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국으로 가는 길(1)
고려와 몽골의 동군연합이 성립한 지 3년이 지났다.
신성 제국이 로마 제국에 이탈리아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굴욕적인 화친을 맺은 지는 2년이 조금 넘었다.
그리고 견하 개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작년 초에 졸업식을 치르고 본격적인 관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엘리트 관료의 길을 걷게 된다고 좋아하셨지…….
1929년 4월, 그 운명의 밤으로부터 어느새 7년이 지나, 견하는 정치경찰실 실장의 지위에 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감독청’으로 이름이 바뀐 조직의 청장으로.
나제홍은 정말로 그 자리에서 물러나 꿈에 그리던 두둑한 연금을 받는 노후를 보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감찰국장이던 견하가 나제홍의 지위를 승계, 그간 나제홍이 꾸려왔던 조직까지 모조리 자기 휘하로 흡수했다.
-기뻐해 주는 사람들은 있다.
견하에게 중장 계급장을 달아주던 리안은, 미소를 억누르려고 애썼다. 지나도, 오랜만에 극북에서 돌아와 견하의 진급식에 참석한 효윤도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견하는 느꼈다.
정말로 기뻐해 주길 바랐던 얼굴은 이제 없다고.
부모님의 마지막 얼굴은 그날 밤의 참혹했던 시신으로 견하의 뇌리에 남아, 지금까지 7년간, 매일같이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누군가 허망함을 ‘가슴이 뻥 뚫린 것 같다’고 표현했던가.
혹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이라고도 했다. 어느 쪽이든 참 적절한 표현이라고 견하는 생각했다.
공허감을 채워주는 것이 있다면 딱 두 가지.
리안과 보내는 시간,
그리고 적과의 투쟁.
‘적’이란 외부, 즉 다이온의 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내부, 즉 견하 개인의 적을 의미하기도 한다.
당장 지금 같은 경우엔……
“천도 논의는 주 청장의 권한을 벗어난 일 아닙니까?”
작년에 완공된 제국최고회의 의사당. 고려의 최고 의결기구이자 다이온의 실질적 최고 의결기구로 기능하는 곳이다.
그 위엄에 걸맞게 드높은 천장 아래, 제국을 상징하는 화려한 상징들 사이에서 안세규의 목소리가 울린다.
“천도는 그야말로 국가 정책의 가장 기본 틀을 전환하는 문제입니다. 게다가 주 청장이 제시한 천도 후보가…… 카라코룸인 것은 그 이상으로, 국가 체제 자체에 변혁을 도모하는 것은 아닌지?”
지난 3년간 안세규의 안광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목소리는 더욱 깊게 울린다. 3년 전에 처음 제국최고회의에 들어온 초선 의원이라면 안세규의 저런 추궁을 받는 것만으로도 말을 더듬겠지만,
주견하는 아니다.
“정치경찰실이 정치감독청으로 확대 개편되고, 제가 그 청장으로 취임한 이래, 국가 안보 문제는 제 손을 떠난 날이 없습니다.”
가족을 잃고 갑자기 미리안을 둘러싼 정치투쟁에 휘말려 넋이 나갔던 소년…… 그 소년은 이제 없다.
안세규의 눈앞에 앉아, 평소보다 느릿한 말투로 대응하는 이 청년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존재가 아니다.
그가 허동주를 죽이던 날, 혹은 고려국민당을 배제하고 풍군작전을 실행하기로 한 날부터 꾸준히 커 온 괴물이었다.
호통을 쳐봤자 소용이 없겠지.
그러면 주견하는 냉소로 대응할 테고, 그걸 꼬투리 잡아 ‘행정부 관료가 입법부 의원을 모욕하는가’라고 해봤자 입법부를 구성하는 다른 사람들이 동조해주지 않을 것이다.
바로 제국최고회의의 과반을 차지하는 제국입헌당 의원들이.
주견하보다 나이도 많고 정치 경력도 훨씬 긴 의원들이 정치감독청장의 수하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당’ 자체는 주견하가 장악하고 있다.
지난 수년간 ‘청년’ 당원들이 물밀듯이 제국입헌당으로 몰려들었다. 그 현상은 주견하가 아직 감찰국장이던 시절부터 오래 공들여 왔던 것이다.
중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정치감독청 감찰국 소년과의 영향을 받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청년과의 영향을 받는다. 대학 진학을 하면 학생운동 조직으로, 곧장 취업하면 그들만의 ‘노조’로.
이 정치감독청의 학생 조직이 고려국민당의 학생 조직들과 대립하듯이, 정치감독청의 노동조합은 좌익 정당의 노동조합과 대립했다.
그들 ‘어용노조’에 대해 보고 들을 때마다, 안세규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허동주가 구상했던 것과 유사한 것 아닌가, 하고.
허동주는 내전 당시 평양에서 지지 세력을 모아 연설을 한바탕했다고 한다. 그 연설에서 허동주는 사회주의적인 노동조합이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노동조합을 제안했는데, 대략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국가에 헌신하는 노동조합’이었다는 듯하다.
요컨대 노동자를 허동주가 부려먹기 좋은 형태로 조직하겠다는 것인데…… 지금 그 구상이 주견하의 손에서 부활한 것은 아닌지.
실제로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에서는 그런 우려가 들려온다.
오늘 여기, 천도 문제에서 주견하의 기를 꺾어두지 않으면 대체 얼마나 멀리까지 진격할지 알 수가 없다.
“수도의 위치 문제는 분명 군사 안보와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보는 군사 분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경제적 측면에서의 안보도 있지요. 사회적 측면에서의 안보도 있습니다. 카라코룸 천도가 경제적,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리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정치감독청은 다소의 혼란은 감당해야 할 문제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제 막 내전과 대공황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국민이 또 무엇을 감당해야 합니까?”
“국민이 감당할 부담은 카라코룸 천도에서 오지 않습니다. 아즈텍 대륙에서 올 겁니다.”
실로 비열한 술수라고 안세규는 혀를 찼다.
국내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하기 위해 ‘외부의 적’을 상정하는 버릇. 이런 식의 주장은 어떤 성향의 정치가가 하든 정말 필요한 논의를 가로막는다.
외부의 적을 막고 국가를 수호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는 건 사실이다. 국가 그 자체가 없어져 버리면 그 어떠한 이상도 소용이 없으니까.
모든 이상은 국가가 존재한다는 가장 기초적이고 공통된 사실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다.
평생을 누군가에게 습격당할 걱정만 하면서,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 몸을 지키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그 인생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저 존재할 뿐인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저 존재할 뿐인 국가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국가는, 설령 이룰 수 없더라도 모든 구성원의 이상적 삶을 ‘추구’는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런데 그저 ‘존재’하는 데에 구성원의 삶을 소모한다면 그런 국가의 ‘안보’는 대체 무슨 의미인가?
수단을 지키기 위해 목적을 희생하는 꼴이다.
이 모순을 주견하가 모를 리 없다.
즉, 그는 자신의 이익…… 혹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위해 안보라는 구실을 끌어들였을 뿐.
큰 차이는 없다. 결국, 그것이 주견하의 이익일 테니.
안세규는 굳이 말할 것도 없는 일이라는 어조로 답했다.
“아즈텍 대륙의 내전이 멕시카 자주국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 정도는 여기 계신 의원님들 전부 아십니다.”
“아신다면 저는 왜 천도가 제국최고회의에서 논쟁거리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국최고회의 내에는 국가방위위원회도 있으니 카라코룸 천도의 군사적 의의에 대한 이해는 충분하리라 봅니다만.”
“멕시카 자주국의 군사적 위협을 간과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과연 동명을 중심으로 한 수십 년 수도권을 버려가면서 대응하는 것이 최선인가, 저는 그런 의문을 표하고 싶습니다.”
신성 제국이 아즈텍 대륙에서 의용군을 철수시키면서, 더는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서유럽 각국도 의용군을 철수시켰다.
신성 제국이 비우고 간 전선을 남은 나라의 군대가 메울 수는 없다면서.
신성 제국 핑계를 댈 수 있었기에, 소득 없는 의용군 철수에 따른 국민의 불만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그 결과 당연히 신연방이라 불리던 조잡하게 구성된 집단이 가장 먼저 붕괴했고, 뒤이어 멕시카의 총공세를 받은 호데노쇼니 인민공화국이 무너졌다.
아즈텍 대륙의 좌익 인사들, 혹은 멕시카군을 믿지 못하고 망명을 택하기로 한 주민들이 아비규환 속에서 어찌어찌 배에 올라 탈출한 게 1934년의 일이다.
그 대규모 탈출선단을 고려 해군이 보호하는 과정을, 정부 각처 장관들과 제국최고회의 의원들이 뜬눈으로 지새우며 지켜보지 않았던가.
멕시카 자주국 쪽으로 넘어간 구 아즈텍 연방 해군이, 대륙을 탈출하는 선단에 바짝 다가선다. 그것을 고려의 함대가 끼어들듯 견제한다. 단 한 번의 함포사격으로 전쟁이 시작될 수도 있었던 상황.
그때의 위기감을 2년 뒤인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호데노쇼니 인민공화국을 탈출한 사람들 대부분은 역시 공산국가인 바라트로 향했다. 다이온은 그 철길도 제공했다.
하지만 딱히 좌익 이념에 관심이 없었던, 평범한 피난민 중 상당수는 고려 곳곳에 난민촌을 형성하고 정착했다.
이들이 고려나 다이온 구성국 중 어딘가에 잘 정착하도록 지원하는 것은 지금도 태사부와 제국최고회의의 고민거리 중 하나다.
“그러나 일촉즉발의 위기는 지나갔습니다. 포탄 한 발에 전쟁이 일어날까 벌벌 떨던 시기는 지나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이 문제는 외교의 위기이기도 한 만큼 외교적 해법을 고민해야 할 시기죠. 정치감독청은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은 있습니까?”
“외교적 해법은 외무성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저희 정치감독청은 ‘외교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합니다.”
“외교적 해결이 통하지 않았을 때의 군사적 해법은 군에서 찾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정치감독청이 군의 역할을 대신하지는 않을 텐데요?”
“저는 중장 계급장을 달고 있습니다. 정치감독청이 군의 지휘를 받는 기관은 아닙니다만, 그 군사적 성격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직속상관은 태사 각하십니다. 태사부의 군사적 전통을 생각하면 그 하위 기관인 정치감독청이 군사 안보 분야에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주견하도 안세규도, 팽팽하게 대립할 뿐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안세규가 지적한 대로, 이것은 단순히 고려의 수도를 옮기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천도’ 문제라고 부르고들 있었지만, 실상은 천도라기보다는 ‘새로운 수도’를 정하는 것에 가깝다.
고려의 수도가 아닌, 다이온 연방 전체의 수도를.
따지고 보면 다이온 연방은 성립한 이래 정해진 수도가 없었다.
게레센제가 있던 시절에는 동명과 칸발리크 정부가 따로 놀았고, 동군연합이 성립한 이후에는 동명이 그 역할을 맡았지만 공식적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칸발리크에는 여전히 ‘몽골 정부’가 있지 않은가.
황제도 ‘두 나라 모두의 군주’임을 보여주기 위해 서너 달에 한 번씩 두 황궁을 오간다.
그러나 아무리 구성국의 자치를 인정한다 해도, 다이온은 엄연히 ‘하나의 큰 틀’이다. 특히 다이온 바깥의 외교적 문제에 있어선 고려의 외무성이 ‘다이온 연방’의 이름으로 대처한다.
이미 하나의 국가가 되었는데 중심이 될 수도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는 것이 주견하의 주장이다.
그러나 안세규는 바로 그 ‘하나의 큰 틀’이라는 관점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다이온 연방이 구성국들에게 자치라는 시혜를 베푸는 게 아니라, 구성국의 자치라는 원칙이 다이온 연방을 성립 가능케 하는 겁니다.”