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국으로 가는 길(2)
연방의 수도를 정한다. 그곳은 바로 카라코룸이 되어야 한다. 그런 주장 자체로 당장 몽골의 자치가 위협받는다.
“몽골과 고려를 하나로 통합하기라도 하려는 겁니까.”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 하고, 다가오는 시대가 그러한 조치를 필요로 합니다.”
덤덤하게, 너무나도 파격적인 말을 내뱉는 주견하 앞에서 의사당 안이 괴괴해졌다.
“……주 청장?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논쟁에서 이기려고 아무 말이나 막 내뱉는 것이 아닙니다. 다이온 연방에 가해지는 안보 위협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다가올 전쟁에서 이긴다고 할지라도, 얼마나 큰 피해를 입을 것인가, 혹은 피해를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가 바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
“「화림 계획」은 너 혼자만의 생각일까?”
정치감독청장 주견하를 향한 제국최고회의의 질의는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태사의 호출을 받고, 견하는 태사부로 향했다.
태사의 집무실 안에서, 리안은 창가에 선 채 견하에게 그렇게 물었다. 견하 쪽으로는 돌아서지 않는다.
“카라코룸이 새로운 후보지로 적절하다는 건 제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거기에 다른 사람들의 발상이 얽혀들긴 했지만.”
“황제의 생각도?”
루우는 지금 동명에 없다. 그녀는 몽골이 동군연합의 대등한 한쪽임을 보여주기 위해 칸발리크에 가 있다.
황제의 부재를 의식해서인지, 묘하게 리안의 목소리에 날이 선 것 같았다.
“황제는 이 문제에 대해선 별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 별생각이 없겠지.”
바로 그 점이 문제라고, 리안은 입술을 짓씹으며 생각했다.
3년. 루우는 변했다.
아니, 변했다고 생각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런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고려의 황제가 된다, 몽골의 카간이 되어 동군연합의 군주가 된다. 딱 여기까지 목적이 달성되자, 루우는 정치적인 문제에는 관심을 끊어버렸다.
대신 투글룩을 데리고 이단 문제에 몰두했다.
아마 그게 처음부터 목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루우 본인의, 그 몸을 만들어낸 과정을 추적해…… 궁극적으로는 자신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 말이다.
수명이 짧을지, 아니면 훨씬 길지 알 수 없다고도 했다.
어쩌면 오해일지도 모르지만, 리안에겐 그렇게 변해버린 루우의 모습이 자신과 견하에 대한 무관심처럼 느껴졌다.
한 번, 게레센제를 죽이던 날 보았던 환상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마르코 폴로를 자처하는 존재와 만나, 몇 번이고 반복된 비극의 1936년을 보았노라고.
그 해는 어느덧 리안의 앞에 성큼 다가와 있는데, 제국의 가장 강력한 이단이자 많은 비밀을 쥐고 있는 루우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마치 리안과 견하가 어떻게 되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듯.
자신은 더 큰 세계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견하에게 일어나는 일은 흥미로울 순 있지만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그 태도.
리안의 정신은 3년 동안 마르코 폴로가 보여준 환상에 갉아 먹혀 가는데, 루우는 태평 무사하기 짝이 없다.
-아니, 이건 순전히 내 생떼일지도 몰라.
환상 속에서, 리안이 하지 않으면 효윤과 루우가 견하를 구할 방도를 모색하지 않았던가. 특히 루우는…… 몸이 기괴하게 변해가면서도.
-그때 본 게 ‘견하를 구하려는 몸부림’이길 바라야지.
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견하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보이지 않는다. 무심하게도.
“한재연은? AN연구소와…… 천손민족협회 출신들은 어때?”
“그쪽 생각은 좀 반영되었죠. 제가 눈치채지 못한 요소들을 은근슬쩍 끼워 넣었을 수는 있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에요.”
“안세규와 고려국민당도 지적했더라. 카라코룸 천도는 결국 몽골의 완전 합병을 의미하는 거 아니냐고.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렇게 되면 우리가 했던 모든 일이…… 허동주의 망상과 아무런 차이가 없게 돼.”
“그럴지도 모르죠.”
약간의 냉소, 약간의 짜증. 그런 것을 견하의 말 속에서 느낀 리안은 그제야 견하 쪽으로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어찌 보면 무구하다고도 할 수 있는 얼굴이다. 다가올 파멸은 카라코룸에 있는데, 왜 자꾸만 거기로 가려 하는가.
리안이 견하의 태도에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견하가 먼저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저들’이 우리가 그렇게 변하도록 하는 거예요.”
견하가 말하는 ‘저들’의 의미는 다양하다.
아즈텍 내전에서 최종 승자가 된 멕시카 자주국.
최근 몇 년 동안 평화로웠다고 해도 여전히 티베트 고원 너머의 위협인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 아니 이제는 ‘세계 혁명 연합’인가.
북부 이탈리아에 ‘본토 군관구’를 설치한 로마 제국.
이를 가는 신성 제국과, 이제 신성 제국을 견제하기보다는 동맹으로 삼는다는 외교적 대전환을 한 브리튼.
이 모든 나라가 각자의 문제에 대처하는 듯 보이지만, 모아놓고 보면 결국은 다이온에 대한 거대한 포위망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 어디서 원하지 않는 전쟁이 벌어져 말려 들어갈지 모르는 국제 정세.
3년간 조용했다지만, 그 3년은 또한 긴장이 끝을 모르고 높아져만 가는 기간이기도 했다.
“우리에겐 물자 보급의 중심, 전쟁 지휘의 중심이 될 공간이 필요해요. 동명은 위치상 부적합하고요.”
동명은 분명 대도시고, 세계 경제의 주요 거점 중 하나다. 바다로 뻗어나가는 길목에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모든 장점은 평화로운 시기의 것이지,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것은 아니다.
“극북에서 베트남까지, 길어진 해안선은 그대로 적의 상륙을 감시할 방어선이 되어버렸죠. 이런 상황에서 칸발리크든 동명이든 약점으로 작용하지 다른 역할을 하긴 어려워요.”
그 모든 해안선에 요새를 짓기엔 시간도, 돈도 부족했다. 해안을 순찰할 해군 역시 부족했고.
리안은 입술을 달싹일 뿐, 반론하진 못했다.
이미 반론할 수 없다고 그녀의 이성이 결론을 내렸으니까.
그때 보았던 환상처럼 견하가 죽는 것을 막고 싶다. 허동주의 구상처럼 고려가 주변국을 병탄하는 것만큼은 막고 싶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저 리안의 사적인 희망일 뿐.
3년 전 벨리사리우스가 로마시에서 다른 세상의 괴물을 병기로 쓰기 시작하면서…… 아니, 아마도 칸발리크 사태 이후로 세상은 평화에서 점점 더 멀어지기만 했다.
그러니까 이 3년은 일종의 휴가 같은 것이라고, 리안은 막연히 느꼈다.
한숨을 내쉰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직, 아직은 시간이 있을 거야.”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시간이 있겠죠.”
“외교적 해법이 좌절된 건 아니야.”
자기도 모르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제야 견하는 약간 주춤했다.
그 모습에 리안은 가슴 한구석이 쓰라려 오는 걸 느끼며, 외무성의 조유관을 호출했다.
***
극북 지역 요새화 작업에 고려는 3년 내내 돈과 사람을 쏟아부었다.
지지부진해 보이지만 3년 전과 비교하면 제법 요새다워지긴 했다.
이런 요새가 수천 킬로미터에 걸쳐 늘어서서는, 북극해 너머 멕시카를 겨냥하고 있다.
그쪽에서 오는 항공기를 격추할 대공포부터, 차디찬 북극해를 헤엄쳐 건널 ‘정체 모를 무언가’까지 대비한 병기들까지 웬만한 건 다 갖췄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언니를 설득하는 데 좀 도와달라고?”
견하로부터 온 전보를 읽던 효윤은 눈을 들어 눈앞의 공사장을 바라봤다. 전문적인 건설업체부터 병사들까지 모조리 동원되어 각 요새로 갈 보급망을 짓는 중이었다.
그렇다. 보급이 문제다. 아무리 멋진 요새, 강력한 무기를 갖춰도 그 안에 총알과 포탄을 실어 나를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단으로 평생을 살아온 효윤도 여기서 3년을 보내는 동안 그 원칙에 익숙해졌다.
수백만 발. 몇 달 만에 수백만 발에 달하는 포탄 소비를 감당할 수 있는 보급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보급망을 감당할 수 있는 본국의 생산 체계도.
“뭐, 카라코룸에서 극북 지역 보급망을 통제한다면야 동명보다 나은 점은 있겠지만…….”
그걸로 카라코룸으로 천도해야 한다며 리안을 설득하라니, 조금은 황당한 요구라고 효윤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도 고려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리안의 목숨을 지키며 많은 것을 보고 배운 사람이었다. 카라코룸 문제에는 군사적 요인만 작용하는 게 아니다. 정치적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효윤은 누구 편을 들기보다도, 직접 수도로 돌아가서 살펴봐야겠다고 느꼈다.
만약 이 문제를 두고 리안과 견하가 대립 중이라면, 중재할 사람이 더 있어야 할 테니까.
바람이 매서웠다. 효윤은 코트 깃을 여몄다. 3년 내내 여기 처박혀 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익숙해져야지 않나 싶은데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추위다. 날씨가 풀렸다 하면 또 모기는 얼마나 많은지.
조금만 방심하면 귀와 코가 떨어져 나갈 추위 속에서, 효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작업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시찰했다. 처음 그녀가 여기 왔을 때는 ‘어린 계집애가 관광 온 거냐’며 황당해하던 이들의 태도도 바뀌었다. 이제 그들에게 효윤은 확실히, 전방 시찰을 오신 ‘장군님’이다.
북극해를 건너온 고래 비슷한 괴물을 칼 한 자루로 때려잡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되겠지만.
이제는 완전히 부관이 된 태주갑을 돌아보며, 효윤은 말했다.
“오랜만에 동명에 다녀와야겠어.”
***
리안이 카라코룸 천도에 대해 그 어떤 공식적인 답도 내놓지 않았기에, 시위는 딱히 정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건 아니었다.
대신 평화롭게 황궁 앞 광장을 향해 행진하며 태사께서, 혹은 황제 폐하께서 결단을 내려 주시길 바란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카라코룸은 하나 된 다이온의 주춧돌이다!”
그런 구호가 거리를 조금 시끄럽게 할 뿐.
정치감독청 건물, 창문이 넓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그 행진을 내려다보며, 재연은 술잔을 기울였다.
그가 3년 전에 고안했던 ‘다이온 강역기’가 이번 시위에서도 나부끼고 있다.
“충돌이 거의 없다는 게 놀라울 정도야.”
재연의 옆에서 수영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예 없진 않지. 동명이 수도의 역할을 계속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저런 구호가 좋게 들릴 리 없으니까.”
“그래도 이제는 시위 조직의 달인이라고 불러도 되겠어. 아니면 대중선동의 달인이라고 해야 하려나?”
비웃는 듯도, 자랑스러워하는 듯도 한 신비한 웃음소리. 수영의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재연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대학생 시절의 풋풋함이 남아 있었지만, 몸에 달라붙는 제복 위로는 이제 ‘여인’이라 불러야 할 분위기가 감돈다. 재연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며 흔들리던 눈동자는 3년 사이에 그녀 나름의 의지를 찾아냈다.
이젠 재연의 계획을 의심하지 않고, 그 걸음을 함께하고 있다.
“그런데, 태사가 움직이게 하려면 뭔가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수영의 의문에 재연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