글룩이 이끄는 연구집단이 하나로 통합되어, 다이온의 이단 연구는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쩌면 세계적인 추세에서도 상당히 앞서나가 있을지도 모른다. 투글룩은 그렇게 자부했다.

“로마 황제 벨리사리우스가 대체 뭘 감추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렇게 자신해선 안 돼.”

반면 루우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아즈텍 대륙 내전이나 이탈리아 사태에서 나타난 파멸인 군단…… 사실 저희도 만들라고 하신다면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허동주와 신수덕의 기관에서 독자적으로 연구한 성과이긴 합니다만, 지난 3년간 그 성과의 파편을 모으고 또 따라잡으려고 노력한 결과입니다.”

루우는 자국의 기술력에 자부심을 품기 전에, 리안이 했던 우려를 먼저 떠올렸다.

-각국이 파멸인을 병기로 활용하려는 위험한 군비경쟁.

“……칸발리크 사태와도 같은, 그러니까 혁세주 소환도 가능한가?”

“그렇습니다만…….”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한 원인을 전략 병기로 활용한다. 이게 국가원수로서의 삶인가.

그 병기의 위험성과 비인간성은 전장에 선 인간뿐만 아니라, 멀리 후방에 있을 인간의 삶도 이토록 뒤흔든다.

하지만 루우는 그런 감상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투글룩이 아버지의 신하이긴 했어도 루우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까지 공유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은 리안이나 효윤, 견하…… 정도면 충분했다.

“문득 든 생각인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문서를, 얼마나 많은 곳에 흩뿌린 걸까.”

“글쎄요. 그건 마르코 폴로만 알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당시 마르코 폴로의 활동 영역을 생각하면 이렇게 다이온 강역 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지 않을지.”

투글룩의 말대로다. 아마 카자흐, 사회주의 페르시아, 더 나아가 로마령 메소포타미아 일대에도 『쿠빌라이 문서』는 분명 있을 것이다. 세계 각국이 그 유산을 입수하여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옛 다이온 예케 몽골 울루스의 강역 밖에 있는 나라들이, 강역 안에 있는 나라들보다 이단 연구가 다소 뒤처졌음을 생각하면 분명히 그렇다.

루우와 투글룩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혁세주나 신종, 혹은 유사한 무언가에 의해 단절된 공간 안으로 들어온 것도 아닌데, 섬…… 아니 산인가?

거인이 대지를 퍼서 공중에 걸어두기라도 한 것처럼, 그 산은 흙과 바위 바닥을 드러내며 떠 있었다.

“이렇게 눈에 띄는데 이제야 발견되었다는 건?”

“예. 최근에 갑자기 저 산이 통째로 떠올랐습니다. 저쪽으로 가 보시면……”

투글룩의 안내에 따라 향한 곳엔, 과연 산이 뿌리째 떨어져 나간 자리가 계곡이 되어 남아 있었다.

“떠오른 자리에 머물지 않았군.”

“지구가 자전하면서 지표는 움직이지만, 저 ‘부유하는 산’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듯합니다.”

“그건 마치…… 대기권 안에 있는 작은 위성 같군.”

아니, 설명대로라면 확실히 지구를 공전하고 있다. 더할 나위 없는 위성이다.

중력을 거스르고 떠 있는 저 기묘한 특성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위성.

천체.

이쪽 세상에 불쑥 얼굴을 드러낸 혁세주와 유사하지 않은가.

루우가 도달한 결론은, 이미 투글룩을 비롯한 연구원들도 내린 결론인 듯하다. 황제의 얼굴을 보고 투글룩은 끄덕였다.

“항공정찰은?”

“산사(山寺)로 보이는 시설을 확인했습니다만, 착륙에 부적합한 지형이라 탐사 인원을 직접 보내진 못했습니다. 일단 정찰한 바로는 산 내부에는 인간의 반응이 전무합니다.”

“오래전에 버려진 시설이거나……”

혹은 문제가 생겨서, 전부 죽었거나.

산이 갑자기 떠오른 건 그 ‘문제’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루우의 머릿속을, 지금까지 몇 차례 봐 왔던 파멸인에 의한 참상이 스치고 지나간다.

“접근하려면 짐이 직접, 그 방법을 써야 하는군.”

“예. 일반적인 이단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고, 루우는 투글룩을 향해 말했다.

“바짝 붙도록.”

투글룩은 현명하게도 당황하지 않고 곧장 황제의 등에 붙어 섰다. 루우의 용이 치솟아 올라 두 사람을 곧장 부유하는 산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용의 움직임에 따라 갈라지는 바람이 정신없이 투글룩의 귓가를 때린다. 투글룩은 꼴사납게 쓰러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언제나 귓불 언저리에서 자른 길이를 유지하는 루우의 머리칼도 바람에 흩날린다.

황제는 소녀를 벗어나 성인이 되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수명이 다하리라 예측한 이들도 있었지만, 스물셋이 될 때까지 황제는 건강하게 살아 있다.

그녀의 건강을 항상 살피는 것. 투글룩을 비롯한 이들이 루우를 수행하는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여러 대에 걸쳐 용과 늑대와 사슴…… 그 신종의 혈통을 배합하는 실험은 루우의 대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그 실험의 끝을 보겠다는 학구적 열망도 있었고, 실험의 대상이 된 루우의 삶을…… 어떻게든 연장해보겠다는 사명감으로 달려드는 이도 있었다.

투글룩 자신은 후자에 가까웠다.

시레문의 충신을 자처하는 그에게, 마지막 직계인 루우 테무르의 의미는 각별했으니까.

용은 부유하는 산등성이에 이르렀다. 산안개처럼 휘감아 돌다 루우의 시야에 산사가 들어오자 곧장 머리를 그쪽으로 향했다.

용이 빛과 함께 흩어지고, 루우와 투글룩은 산사의 경내에 내려섰다.

“최근 뭔가 문제가 생겼다기엔 사람의 흔적 자체가 거의 없는데.”

유일한 사람의 흔적인 건물들은 썩어서 무너지기 직전이고, 건물 사이에는 누군가의 발자취조차 없다. 투글룩과 루우가 옮긴 걸음만이 흙바닥에 새기는…… 몇백 년 만에야 들어온 사람의 흔적 같았다.

***

“거기서 뭘 찾아냈어?”

리안의 물음에 루우는 산사의 쓸쓸한 풍경에서 퍼뜩 깨어났다.

“늘 그렇듯이 기록을 찾아냈지. 다만 이 기록의 성격이 다른 것과는 좀 달랐어.”

“달랐다면?”

“이단과 파멸인, 혁세주에 대해 설명한 『쿠빌라이 문서』와는 달리, 거기 남은 기록은 부유하는 산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이었지.”

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척도였다.

쿠빌라이 카간도 마르코 폴로도, 모호한 예언을 남기는 무당이 되고 싶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남기면서, ‘그 종말이 언제 오는지 확실히 알 방법’ 또한 탐구했다.

산은 그 결과였다.

“부유하는 산의 특성이 혁세주 같다고 느낀 건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어. 구체적인 원리는 더 연구해봐야겠지만, 혁세주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경이 조성되면’ 그 산도 떠오르게 되어 있었던 거야.”

요컨대, 세상 자체가 혁세주가 등장하기 좋은 환경으로 변해간다.

즉 언제 어디서든 혁세주에 의한…… 참상이 벌어지기 알맞은 세상이 되면, 유사한 성질을 지닌 그 산에도 이변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이 언제든 멸망할 수 있는 상태로 접어들었다는 말이군.”

리안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3년 전에 우려했듯, 인간들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길을 택했고, 그 결과가 빚더미처럼 찾아온 것이다.

견하가 죽고 리안의 세상이 끝난다.

『쿠빌라이 문서』에서 몇 번이고 언급한 것처럼 이 세상도 다른 여러 세상처럼 혁세주와 파멸인으로 뒤덮여 멸망한다.

예언. 정해진 결과. 아니, 결과를 증명하기 위한 과정.

발버둥 치면 칠수록 급류에 휩쓸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에, 리안의 오금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억지로 힘을 줘서 비틀대는 선에서 끝내긴 했지만, 누가 봐도 리안의 얼굴은 휴식이 필요한 사람의 안색이었다.

그런데도 리안은 이렇게 묻는 걸 잊지 않았다.

“산은 어떻게 했지?”

“아무리 짐이라도 산 자체를 부술 순 없어. 일단은 경로를 감시하도록 했어. 혹시라도 사람이 사는 곳 위를 지나가기라도 한다면 난리가 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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