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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466화 (466/541)

황국으로 가는 길(3)

“싫어하는 일도 ‘필요가 부른다면’ 마다하지 않는 생물이지, 태사는.”

지금 태사의 방침은 카라코룸 천도를 둘러싼 이러저러한 목소리에 ‘대응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는 태사더러 무책임하다고, 방만하다고 비난할지도 모르지만, 재연이 보기엔 지혜로운 대응 방식이었다.

태사는 의견을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시위 이상의 행동을 하지 못하게 손발을 묶어버린다.

딱히 반대하지도, 찬성하지도 않았기에 모두가 그녀의 입만 바라보는 상황이다.

시간이란 느리게 바위를 풍화하는 바람처럼 사람의 마음 또한 누그러뜨린다.

아마 미리안은 다른 사회적 쟁점이 떠올라 사람들의 관심이 그쪽으로 향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내라는 측면에서 보면 존경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시간이 과연 미리안의 편일까.

“싫어도 이 문제에 대해 입을 열 수밖에 없게끔…… ‘그럴 필요’를 만들겠다는 이야기야?”

수영의 질문은 재연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두 가지 방안을 생각해뒀지. 실은 이미 돌아가는 정세가 필요를 만들고 있고, 나는 등을 살짝 떠밀 뿐이지만.”

***

“고려 태사인지 뭔지 아주 공산주의자예요! 공산주의자!”

옛 낭키아스의 시골은 분위기가 느슨한 편이다.

한족 반란이 진압되고 몇 년 지나는 동안 ‘저 정도 반발심이야’라는 느낌으로 넘어가 주기 때문이다.

또 게레센제 세력을 처리한 숙청 이후로는 반란 가능성을 낮게 잡기 때문이기도 했다.

“멀쩡한 남의 땅 뜯어다가 거지들 나눠준다는 게 공산주의가 아니면 뭡니까?”

다이온 통합 이후 3년. 한족 민중의 불만을 달래고 통치 체제를 일신하기 위해 실시한 토지개혁은, 반대로 이렇게 한족 지주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다.

그런 지주들이 모여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불만들을 쏟아낸다. 술도 들어갔겠다 고려인, 또는 몽골인 공무원 앞에서는 눈치만 살피던 이들이 대담무쌍하게 불평을 토한다.

“암요, 공산당이 버젓이 합법적으로 활동하게 허락하면 그게 공산주의자이지 뭐겠습니까?”

이들이 공산주의를 비롯한 좌익 사상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이온의 대개혁에 따라 땅을 내놓아야 하는 것, 땅을 내놓기 싫다면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공공사업을 위한 토지로 전환해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개혁에 어떻게 비난할 말을 찾다가, 그저 어딘가에서 들었던 공산주의를 욕하는 것일 뿐. 일종의 버릇이었다.

“저들은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이 땅을 가져야 한다고, 우리는 조금도 일하지 않고 그저 누워서 받아만 먹는다고 하지만, 생각해보시오, 우리가 놀면서 저 넓은 땅을 가졌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분개를 담은 맞장구에 열변을 토하는 지주는 더 기세가 오른다.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선친, 조상 대대로 열심히 일해서 한 뼘, 두 뼘 사들인 땅이 오늘날 우리를 지주로 만든 거요. 그러는 동안 저들은 뭘 했습니까? 조상 대대로 돈 좀 벌었다 하면 술 처먹고, 노름으로 날리고, 아니 누가 그러라고 등 떠밀었답니까? 우리 조상들이 술, 노름 재미를 몰라서 악착같이 재산을 모았겠어요? 자손들 생각해서 이를 악물고 수십 수백 년 동안 노력한 결과입니다. 응? 그게 어디가 불공평하다는 건지 원…….”

여기까지는 시골 노인들의 흔한 구시렁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인 또는 몽골인 관료가 들어도 웃어넘길 수준의 이야기였다.

“좋다고 땅을 받는 놈들도 그래요.”

불만은 개혁을 실행하는 몽골이나 고려 정부에서, 그 혜택을 받는 소작농들에게로 옮겨갔다.

“실컷 게으름 부리다가 기회는 이때다 하고 넙죽넙죽 남의 땅을 받아먹는 건 뭐 그렇다고 칩시다. 독립운동이니 뭐니 할 때 압제자 몽골, 고려인들의 통치 때문에 농민이 억압당한다고, 그러니 꼭 독립해야 한다고 날뛰던 건 어디의 누구랍니까?”

“거, 취하셨소.”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니 곁에 앉은 다른 지주가 어깨를 두드리며 만류한다. 그러나 열변을 토하던 지주는 손사래를 치며 그런 만류를 뿌리치고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생각들 해보시오. 아니 그렇소? 그렇게들 독립, 독립하더니 고려가 주는 밥은 맛있는 모양이지요? 그간 우리더러 식민 지배에 굴종한다고 손가락질하더니, 정작 땅 좀 나눠주니 고려인들 앞에서 굽신대는 건 대체 누구람!”

“거지처럼 살더니 한(漢)의 긍지마저도 저버린 것들 같으니…….”

누군가 열변에 동조하며 그렇게 한탄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이래서야 꼭 고려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는 열사들의 모임 같지 않은가.

여기는 그저 고려의 정책에 불만을 늘어놓는 자리였을 텐데.

어색한 분위기에 지주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열변을 토하던 지주도 완전히 술에 떡이 되는 바람에 하인들이 업어갔다.

그 지주와 동조하던 다른 지주가 잡혀들어간 것은 며칠 뒤의 일이었다.

***

“당장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진 않겠지만, 간과할 순 없는 문제군.”

지주들의 공공연한 불만에 대해 보고 받은 리안은 늘 그래왔듯 상황을 평가하고 정리했다.

“개혁은 확실히 민중이 다이온의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어. 한족 민중은 이제 위험한 독립운동보다는 경작할 땅을 받아서 안정적으로 삶을 꾸려나가려 들겠지.”

“독립으로 이루고자 하던 걸 이미 다이온에게서 받았으니까요.”

왜 독립해야 하는가. 제국이 억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국이 억압하지 않고 혜택을 베푼다면? 독립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견하의 말에 리안은 끄덕였다.

“하지만 예상은 했어도…… 지주층의 이반은 속이 쓰리군.”

“땅도 잃고, 민중을 동원할 수도 없는 지주들이 위협이 될까요?”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야. 농촌 사회에서 지주는 단순히 부자를 의미하진 않거든. 흔히 그들은 ‘지역 유지’를 겸하고 있지.”

말하자면 동네의 ‘큰 어르신’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실제 인성이나 생활 수준과는 별개로 그들이 관습적으로 누리던 지위에 ‘존경’을 표한다.

“무형의 영향력…… 그게 얼마나 민중에 영향을 끼치고, 다시금 새로운 유형의 독립운동 조직으로 이어질지 알 수 없어. 당장 발해도 행정에 참여한 한족 독립운동가 중에도 지역 유지 출신이 꽤 되잖아?”

독립운동은 가난한 자나 사회의 비주류만 하는 것이 아니다.

상류층이라는 것은 교육의 기회를 많이 접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 교육은 제국의 입맛대로 편집된 공교육이기도 하지만 사사로이 접한 ‘민족 교육’이기도 하다.

그에 따라 지역 유지 본인뿐만 아니라 자제들도 종종 독립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지금껏 독립운동과는 거리를 두던 유지들이 새로운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나타난다면? 당장 위협이 되진 않더라도 내버려 두면 다이온 체제의 위협이 될 것은 뻔하다.

“그렇다고 해서 개혁의 고삐를 늦출 순 없잖아?”

이 자리에는 오랜만에 칸발리크에서 돌아온 황제 루우도 참석했다. 동명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총명한 두뇌에 어울리는 정확한 의견을 내놓았다.

“반발은 반발대로 감시해야겠지만, 그 반발 눈치 보느라 토지개혁이 중단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돼. 아니, 개혁 중단에 실망한 한족 민중이 다시 독립운동 세력으로 돌아설 수도 있어. 그렇다고 한 번 불만을 품은 지주층이 다이온의 품으로 돌아오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지.”

실로 오랜만에 듣는 황제의 정견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리안은 활짝 웃으며 루우의 의견에 동의했다.

“개혁의 지속을 바라는 민중, 중단을 바라는 지주, 두 세력이 독립의 대의 아래 손잡을 가능성은 작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이중전선’의 부담을 짊어지게 돼.”

그러니 시작한 개혁은 끝을 봐야 한다.

마침 극북방위군 시찰에서 돌아온 효윤도 의견을 덧붙였다.

“누군가 내려가서 개혁이 제대로 진행되는지, 불만을 품은 무리의 불온한 움직임은 없는지 직접 감독해야겠네요.”

제가 극북을 시찰한 것처럼요, 하고 효윤은 덧붙였다.

루우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일반 관료를 파견하고 보고를 받는 것과 태사의 눈과 귀가 직접 가서 보고 듣는 건 엄청나게 다르겠지.”

여기서 리안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였다.

그때 본 1936년의 환상. 카라코룸의 풍경을 피할 방법이.

견하를 카라코룸에서 멀어지게 하면 되지 않는가.

좋은 구실도 있다.

이 일은 견하의 성품이나 재능과도 어울린다.

리안은 씩 웃었다. 시선이 견하를 향했다.

“견하 네가 정치감독청장 자격으로 응천에 다녀왔으면 해.”

견하는 ‘제가요?’하고 반문하지 않았다. 카라코룸 천도 문제에서 떨어뜨려 놓으려는 리안의 의도는 명백했다. 여기에 반대할 방법은 없다. 견하는 말없이 끄덕여 명령을 받아들였다.

“함께 갈 인원이나 구체적 활동 내용은 네 재량에 맡길게.”

일단은 여기서 숨 고르기를 해야 하나. 풍군작전 이래 견하에게 성숙해진 구석이 하나 있다면, 길이 막혔을 때 억지로 돌파하려 들기보다는 기다릴 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응천은 또 다른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견문을 넓히고,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해 상황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카라코룸 문제에도 더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

견하가 곧바로 일에 착수하겠다며 어전을 먼저 떠나자마자, 세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다.

“……견하가 카라코룸 문제를 설득해달라고 불렀다며?”

“뭐, 제가 언니를 설득한다고 해봤자 ‘극북 물자 보급에는 동명이나 칸발리크보다는 카라코룸이 나아요’ 정도밖에 없으니까요…….”

리안은 피식 웃었다. 성실하게 극북방위군 시찰에 임하는 그녀다운 대답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지난 3년 동안, 그저 격에 맞춘 중장이 아니라 확실히 지휘관으로서의 중장다워졌을까?

정복을 걸친 효윤은 여전히 강력한 이단이었지만, 이단보다는 장성의 냄새가 훨씬 강하게 풍겨온다.

“견하가 저렇게 순순히 응천행을 받아들일 거였다면 제가 굳이 올 필요는 없었네요.”

“아니, 잘 와줬어. 할 얘기도 있었고.”

리안은 시선을 잠깐 내렸다가, 루우에게로 향했다.

황제는 태사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안다는 듯 다리를 꼬았다.

이제는 그녀도 대담하게 태사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열여섯 소녀 전사가 아니었다. ‘친구’들에 비해 생일이 늦긴 했지만, 루우도 어느새 스물셋.

리안과 엇비슷했던 키도 훌쩍 자라 머리 하나는 더 큰 효윤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어좌에 앉아 꼰 다리는 그 길이에 맞게 예쁜 선을 뽐낸다.

“마르코 폴로의 환상 이야기야.”

“환상이라고 치부할 일은 아니지.”

“위급한 상황에서 본 환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어.”

마르코 폴로를 본 리안이 오히려 그 확실성을 부인하고, 본 적 없는 루우가 진실로 받아들이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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